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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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和平)

서지사항
항목명화평(和平)
용어구분연호사전
분야연호
유형연호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중국(中國) 북위(北魏)의 문성제(文成帝) 대에 사용한 연호(460년~465년: 문성제9~문성제14).

그 외에

중국 후한(後漢)의 환제(桓帝) 대에 사용한 연호(150년: 환제5).

중국 전량(前涼)의 장조(張祚) 대에 사용한 연호(354년~355년: 장조1~장조2).

[개설]
중국 역사에서 화평(和平) 연호는 3번 사용되었다. 우선 중국 북위의 제 4대 황제인 문성제가 사용한 4개의 연호 가운데 마지막 연호를 들 수 있다(460년~465년). 이때의 화평 연호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도 등장하는데, 『태종실록(太宗實錄)』 태종 15년(1415년) 6월 16일자 기사가 그것이다. 기우제를 실시하기 위하여 예전에 행해진 기우제들을 살펴보던 가운데, 화평 연간의 기우제도 검토하면서 화평 연호가 등장한다.

한편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지 않는 다른 두 개의 화평 연호 가운데 하나는 중국 후한의 환제가 사용한 7개의 연호 가운데 2번째 연호이다(150년). 아울러 나머지 하나는 중국 전량의 위왕(威王) 장조의 연호이자, 전량의 유일한 독자 연호이기도 한 화평 연호이다(354년~355년). 원래 전량은 301년부터 서진(西晉)의 연호를 사용하였는데, 317년에 서진이 멸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서진의 마지막 연호인 ‘건흥(建興)’을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354년 왕위에 오른 장조가 ‘화평’으로 개원하였으나, 355년 그를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장현정(張玄靚)이 다시 ‘건흥’을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결국 전량의 독자 연호였던 화평은 354년부터 355년 9월까지 사용되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 『태종실록(太宗實錄)』
■ 이현종 편, 『동양연표(東洋年表)』, 탐구당, 1986.

■ [집필자] 김가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