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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廟號)

서지사항
항목명묘호(廟號)
용어구분전문주석
관련어묘휘(廟諱), 사시(賜諡), 사시(私諡), 시법(諡法), 시호(諡號), 조공종덕(祖功宗德), 종법(宗法), 종호(宗號)
분야왕실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왕의 사후 신주를 모신 사당의 이름이자 왕의 호칭.

[개설]
조선시대에 재위했던 27대의 왕은 저마다 고유의 왕명을 지니고 있다. 묘호(廟號) 혹은 종호(宗號)라고 지칭되는 왕명은 엄격히 말하면 일종의 시호(諡號)이다. 묘호라는 명칭은 말 그대로 사당의 이름이다. 묘(廟) 자 앞에 시자(諡字) 한 글자를 붙인 태묘(太廟)니 중묘(中廟)니 하는 것이 그것이다. 태묘·중묘는 본래 태조묘(太祖廟)·중종묘(中宗廟)라 칭해지던 것으로서, 종계(宗系)를 나타내는 조와 종을 뺀 용어이다. 그래서 태조나 중종을 묘호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당에 모신 위패에 쓰일 경우에는 ‘태조대왕신위(太祖大王神位)’니 ‘중종대왕신위(中宗大王神位)’가 된다. 이 묘호가 역사서의 본기(本紀)에서 왕명의 제일 앞에 놓이게 됨에 따라 점차 그 왕을 가리키는 칭호 곧 왕명으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묘호의 시자는 시법(諡法)에 따라 결정되었다. 조 혹은 종 앞에 붙는 ‘시’는 시법의 원리에 따라 정해졌다. 따라서 묘호는 시자 한 자와 종계를 나타내는 한 자를 합성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종계를 나타내는 한 글자는 조와 종을 일컬으며, 그 앞에 붙는 한 글자가 시이다. 그리고 조와 종의 구분 기준은 가계의 계승 원리인 종법(宗法)과 예제(禮制)인 조공종덕(祖功宗德)이었다.

[내용 및 특징]
묘호의 연원을 살펴보면, 『사기(史記)』 「은본기(殷本紀)」에서 성탕(成湯)의 적장손인 태갑(太甲)을 태종(太宗)이라 칭하였고 태무(太戊)가 은을 부흥시키니 그를 중종(中宗)이라 칭하였으며, 은도(殷道)를 재부흥시킨 무정(武丁)에 대해서는 사당을 세워 고종(高宗)이라 하였다고 하였다. 『사물기원(事物紀原)』에서도 이에 대해 처음으로 종묘의 이름을 썼다고 하였다.

『예기(禮記)』를 보면 종법의 조·종의 의미가 잘 설명되어 있다. “별자(別子)는 조(祖)가 되고 별자의 후예는 종(宗)이 되며, 별자의 아들을 계승하면 소종(小宗)이 된다.”는 것이다. 천자의 적자는 천자의 위(位)를 계승하나, 그 지자(支子)들은 별자로서 분봉되어 분지(分支)된 가족의 조가 될 뿐 아니라 동시에 각 나라의 조가 되었다. 곧 태조는 처음으로 봉해진 임금이므로 시조는 태조로 불리고 그를 계승한 소(昭)·목(穆)은 종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법에 따라 묘호가 결정되는 것은 제통(帝統)에 있어서이지, 제후의 왕통에서는 종호를 사용하지 못하였다.

한편 혈연관계의 친소에 근거하여 분봉되어 왕통의 계승 관계가 결정되는 것과는 달리, 공덕을 기준으로 왕호를 결정하는 예제도 중국 고대에 생겨났다. 이것이 소위 조공종덕의 원리이다. 『사물기원』을 보면, “왕이 공(功)이 있으면 조요, 덕(德)이 있으면 종이다. 유우(有虞) 때 처음으로 고양(高陽)이 조가 되고, 요(堯)가 종이 되었다.”고 하였다. 주(周)나라 이전의 조·종에 대한 후대의 주소(注疏)를 보면, “무릇 조란 창업하여 세세로 전한 데서 나온다. 종은 덕이 높아 존숭받아서 그 묘(廟)를 옮기지 않는다. ……조는 조에 공이 있고, 종은 종에 덕이 있어서 그 묘를 세세로 허물지 않는다.”라고 하여, 조공종덕의 관념이 체계화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조와 종의 관념은 혈연관계를 넘어서 정치 사회적 의미를 갖게 된다. 즉 조와 종은 왕의 공과 덕을 후세인이 평가하여 묘호로 삼을 수 있는 근거를 가지게 된 것이다. 따라서 공의 비중을 높여 창업에 버금간다고 평가될 때에는 조를, 유덕자로서 국가를 수성(守成)한 공에는 종을 묘호로 삼는 제도가 생겨났던 것이다.

