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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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환국(己巳換局)

서지사항
항목명기사환국(己巳換局)
용어구분전문주석
관련어서인(西人), 남인(南人), 인현왕후(仁顯王后), 소의장씨(昭儀張氏)
분야정치
유형사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1689년(숙종 15)에 원자 정호와 폐비 사건으로 인해 공신·외척·서인을 물리치고 남인을 재기용한 사건.

[개설]
원자가 태어나자 그동안 왕권의 안정성을 공신과 외척에 의지했던 숙종은 독자적인 왕권 강화의 토대를 갖추게 되었다. 숙종은 원자 정호(定號) 문제와 인현왕후 폐비(廢妃) 문제를 제기하여 조정을 일신하고 원자에게 위협적인 당파·공신·외척·궁중 세력을 일시에 제거했다. 또한 이 사건을 통해 정국의 논쟁은 인현왕후 의리론과 동궁 보호론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발단]
1688년(숙종 14) 10월 28일에 소의장씨(昭儀張氏)가 왕자 이윤(李昀)을 낳았다. 오랫동안 아들을 얻지 못했던 숙종은 바로 다음 해 1689년 1월 10일에 원자(元子)로 정호하는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대해 영의정 김수흥(金壽興) 등은 잇따라 원자 정호의 연기를 주장했지만 숙종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한편 1월 15일에 유위한(柳緯漢)은 원자 정호에 반대한 김수흥 등을 극력 비판하고, 권대운(權大運) 등의 석방을 요청하기도 했다. 마침내 숙종은 왕자를 원자로 정호하고, 소의장씨를 희빈(禧嬪)으로 높였다[『숙종실록』 15년 1월 15일].

[경과]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은 1689년 2월에 이르러서야 뒤늦게 송나라 철종(哲宗)의 사례를 들어 원자 정호의 연기를 요청했다. 그러자 숙종은 이미 군신 간의 분의(分義)가 정해졌는데도 뒤늦게 불만을 표시한 송시열의 행위에 대해 그 일파의 조직적인 반항으로 간주하여 송시열을 삭탈관작(削奪官爵)했다[『숙종실록』 15년 2월 1일].

또한 언어가 불손하다는 죄목으로 영의정 김수흥은 파직되었고, 김수항도 풍파를 조장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삼사(三司)에서는 송시열의 효종에 대한 폄강(貶降), 원자 정호 반대 등을 역심(逆心)으로 거론하며 송시열에 대한 처벌을 주장했다. 민암(閔黯)·권대재(權大載)도 계속해서 송시열의 처벌을 요청했다. 결국 김수항은 진도에서, 송시열은 정읍(井邑)에서 사사(賜死)되었다[『숙종실록』 15년 6월 3일].

숙종은 "윤증을 처음과 같이 대우하지 말라."했던 이전의 지시를 환수하고, 권대운·목내선(睦來善)·김덕원(金德遠)을 각각 삼정승으로, 목창명(睦昌明)을 승지로 임명하는 등 남인을 대거 등용했다. 그리고 윤휴(尹鑴)·유혁연(柳赫然)·허목(許穆) 등 남인에 대한 명예 회복과 조지겸(趙持謙)·한태동(韓泰東) 등 소론에 대한 포상이 진행되었다. 반면에 보사공신(保社功臣), 임술삼고변(壬戌三告變) 관련자와 김만중(金萬重) 등을 신문하고 처벌했다. 더불어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文廟)에서 출향(黜享)시키고 3월 18일에 위패(位牌)를 묻어 기사환국을 일단락 지었다[『숙종실록』 15년 3월 18일].

그런데 4월 21일에 숙종은 갑자기 인현왕후의 폐출 문제를 거론했고, 또한 장씨(張氏)가 숙원(淑媛)이 되었을 때, 인현왕후가 투기(妬忌)한 사실을 공개했다[『숙종실록』 15년 4월 21일]. 그리고 귀인김씨(貴人金氏)가 김수항, 숙안공주(淑安公主)의 아들 홍치상(洪致祥)과 결탁해 왕의 동정을 엿보고 유언비어를 유포한 것으로 간주했다. 홍치상이 장렬왕후(莊烈王后)에게 문안 편지를 보냈는데 그 속에 "조사석(趙師錫)은 장씨 친정의 청탁으로 정승이 되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조사석이 장씨의 외가와 친밀했고, 장씨가 숙원으로 승격된 다음해에 우의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이사명은 홍치상과 결탁해 조사석과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을 감시했다. 이를 통해 조사석과 동평군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사실을 알아차린 이사명은 숙종의 밀지(密旨)를 얻어 내려는 계획으로 장희재(張希載)와 결탁하기도 했다.

숙종이 4월 23일에 인현왕후를 폐출(廢黜)시키는 전교를 내리자 대신들은 백관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했으나 숙종의 폐출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4월 25일에 오두인(吳斗寅)·박태보(朴泰輔)·이세화 등 86명이 상소를 올려 인현왕후 폐출을 강력히 비판하자 숙종은 친국(親鞫)을 밤새도록 진행했다. 이때 박태보는 모진 형벌을 당하다가 귀양길에 사망했고 오두인은 극변(極邊)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5월 2일 인현왕후는 폐서인(廢庶人)되어 안국방(安國坊)에 있는 친정으로 보내고, 5월 13일 희빈장씨를 왕비(王妃)로 삼아 고묘(告廟)함으로써 기사환국은 마무리되었다.

[참고문헌]
■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이은순, 『조선 후기 당쟁사 연구』, 일조각, 1988.
■ 이태진, 『조선 후기의 정치와 군영제 변천』, 한국연구원, 1985.
■ 이희환, 『조선 후기 당쟁 연구』, 국학자료원, 1995.
■ 정석종, 『조선 후기 사회 변동 연구』, 일조각, 1983.
■ 박광용, 「숙종대 기사환국에 대한 검토: 당론서 기록에 대한 비교 분석을 중심으로」, 『동양학』29,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