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내시부(內侍府)

서지사항
항목명내시부(內侍府)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이조(吏曹), 내시(內侍), 승정원(承政院)
하위어다인청(多人廳), 대장찰(大掌察), 도찰(都察), 문강(門講), 부승직(副承直), 상경(尙更), 상다(尙茶), 상문(尙門), 상선(尙膳), 상설(尙設), 상세(尙洗), 상약(尙藥), 상온(尙醞), 상원(尙苑), 상전(尙傳), 상제(尙除), 상책(尙冊), 상촉(尙燭), 상탕(尙帑), 상호(尙弧), 상훼(尙烜), 승전색(承傳色)
관련어내시사(內侍司), 봉시청(奉侍廳)
분야정치
유형집단 기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고려 후기 이후 내시의 일을 관장하기 위해 설치한 관서.

[개설]
내시부는 내시의 일을 관장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관서이다. 고려 초기 내시직은 남반(南班) 7품에 한정되어 궁중 잡직에 종사하였으며 원종 때부터 관계 진출이 허용되었다. 1356년(공민왕 5) 환관의 관직을 고쳐 내첨사(內詹事)·내상시(內常侍)·내시감(內侍監)·내승직(內承直)·내급사(內給事)·궁본승(宮本丞)·해관령(奚官令) 등을 두었다. 이후 환관직을 맡아 보는 내시부를 설치하고 관청의 격을 개성부(開城府)에 견주어 정2품 판사 등 121명을 두었다. 이러한 관제상의 변화는 고려 말 원나라 세력을 배경으로 득세한 환관에 대해 우대하면서도 견제해야 하는 정치적인 과제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그 뒤 우왕 때 내시의 권력 남용이 문제되어 내시부 자체가 폐지되었다가, 1389년(고려 공양왕 1) 대간(臺諫)의 요청으로 다시 설치되었다. 그러나 이때 내시의 직은 6품을 넘지 않도록 규정하였다.

1392년(태조 1) 문무백관의 관제를 정하면서 문무 유품 외에 별도로 내시부 관제를 설치하였다. 그 외 액정서를 설치하여 내수직(內竪職)으로 하고, 전악서(典樂署)아악서(雅樂署)에는 악공직을 두며, 모두 별도의 산관(散官) 직사의 칭호를 주었다.

내시부의 관제상 가장 관건이 되었던 것은 검교직이었다. 환관으로 처음 검교직을 받은 사람은 고려 1310년(고려 충선왕 2) 검교재신으로 봉록을 받은 이온(李溫)이었다. 하지만 검교직의 수가 많아지자 1352년 간관(諫官)들은 환관이 검교관에 제수되어 녹을 먹는 자가 심히 많다고 하면서 감원을 청하였다. 1356년 내시부가 성립되면서 121명 가운데 검교직은 101명만 주었고, 이 검교직은 상위 품계를 받았다. 이후 환관이 일반 조관(朝官)의 자급을 받는 것을 폐지하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이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정종대는 조관(朝官)의 자급을 받아서 가선대부, 혹은 검교를 받아서 가정대부에 오른 자가 50명이나 되며 조관을 겸한 자도 간혹 있었다. 1405년(태종 5)에는 예조에서 육조(六曹)의 직무 분담과 소속을 정하면서 내시부를 이조의 속아문으로 하였다. 또한 승정원에게는 내시부가 근면한지 태만한지를 살피도록 하였다. 이후 환관이 조관을 겸직하는 일은 보이지 않는다. 또한 내시부의 검교직도 꾸준히 줄여 나갔다.

1423년(세종 5) 12월에는 6품 이하에도 녹봉의 규정을 만들었다. 본래 6품 이하에는 녹봉 규정이 없었는데 녹을 받기 위하여 나이 젊은 아동들도 간혹 처음에 4품을 받게 하는 예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시부의 직급은 종2품인 가정대부에 한정하였다. 이후 내시부에만 남아 있었던 검교직을 1443년(세종 25) 7월 혁파하였다.