조·종의 묘호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시기는 한(漢)나라 때였으며, 황제의 지칭으로 불리게 된 것은 후한(後漢) 때부터인 듯하다. 『후한서(後漢書)』는 상종(上宗)한 황제의 경우에 존호를 제일 앞에 써서 「현종효명제기(顯宗孝明帝紀)」·「숙종효장제기(肅宗孝章帝紀)」라 한 것이다. 이러한 본기의 기술 체제는 황제를 묘호로 부르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러한 전통은 묘호 제도와 더불어 당대(唐代)에 와서 확립되었다.

묘호는 시법에 따라 결정되었다. 따라서 엄격히 말하면 묘호는 시호의 범주에 포함된다. 시법의 연원은 중국 고대 주나라까지 소급된다. 『사기』에 기록된 시법해(諡法解)를 보면, “옛날에 큰 공이 있으면 좋은 이름을 내려 칭호를 삼았다.”고 하였다.

시호는 본래 서로 의미가 다른 시와 호의 합성어이다. 시는 행위의 자취요, 호는 공을 나타낸다. 즉 시는 생전의 행적을 함축적으로 나타내는 칭호라 할 것이다.

『오경통의(五經通義)』에서도 ‘有德則善諡 無德則惡諡’라 하고, 또 ‘善有善諡 惡有惡諡’라 하였다. 따라서 시에는 죽은 이의 생전의 행적의 선악을 살아있는 이들이 평가하여 후손들의 교훈으로 삼고자 하는 포폄(褒貶)의 의미가 있었다. 시를 들으면 그의 행적을 알 수 있다고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묘호가 쓰이기 시작한 시기는 삼국시대였다. 신라의 왕명은 고유 왕호 앞에 혁거세(赫居世)·남해(南解)·유리(琉璃) 등의 이름을 붙였는데, 지증왕(智證王)이 죽은 후 신라 최초로 시호를 올렸다. 이후 법흥왕(法興王)이라든가 진흥왕(眞興王) 등 모든 왕들은 시호로서 왕칭(王稱)하였다. 그런데 신라의 왕호 가운데 유일하게 종호를 사용한 왕이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다. 태종의 묘호 추상(追上)은 삼국 통일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흥미를 끄는 사실은 태종의 묘호 추상이 참월(僭越)한 것이라 하여 당나라의 문책을 받았다는 점이다. 태조라는 용어는 진흥왕순수비 중 마운령비(摩雲嶺碑)와 황초령비(黃草嶺碑) 그리고 김인문비(金仁問碑)에 나온다.

고구려는 건국 초부터 시호를 사용하여 시기적으로 신라보다 훨씬 앞섰다.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東明王)이 죽은 후에 호를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2·3대 왕은 각각 ‘호위유리명왕(號爲琉璃明王)’, ‘호위대무신왕(號爲大武神王)’이라 하였다. 이를 선호후시제(先號後諡制)에 의거해보면, 동명성왕이라 할 때의 동명성은 시요, 왕은 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무신왕은 한 광무제(光武帝)가 그 왕호를 회복해주었다고 하고, 장수왕(長壽王)에게는 위(魏) 효문제(孝文帝)가 강왕(康王)이라고 사시(賜諡)하였다. 종호를 칭한 왕은 제6대 왕인 태조대왕(太祖大王)이 유일하였다. 묘사(廟社)의 건립과 이전에 관한 기사도 간혹 보이고 있으나, 이러한 호칭들이 사당의 명칭인지 그렇지 않으면 왕명으로 동시에 쓰였는지는 불분명하다.

백제는 B.C. 18년(백제 온조왕 1)에 동명왕묘를 세웠다. 2대 왕인 다루왕(多婁王)과 그 후의 여러 왕들이 시조 동명묘를 배알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왕의 사후 호나 시를 올렸다거나 장사처에 대한 기록조차 없는 것이 신라나 고구려와 다른 점이다. 그러다가 501년 동성왕(東城王)이 죽자 드디어 시호를 올리고, 이후의 역대 왕들은 시에 왕칭을 하였다.

