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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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상시(奉常寺)

서지사항
항목명봉상시(奉常寺)
용어구분전문주석
하위어분봉상시(分奉常寺)
동의어태상시(太常寺), 태상(太常)
관련어봉상사(奉常司), 청재감(淸齋監), 태상지(太常志), 전의시(典儀寺), 전사시(典祀寺)
분야정치
유형집단 기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고려 후기와 조선시대에 국가적인 제사 및 시호 제정 관련 업무를 관장하던 관서.

[개설]
태상시(太常寺), 태상(太常)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봉상시는 고려 후기 원간섭기하인 1298년(고려 충렬왕 24) 종전의 태상부를 개칭하면서 설치되었다. 조선조에서도 계속 존속하며 종묘제례 등 각종 국가적인 제사를 주관하였고, 시호 제정 임무도 관장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봉상시는 직접적으로는 고려 목종 때 설치된 태상에 연원을 두며, 멀리는 중국 주나라 때 대신의 관직 가운데 하나인 질종(秩宗)에서 유래하였다. 태상은 이후 문종 때 태상부로 개칭되었다가 고려 후기 1298년 봉상시로 개칭되었다. 태상부가 봉상시로 개칭된 것은 원간섭기라는 시대적 상황이 반영된 것이었다. 봉상시는 이후 몇 차례 전의시와 태상시 등으로 명칭 및 직제가 개편되면서 존속하였다.

조선 건국 직후인 1392년(태조 1) 7월 문무백관 관제 반포 때에 봉상시라는 명칭으로 다시 설치되었다. 1409년(태종 9) 전사시로 개칭되었다가 1420년(세종 2) 다시 봉상시로 복원되었다. 한편 복원 시점에 대해서 『태상지』 등에서는 1421년(세종 3)으로 규정되었으나 『조선왕조실록』에 의거하면 1420년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조직 및 담당 직무]
봉상시는 고려 후기 설치 당시에는 경 2명, 소경 1명, 승 1명, 박사 1명과 대축 1명, 봉례랑 1명의 관직을 두었다. 이속(吏屬)으로는 기사(記事)·서자(書者)가 있었다. 조선 건국 직후 관제 제정 시 봉상시의 직제는 정3품의 판사 2명, 종3품의 경 2명, 정4품의 소경 2명, 종5품의 승 1명, 정6품의 박사 2명을 비롯해 정7품 협률랑 2명과 대축 2명, 정8품의 녹사 2명이 설치되었다. 이속으로 9품의 영사 2명을 두었다.

1401년(태종 1)에는 일부 직제의 명칭이 개칭되어, 경은 영(令)으로, 소경은 부령으로, 승은 판관으로, 박사는 주부로 바뀌었다. 1414년(태종 14) 다시 영을 고쳐서 윤(尹)으로, 부령을 소윤으로 개칭하였다. 이때 개정된 관직명은 이후 한동안 존속하다가 1466년(세조 12) 관제 개편을 거쳐 『경국대전』에 규정되었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직제는 의정급의 도제조와 제조 각 1명을 두고, 정3품 당하관의 정 1명, 종3품의 부정 1명, 종4품의 첨정 2명, 종5품의 판관 2명, 종6품의 주부 2명, 종7품의 직장 1명, 종8품의 봉사 1명, 정9품의 부봉사 1명, 종9품의 참봉 1명 등이었다. 이 외 봉상시정은 당상관으로 올라가는 계제직(階梯職)이었다. 봉상시는 처음에는 예조의 속아문이었다가 1409년 전사시로 개칭되면서 호조에 속하였다가, 이후 『경국대전』에서는 다시 예조에 속하였다.

봉상시는 고려 후기에 설치된 이후 국가적인 제사를 관장하였으며, 이는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그리하여 종묘를 비롯한 국가적인 제사 때 제물의 조달과 진설 및 의식을 주관할 뿐만 아니라 이와 관련된 각종 직무를 수행하였는데, 태조의 4대조에 대한 신주를 제작하거나[『태조실록』 1년 8월 9일], 사직과 원구단과 문묘 제향의 악장의 제작에도 참여하였다[『태조실록』 4년 11월 16일].

한편 전사시로 개칭되면서 한때 제사에 관한 사무만을 관장하였는데, 1420년 예조의 건의를 받아들여 봉상시를 다시 설치하고 그 직무를 당나라의 태상시에 준하도록 하였다. 즉 제사 이외에도 제복(祭服)제기(祭器)의 관리, 악기의 연습 등을 관장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2년 윤1월 10일]. 뿐만 아니라 산릉의 봉심도 관장하였다.

봉상시는 이 밖에도 국가의 중농정책을 상징하는 적전(籍田)의 농사 관리도 담당하였고, 국시(國諡)인 국왕이나 왕비 등의 시호를 비롯해 종친 및 문무 관리들의 시호를 정하는 일도 관장하였다.

관사는 처음에는 오늘날의 종로구 신문로 일대인 서부 여경방(餘慶坊)에 있었는데 후에 오늘날의 종로구 내수동 일대인 인달방(仁達坊)으로 옮겼다.

[변천]
1506년(연산군 12) 첨정 1명과 직장·봉사 각 2명이 추가로 설치되었다가 1506년(중종 1) 모두 혁파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때 직장은 승문원 저작이, 봉사와 부봉사는 성균관의 학유와 학록이, 참봉은 교서관 정자가 겸하도록 하였다. 뒤에 부정을 혁파하고 첨정·판관 각 1원을 역시 감축하였다.

정조대 이르러서는 봉상시에서 진설하는 각종 제물은 제조가 직접 감독하도록 하였고, 시호 및 능(陵)·전(殿)·궁(宮)·원(園)·묘(廟)·묘(墓)의 칭호를 논의하여 정할 때 봉상시의 도제조와 제조, 대사헌, 대사간, 부제학이 참석하도록 규정하였다. 1895년(고종 32) 봉상사로 개편되면서 혁파되었다.

[참고문헌]
■ 『국조보감(國朝寶鑑)』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태상지(太常志)』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역주 경국대전(주석편)』, 1986.
■ 한충희, 『조선초기의 정치제도와 정치』, 계명대학교출판부, 2006.

■ [집필자] 이근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