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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직(兼職)

서지사항
항목명겸직(兼職)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관직일반(官職一般)
하위어겸대(兼臺), 겸도승지(兼都承旨), 겸춘추(兼春秋), 경적사(耕籍使), 내승(內乘), 외춘추(外春秋)
동의어겸관(兼官), 겸대(兼帶), 겸임(兼任), 겸장(兼掌), 겸차(兼差), 겸함(兼銜), 관섭(管攝)
관련어본직(本職), 실관(實官), 원직(原職)
분야정치
유형법제 정책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정부의 여러 관직 중 고유의 직무를 수행하는 담당자를 임명하지 않고 다른 관직자가 그 직무를 겸임하여 수행하게 하던 관직 제도.

[개설]
겸직(兼職)은 1인의 관원에게 복수의 관직을 겸임하게 함으로써 발생한다. 겸임하는 관직을 겸함(兼銜) 혹은 겸관(兼官)이라고도 하며, 본래의 고유 직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정식으로 직제화되어 있던 관직은 실관(實官) 또는 실직(實職)이라고 하였다. 또 겸직자의 본래 관직 혹은 주된 관직을 본직(本職)이라 하였다.

겸직에는 여기에 임명할 특정 관직자의 본직을 명시적으로 지정해놓은 당연직 겸직이 있고, 본직을 명시하지 않고 임의의 관원들 중에서 겸직하게 하는 불특정 겸직도 있었다. 어느 경우든 이들 겸직에는 그 몫으로 별도의 녹봉이나 직전(職田)과 같은 보수가 지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 겸직에 대한 수당의 지급이나 수행 인원의 지원과 같은 대우가 주어지는 때도 있었다.

겸직은 직제만 있고 전담 관원이 없는 가공적 관직의 성격이 많으며, 정식으로 직제화된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는 필요에 따라 임시로 설치하였다가 폐지하는 경우가 많아 불완전한 관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때로는 겸직이 실직 못지않게 중요한 기능을 가진 경우도 많았는데, 대제학·판의금부사·도총관·오위장·금위대장·경연관·지제교 등의 겸직이 그러한 경우이다. 관제의 운영 면에서 보면, 겸직은 적어도 중추부(中樞府) 등의 직제만 있고 직사(職事)가 없는 한직이나 대우직보다는 더 중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겸직은 일정한 필요성 때문에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우리 역사에서 겸직 제도가 명시적으로 처음 보이는 것은 516년(신라 법흥왕 3)에 신라에 병부(兵部)가 처음 설치되면서 그 장관인 병부령(兵府令)이 재상(宰相)과 내성(內省)의 사신(私臣)을 겸임하게 한 것이었다. 또 집사성(執事省)의 전신이었던 품주(稟主)가 창부(倉部)의 일을 겸하게 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또 사원성전(寺院成典)이나 수성부(修城府)의 장관 및 직학사(直學士)·학사 등의 문한직도 겸관인 경우가 많았는데, 병부 시랑 등의 요직에서 이를 겸임하였다.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명확한 기록이 없지만, 두 나라에서도 행정이 상당히 발전하였으므로 겸직의 관행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시대에는 당나라와 송나라 제도의 영향으로 겸직제가 폭넓게 시행되어 많은 겸관이 직제화되었다. 예를 들면 삼사(三司)·육부(六部), 한림원의 판사(判事), 지부사(知部事) 등은 모두 재신(宰臣)이 겸하게 했고, 감수국사(監修國史)는 문하시중이 당연직으로 겸하였다. 또 여러 관(館)·전(殿)의 학사, 통례문·전의사·내부시 등의 장관 및 국자감의 관직은 모두 다른 관원들이 겸직하게 하였다. 이 밖에도 많은 비상설 관서에 겸관이 지정되어 있었고, 후기에는 더욱 많은 겸관들이 설치·운용되었다.

조선 건국 초기에는 고려말의 관제를 답습하여 많은 겸관을 두었는데,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대부분의 관직 및 사헌부의 겸중승(兼中丞)·감찰(監察), 통례문의 겸판사(兼判事)·겸인진사(兼引進事), 관상감·선공감 등의 겸승(兼丞)·겸주부(兼主簿), 성균관의 지사·동지사·겸박사·겸학정(兼學正)·겸학록(兼學錄)·겸학유(兼學諭) 등이 그것이다. 겸관의 직명에는 ‘겸(兼)’ 자를 붙이는 경우도 있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겸직 제도는 정부의 행정적 편의, 권력의 집중, 인재의 다방면 활용 및 인건비 예산 절감 등을 위해 역대의 왕조에서 고안되고 운영되었다. 이는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사회가 발전하고 행정 업무가 증가할수록 확대 시행되기 마련이었다.

