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정의]
중국(中國) 명(明)나라의 영종(英宗) 대에 사용한 연호로(1457년~1464년: 영종1~영종8), 조선(朝鮮)에서는 세조(世祖)가 사용한 연호.
중국 원(元)나라 문종(文宗) 대에 사용한 연호(1328년: 문종1).
[개설]
중국 명나라의 제 8대 황제인 영종의 연호이다(1457년~1464년).
제 6대 황제인 영종과 동인 인물로, 흔히 각각의 연호를 따서 제 6대를 정통제(正統帝)로, 제 8대를 천순제(天順帝)로 구분한다. 영종이 제 6대 황제로 재위하던 때에 명나라는 민란과 몽골계 부족인 오이라트족의 침입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오이라트족은 무역을 확장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명과 교섭하였으나 그 협상들이 결렬되자 명나라 변방에 침입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영종은 이들을 물리치기 위하여 직접 전투에 참가하였다가 오히려 포로가 되고 말았는데, 이 사건이 바로 <토목(土木)의 변(變)>으로써, 중국 역사상 황제가 포로로 잡힌 첫 번째 사건이다.
이에 황제의 자리를 공석으로 둘 수 없어, 영종의 동생인 경제가 황위에 올랐다. 이어 영종은 곧 풀려났으나, 경제는 영종을 태상황제(太上皇帝)의 지위에 올린 후 남궁에 유폐하였고, 영종은 황위를 되찾기 위하여 여러 노력을 기울였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러다가 경제가 병에 걸린 틈을 타서 영종은 경제를 폐위시키고 다시 황위에 올랐으며, 이를 가리켜 <탈문(奪門)의 변(變)>이라 한다. 이렇게 제 8대 황제가 된 영종은 연호를 천순으로 개원하였던 것이다.
한편 조선에서는 세조3년부터 세조10년까지 이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는 『세조실록(世祖實錄)』 세조3년(1457년) 2월 25일자 기사에 처음으로 천순 연호가 등장한다. 이후 독자 연호를 사용하지 않은 조선의 특성상 천순 연호로 연대(年代)를 표기하였다.
이 외에 중국 원나라 황제인 문종 또한 천순 연호를 사용하였으나(1328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이때의 천순 연호는 등장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