조선 초기에 상위직은 줄어들고 하위직은 늘어났던 내시부는 성종대 『경국대전』을 반포하면서 관직과 명칭 등이 변하고 체계가 완성되었다. 인원은 총 140명이며, 그중 체아직이 59명이었다.

성종 이후 내시부 전체 인원은 연산군대에 161명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체아직도 59명에서 일시적으로 43명이 더 늘어났다가 중종반정 이후 다시 환원되었다. 조선후기 내시부의 인원과 직제는 변동 없이 유지되어 인조대에도 환관의 수가 160여 명이었다. 그러나 『성호사설』에서는 “지금 환관이 335명이고, 궁녀가 684명이다.”라고 하였으며, 효종 때에도 “지금 이 내시부의 장부에는 장번 36명, 출입번이 168명, 전함(前銜) 41명, 소환(少宦) 55명, 재상(在喪) 33명으로서, 합하여 3백 33명입니다.”라고 하였다. 즉, 보통 인원은 300~400명 정도쯤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공민왕대 내시부가 하나의 관부로 정립된 것은 환관들이 명령 출납 등 궁중의 임무를 맡게 되면서 관직이 분화되고, 이를 좀 더 체계화하였기 때문이다. 공민왕대 원나라가 간섭하던 시기에는 ‘필도적(必闍赤), 혹 비칙치’ 등 왕의 측근 기구가 ‘내상(內相)’이나 ‘내재추(內宰樞)’ 등으로 불리면서 왕의 측근 기구로 여전히 남아 있었다. 당시 왕의 측근 기구는 내첨사(內詹事)·내상시(內常侍)·내시감(內侍監)·내승직(內承直)·내급사(內給事)·궁방승(宮本丞)·해관령(奚官令) 등 7종으로 분화되어 있었는데 이것이 나중에 내시부로 통합되었다. 즉, 내시부의 성립은 측근 기구의 정착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해야 하며, 원의 간섭 속에서도 측근 기구를 강화한 것은 왕권을 강화하려는 노력과 관련 있다고 할 수 있다. 원 간섭기 이후 환관들의 역할은 단순한 궁중 내 심부름에서 왕명 출납, 청소, 문을 지키는 것 등으로 늘어났다.

조선시대의 내시부는 고려의 제도를 본받은 것이었지만, 내시의 폐해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철저히 통제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1469년(성종 1) 내시부직이 4품을 넘지 않도록 제한한 것이 좋은 예이다. 이후 조선 전 시기를 통해 내시에 대한 규제론은 끊이지 않았으며 실제로도 내시 세력은 미약하였다.

[조직 및 역할]
내시부의 조직은 『경국대전』「내시부」조에 의하면 정원은 140명이고 관직과 이속으로 서원 2명과 사령 1명이 있었다. 역할을 보면, 상선(尙膳)은 왕의 수라를 책임진다. 왕의 수라간을 지휘하는 한편 내시부사로서 내시부 전체를 관할한다. 상온(尙醞)상다(尙茶)는 궁궐에서 사용하는 술과 차를 맡은 관원이며, 상약(尙藥)은 약을 담당하고, 상전(尙傳)은 왕의 명령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다. 상책(尙冊)은 매를 기르는 응방, 대전(大殿), 주방이나 연회장, 중궁전의 승전색으로 근무하였다. 상호(尙弧)는 대전 응방이나 궁방(활), 왕비전의 주방, 문소전 설리, 세자궁 장번 내시 등을 관리하였고, 상탕(尙帑)은 대전의 창고, 등촉방 다인, 세자궁 설리를 관리하였다. 상세(尙洗)는 대전에서 사용하는 그릇, 화약방과 왕비전 등촉방, 문소전의 진지(進止), 세자궁 주방, 빈궁의 설리 등을 관리하였다. 상촉(尙燭)은 대전과 왕비전 등의 문을 지키고, 세자궁의 등촉방을 관리하며, 왕비전의 주연(酒宴) 등 잡일을 주관하였다. 상훼(尙烜)는 세자궁의 문차비나 각 궁의 설리·문차비 등을 맡고, 상설(尙設)은 궁궐 내 각종 건축물의 보수나 증축을 담당하였다. 이하 상제(尙除), 상문(尙門), 상경(尙更), 상원(尙苑) 등은 궁궐 내부의 공원 관리와 문차비의 명령을 받아 문을 지키는 등 잡다한 일과 노비를 부리는 일을 담당하였다.