고려는 삼국시대의 왕칭을 계승하지 않고 종호를 사용함으로써 독자적인 예제적 국가 질서를 운영하였다. 송(宋)이나 거란과의 관계에서 동아시아 질서의 전형적인 책봉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으나, 왕건(王建)을 태조로 그를 계승하는 역대 왕들은 원(元)나라 지배 이전까지 조·종을 묘호로 사용하는 예제가 정착되어 있었다. 이는 중국 당나라 제도를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원나라가 간섭하면서 묘호가 바뀌기 시작하였다. 충렬왕(忠烈王)부터 중국의 사시가 단행되었던 것이다. 원나라의 사시를 왕호로 삼은 것은 고려와 원이 군신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제현(李齊賢)과 이색(李穡)은 종을 왕이라 고쳐서, 종호를 칭한 충렬왕 이전 왕들의 묘호를 모두 왕으로 바꾸어 기록하였다. 그 이후 정도전(鄭道傳)도 고려 역대 왕들의 종호를 모두 왕으로 바꾸었다. 이들은 고려나 조선이 중국에 대해서 제후국이라는 예제적 신분 질서를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조선 건국 후 유교의 명분론에 입각하여 예치의 국가 질서를 구현하고자 한 건국 세력들은 예적(禮的) 질서관을 근본으로 묘호와 시호를 다루고자 하였다. 그것은 ‘천자사시(天子賜諡)’라는 예제의 원리를 따른 것이다. 묘호의 추상은 태조의 4대조를 종묘에 모시면서 왕으로 칭하였다가 얼마 후 조로 고쳐 올린 것이 처음이었다. 4조의 비도 마찬가지로 모두 비(妃)로 제주(題主)되었다.

그런데 세종 연간에 이르러 중국의 사시를 쓸 것인가, 조선의 독자적인 사시(私諡)인 묘호를 쓸 것인가를 놓고 논란이 제기되었다. 정종 사후의 묘호 논의와 『고려사(高麗史)』 개수(改修) 및 성종 연간의 『여지승람(輿地勝覽)』 편찬 과정에서 이 문제가 제기되었다. 정종의 묘호는 세종과 허조(許稠) 등의 주장에 따라 명나라에서 사시한 ‘공정(恭靖)’으로 왕칭하였다.

태종이나 세종은 사시(私諡)를 참칭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고려사』 개수 당시, 그리고 익조(翼祖)와 목조(穆祖)의 시호 논의에서도 “고려에서 참람하게 (종호를) 일컬은 것을 태종께서 싫어하여 모두 (왕칭으로) 고쳤다.”고 하였다. 그러나 공정왕에게 종호를 올리지 않은 이유는 태조에서 시작되는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공정왕이 아닌 태종에게 부여하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와 같이 왕의 훙서(薨逝)라든가 사서의 편찬 등에는 상호(上號)를 예제 원리에 맞게 적용하고자 하였으나, 이를 보다 깊이 연구하여 제도적으로 확립시킨 때는 세종대로 『시법총기(諡法總記)』 등이 이때 편찬되었다. 따라서 조선초기에 이미 경전을 통한 시법의 이해와 제정 원리, 그 의미 등 전반적인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역대 왕들의 묘호는 시법에 따라 시자를 결정하였다. 성종과 중종, 인종처럼 시자를 놓고 심각하게 논란을 벌일 정도로, 대행대왕(大行大王)의 생전의 행적을 상고하여 짓는 시법의 본래 취지를 살리고자 노력하였다. 어떤 경우에는 생전에 선호하던 시자를 올리기도 하였는데, 예종·명종·영조 세 왕의 경우가 그러하였다.

묘호의 결정 과정에서 왕과 신하, 정치 세력 상호 간의 견해차로 정치적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세조 이전 왕들의 묘호는 기록이 미비한 탓인지는 모르지만 별다른 쟁론 없이 상정되었다. 조선의 건국자인 초대 왕을 태조라 하고 그 첫 계승자를 태종이라 추상하는 일은 당연하였다. 그런데 제2대 왕은 태종이라 칭하지 못하고 3세기 정도 지난 숙종 때에 가서야 정종이라 추상하였다.

세종의 묘호가 결정되고 나서, 허후(許詡)와 정인지(鄭麟趾) 등이 “역대에 세종이라 일컬었던 군주는 혹은 중흥하였기 때문이거나 혹은 창업하였기 때문이었다.”고 하면서, 세종은 이와 같지 않으니 문종(文宗)이라 고칠 것을 청한 바 있다. 그러나 당시의 왕 문종이 북방에서 공훈이 있었음을 들어 거절하였다. 문종은 세종의 적장자로서 왕위를 계승하여 종을 칭하였다.

