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이무렵 한족(漢族)은 몽골족으로부터 민족적 차별과 재정적 압박을 받으면서 점차 불만이 더해가고 있었는데, 지정11년인 1351년 범람을 일으킨 황허(黃河)강의 수리를 위하여 백성들을 대규모로 징발하면서 백성들의 불만은 극에 달하였다. 이때 백련교(白蓮敎)와 미륵교(彌勒敎) 신자들을 중심으로 반란이 발생하였고, 이들이 붉은 두건을 쓰고 있었다고 하여 ‘홍건적(紅巾賊)’이라 하였다. 이들의 반란을 시작으로 중국 각지에서 반란이 발생하며 홍건적의 규모는 확대되었으나, 내부 분열로 인하여 결국에는 원군(元軍)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면서 이들은 퇴로를 한반도로 잡았고, 1359년(공민왕8)에는 고려(高麗)를 침범하여 서경(西京)을 함락하였으나 편장(偏將) 이방실(李芳實) 등이 이끄는 고려군의 반격을 받고 퇴각하였다. 이어 1361년(공민왕10)에 홍건적은 또 다시 고려를 침범하여 개경(開京)을 빼앗았고, 한동안 고려는 개경을 수복하지 못하다가 1362년 1월 이방실과 이성계(李成桂) 등의 활약으로 개경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한편 고려에서는 충혜왕(忠惠王) 두 번째 즉위 2년(충혜왕복위2)부터 공민왕(恭愍王)5년까지 지정(至正) 연호를 사용하였다. 원나라 배척 운동을 전개하였던 공민왕은 1356년(공민왕5)에 원나라의 연호 사용을 폐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朝鮮)에서는 계속하여 이 시기를 지정 연호로 표기하였으며,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외에 지정 연간에 원나라에서 만든 법규 『지정조격(至正條格)』의 서명에도 지정 연호가 포함되어 있어서, 『지정조격』을 언급하는 『조선왕조실록』 기사에서도 자연스럽게 지정 연호가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