4품 이하는 문·무관의 근무 일수에 따라 품계를 올려 받았으나, 3품 이상은 품계를 올려 받을 때 왕의 특지가 있어야 했다.

내시부는 고려 전기에는 단순히 궁중의 잡무에만 종사하였다. 그러나 원 간섭기를 지나면서 원나라 황제의 총애를 배경으로 군(君)으로 임명 받거나 조정에서 현직으로 벼슬살이하는 경향이 많아졌다. 그러면서 하는 일도 궁중 잡무에서 출납이나 왕실의 개인 재정을 담당하는 데까지 확대되었다. 조선시대 『경국대전』「이전」「내시부」조에서는 환관의 임무에 대해 “궐내의 감선(監膳), 전명(傳命), 수문(守門), 소제(掃除)의 임무를 맡는다.” 하였다. 즉, 환관은 궁중 내에서 가장 하찮은 잡무부터 왕명 출납까지 다양한 임무를 맡았다.

[변천]
개항기 이후 내시부는 크게 변하였다. 1884년 일어난 갑신정변에서 폐정 개혁안이 상정되면서 내시부의 혁파를 주장하였다. 1894년(고종 31) 군국기무처에서 제의한 안건으로 궁내부·종정부·종백부 관제와 궁내부 총제(總制)를 올리면서 내시부는 내시사(內侍司)로 바뀌었다. 직제에서 지사 1명은 내시 중에서 품계가 높은 사람으로 임명하고, 상선 이하 교대 없는 수궁과 각 차비관에 이르기까지는 필요와 때에 따라 인원을 늘리거나 줄였다. 그러나 2차 김홍집·박영효 내각에서는 왕권을 약화시키는 방편으로 내각의 기능을 강화하면서 왕명 출납 기구인 승선원을 폐지하는 등 일대 변화를 가져왔다. 그와 함께 내시사는 폐지되고 시종원에 ‘봉시’라는 직책으로 남았다. 내시사는 없어졌지만 1908년 완전 해체될 때까지 봉시청이라 하여 독립적인 부서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 내시부라 자처하였다. 또한 각종 임무 면에서도 변화가 없었으며, 봉시라는 명칭 이외의 기존의 명칭들은 그대로 존재했다.

을사보호조약의 체결과 통감 정치 과정에서 궁중 내의 폐습을 모조리 없앤다는 명목으로 일제는 궁중의 출입을 통제하고 궁중 내의 관리들을 대거 출궁시키거나 퇴거시켰다. 이 과정에서 내시와 함께 궁녀들도 출궁되었다. 고종과 순종을 보필하는 일부의 내시와 궁녀만 궁에 남고, 대부분 퇴출되면서 내시 제도는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박영규, 『환관과 궁녀』, 김영사, 2004.
■ 장희흥, 『조선시대 정치권력과 환관』, 경인문화사, 2006.
■ 김동수, 「조선초기의 검교직」, 『진단학보』51, 1981.
■ 박한남, 「고려내시에 관한 연구」,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3.
■ 이우철, 「고려시대의 환관에 대하여」, 『사학연구』1, 1958.
■ 三田村泰助, 『宦官: 側近政治の構造』, 中央公論社, 1992.

■ [집필자] 장희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