[내용]
겸직을 비롯한 조선시대 관제의 설치와 개편 및 폐지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그때그때 수록되어 있고, 세조~성종 때 『경국대전(經國大典)』이 편찬되면서 영구적으로 제도화하게 되었다. 조선후기에 편찬된 『속대전(續大典)』과 『대전통편(大典通編)』 및 『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시기별로 변천된 관제의 모습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을 일괄적으로 정리한 것이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직관고(職官考)」라고 할 수 있다.

『경국대전』에 정식으로 직제화된 겸직을 정리해보면, 조선초기에는 동반(東班) 경직(京職)의 겸직은 21개 관서에 190여 직, 서반(西班) 경직의 겸직은 5개 관서에 34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들 중에서 경연·춘추관·종학(宗學)·양현고·사학(四學)에서는 모든 관직이 겸직으로 되어있다. 또 특정 관직에서 겸하도록 규정한 당연직 겸관은 44개 직이며, 그 나머지는 임의의 관원 중에서 선임하게 하였다. 직제표에는 올라 있지 않으나 당하관 아문에 설치되었던 도제조·제조·부제조 등도 겸관의 일종으로서 총 43개 관서에 82원이 설치되어 있었다.

동반 경직에서 주목되는 것은 영사(領事)·판사·지사·동지사·대제학·제학, 세자사(世子師)·세자부(世子傅)·세자부빈객(世子副賓客), 도제조·제조·부제조 등의 고위직 120여 직이 십수 명의 의정·판서·승지 등에 의해 겸직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영의정은 당연직으로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의 영사와 세자사를 겸직하였으며, 도승지는 경연 참찬관, 예문관 직제학, 춘추관 수찬관, 상서원 정을 당연직으로 겸하였다.

또한 병조 판서는 조선후기에 비변사 제조와 오군영의 제조 및 금위대장을 겸직하여 군권(軍權)을 장악하도록 하였다. 이는 조선 관료제 사회의 권력 집중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며, 예산 절감책의 하나로 보이기도 한다. 그 밖의 많은 겸관도 육조·승정원·홍문관·성균관 등 핵심 부서의 관원들에 의해 겸직되고 있었다. 특히 일부 직종은 특정 관서에서 독점적으로 겸직하였는데, 경연과 지제교(知製敎)는 홍문관에서 전담하였고, 종학·사학·양현고 등 교육 관계 기관은 성균관 관원들이 전담하였다.

춘추관은 모든 관직이 다른 부서 관원들의 겸직으로 운영되었는데, 특히 승정원, 홍문관, 예문관의 관원들은 전원 춘추관의 사관을 겸하였다. 그중에서도 예문관의 봉교·대교·검열 8원은 전임 사관으로 불렸는데, 이는 실상 그들의 본직보다 더 중요한 직책이었다.

『경국대전』에 나타난 서반 경직 겸관은 전체 관직 3,328직 중에서 34직으로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법제상 실직으로 간주되는 오위(五衛)의 각급 관직 3,248직 중 약 3,000여 직은 각종 중인직·잡직 및 여러 군영의 갑사와 특수 병종의 체아직이었으므로 오위의 순수 무관 지휘관은 250여 직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3,000여 직의 서반 체아직은 오위가 아닌 다른 부서에서 근무하는 인원들로서 직명만 오위에 달아놓고 있었으므로 이들도 사실상 겸직이나 다를 바 없었다고 하겠다. 오위 및 오위도총부와 훈련원 등 서반의 고위 관직도 대부분 겸관이었고, 대부분 문관들이 겸직하는 수가 많았다. 여기서 우리는 조선시대 군사 지휘권의 전문성 결여와 방위력의 약점을 볼 수 있다.

동반 외직 겸직은 3개 도 6직에 불과하였는데, 이는 지방관의 역할을 중시한 까닭이라고 할 수 있다. 겸직 6직은 주로 관찰사나 병사가 겸하는 소재지의 수령직이었다. 다만 수령 교체 시의 공백 기간에는 인근 고을의 수령이 잠시 겸직하게 하였는데, 이를 겸관이라고 칭하였다.