세조는 단종을 폐위시키고 즉위함으로써 종법 질서를 부정한 정치적 하자를 안고 있었다. 그렇지만 예종은 재조(再造)의 공덕을 높여 세조라 일컬을 것을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중종도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임금이었지만 칭종(稱宗)하였다. 칭조(稱祖) 반대자들은 세조의 경우에 중흥의 공으로 조를 칭한 것이 아니라, 아우가 형인 문종을 이었기 때문에 부자간의 계승 관계와 그 의미를 지닌 종을 칭할 수 없었다는 논리를 펼치면서 중종의 칭조를 차단하였다. 결국 중종의 칭종은 성종의 아들로서 왕위의 정통성을 계승한 종자(宗子)로서의 지위를 보다 중시한 종법의 원리에 근거하였다.

[변천]
임진왜란 이후 묘호 추상의 특징은 종호를 종에서 조로 고쳐 올린 사례가 많다는 사실이다. 이 같은 현상은 조·종에 대한 인식이 점차 달라져간 정치 사회적 배경에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선조(宣祖)가 죽자 대신들은 칭조를 건의하였다. 그러나 여러 논의를 거쳐 재조의 공덕이 있기는 하지만 대를 이어 수성하였으며 성대한 공렬보다는 계체(繼體)를 중시하여 선종(宣宗)으로 최종 결정되었다.

그런데 이 당시에는 조와 종의 비중을 달리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윤근수(尹根壽)는 “종이 조보다 폄하되거나 조가 종보다 가중되는 것이 아니다.”라 하고, 이항복(李恒福)도 이것이 자신의 주견이라고 한 사실에서, 조공과 종덕이 비중에 차등이 있는 것이 아니로되 점차 조를 종보다 선호하는 경향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선종은 1616년(광해군 8)에 이르러 선조로 묘호를 개칭하였다.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직후, 조정에서는 광해조 때에 올린 선조의 휘호를 깎아버리자는 의논이 있었다. 선조의 묘호 개상은 종계의 변무와 임진왜란을 극복한 중흥의 공이 그 근거였다. 그렇지만 그 배경에는 광해군과 그와 결탁한 일부 정치 세력의 이해관계가 얽혀있었다.

인조는 종사를 위기에서 구하고 윤기(倫紀)를 회복하여 안정시킨 공으로 칭조에 대해 쉽게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시’는 열(烈) 혹은 헌(憲)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좌의정 이경석(李景奭) 등이 인(仁) 자를 주장하여 이 시자로 결정되었다.

순조는 1857년(철종 8)에, 영조는 1889년(고종 26)에, 정조는 1899년(고종 36)에 각각 묘호를 종에서 조로 개상하였다. 묘호 개상의 이유는 순조와 영조가 재위 기간 동안 발생한 국기를 뒤흔들 만한 정치적 변란이나 서학(西學) 사건, 민란 등을 진압함으로써 국가의 기틀을 공고히 한 공을 명분으로 하였다. 조공종덕의 원리를 명목상의 기준으로 적용한 듯하나, 종보다 조를 높이는 관행과 함께 일부 정치 세력의 의도가 개재해 있었다.

1899년 12월에는 태조와 장종·정종·순조·익종 등 4대조에게 황제로서의 묘호와 칭호를 새로이 정해서 올릴 것을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태조는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 장종은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 정종은 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 순조는 순조숙황제(純祖肅皇帝), 익종은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로 추봉하였다. 이러한 추숭 사업은 고종의 전제권 강화와 관련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황제국으로의 격상에 따른 통치 체제 정비에 요구되는 일들이기도 하였다. 순종이 즉위한 직후에는 진종과 헌종·철종의 추봉도 단행하여 진종을 소황제(昭皇帝), 헌종을 성황제(成皇帝), 철종을 장황제(章皇帝)로 정하였다. 이로써 황제국의 7묘제에 따른 황제로서의 묘호 추봉이 완성되어 황권의 정통성이 확립되었다.

[참고문헌]
■ 신명호, 「조선시대 국왕호칭의 종류와 의미」, 『역사와 경계』 52, 2004.
■ 임민혁, 「조선시대 종법제하의 조·종과 묘호론의」, 『동서사학』 8, 2001.
■ 임민혁, 「묘호의 예제원리와 조선의 수용」, 『국사관논총』 104, 2004.
■ 임민혁, 「고·순종의 호칭에 관한 이론과 왕의 정통성 -묘호·존호·시호를 중심으로-」, 『사학연구』 78, 2005.

■ [집필자] 임민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