서반 외직 겸직은 모두 413직이나 되었는데 이는 수령이 겸하는 지방의 각급 부대 지휘관 및 막료들의 자리였다. 이는 전체 외직 521직의 80%를 차지한다. 이를 육군[兵馬]과 수군으로 나누어보면, 육군의 겸직은 399직으로서 이는 육군 외직 432직의 90%에 해당한다. 반면 수군 겸직은 14직으로 이는 전체 수군 외직 89직의 16%에 지나지 않는다. 육군 지휘관의 대부분이 수령들이 겸하는 겸직이었는데 비하여 수군 지휘관은 대부분 전임 무관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각도의 병마절도사·수군절도사 1직은 으레 관찰사가 겸하였고, 영안도(永安道: 현 함경도)와 평안도의 수군절도사 1~2명은 병마절도사가 겸하였으며, 영안·평안도의 병마첨절제사와 경상도의 수군첨절제사는 경관(京官)이 겸임하게 하였다. 그 나머지는 모두 각급 수령이 겸하는 것이었다. 조선시대의 지방관은 문·무 겸직으로서 문·무관이 모두 임용될 수 있었으나, 직제 기준상 실관은 동반직이었고 서반직은 겸관으로 수반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지방군에서의 실관 즉 각급 전임 지휘관은 모두 120여 원에 지나지 않아, 방위력의 약점이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변천]
『경국대전』의 겸직 체제는 조선후기까지 근간이 유지되었으나, 16세기 초부터 약간의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17세기부터는 상당한 변모를 보이는데, 특히 서반직에서 그러하였다. 우선 조선초기에는 있었으나 『경국대전』에는 보이지 않던 ‘겸’ 자를 붙인 관직명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이들은 『속대전』에서 직제화되었다. 세자시강원의 겸보덕·겸필선·겸문학·겸사서·겸설서, 규장각의 겸교리·겸검서관, 통례원의 겸인의, 중인 기술관 계통의 산학겸교수·율학겸교수·천문학겸교수·지리학겸교수 및 군영 아문의 겸파총(兼把摠)·겸영장(兼營將) 등이 그것이다.

또 조선후기에는 소수의 실관을 겸관으로도 임용할 수 있게 하였는데, 그것은 성균관의 좨주(祭酒)·사업(司業), 세자시강원의 찬선(贊善)·진선(進善), 세손강서원의 유선(諭善)·권독(勸讀) 등 이른바 학식과 덕망으로 천거된 인물인 산림(山林) 전문직과 성균관의 대사성, 홍문관의 부제학·전한(典翰), 규장각의 직각(直閣)·대교(待敎) 등으로서 이는 인재의 다방면 활용을 위한 조치로 생각된다.

조선후기 동반 외직 겸관은 12원으로 늘어났는데 그것은 대부분 각도 관찰사가 거주하는 고을의 수령직을 겸한 것이었다. 즉 공주·대구·전주·해주·원주·함흥·평양의 부윤·부사 등은 관찰사의 겸관이었고, 교동·옹진·경성·북청·영변의 수령직도 병사나 수사의 겸관이었다. 서반 경직 겸관에서의 변화로는, 초기에 직제표에서 제외되었던 도제조·제조 등의 겸관직이 비변사·선혜청·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 등에서 정규직으로 법제화된 점이 주목된다. 이는 일부 대신들의 병권 장악을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정치와 군사의 밀착을 보여준다. 또 인조 때 신설된 호위청의 대장은 공신·국구(國舅) 등 훈척 대신의 겸직으로서 이들의 비중을 보여준다.

조선후기 서반 겸직은 오군영의 설치로 1,500여 원이 증치되었는데 그중 150여 원은 경기도 일대 수령들의 겸직이었다. 즉 총융청·수어청 등의 예하 지휘관으로 인근 지역의 수령들이 편입된 것이었다. 또 금위영과 어영청의 겸파총에는 전국 각지의 수령들이 겸관으로 임명되었다. 지방의 진영장(鎭營將)은 인조 때 실관으로 설치된 것이었으나, 나중에는 대부분 겸관화하여 수령들이 겸직하게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후기의 군비 강화는 그다지 철저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의의]
조선시대의 각종 법전에 나타난 겸직 제도가 실제로는 훨씬 다양하고 광범위하게 시행되고 있었다. 겸직이란 당초에는 대부분 편의적으로 설치된 임시 관직이었지만, 필요에 따라 정규직으로 직제화된 것이 많았고, 다양하게 운영되었다. 또 법전에 규정된 대부분의 정규 관직[實官]도 수시로 겸직으로 임용되는 경우가 있었다. 의정들이 이조 판서나 병조 판서를 겸임하는 따위였다. 겸관의 활용은 행정 업무의 능률, 일부 고위 관직의 권력 집중, 국가 예산의 절약, 유능한 인재의 활용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으므로, 정권의 동향이나 인물의 역량에 따라 얼마든지 변용이 가능한 일이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변태섭, 『고려 정치제도사 연구』, 일조각, 1971.
■ 이성무, 『조선초기양반연구』, 일조각, 1980.
■ 신형식, 「신라병부령고」, 『역사학보』 61,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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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무, 「선초의 성균관연구」, 『역사학보』 35·36합집, 1967.
■ 이영춘, 「조선시대의 겸직제도」, 『청계사학』4,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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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필자] 이영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