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정의]
중국(中國) 명(明)나라 영종(英宗) 대에 사용한 연호로(1436년~1449년), 조선(朝鮮)에서는 세종(世宗)이 사용한 연호.
[개설]
중국 명나라의 제 6대 황제인 영종 대에 사용한 연호로(1436년~1449년), 영종은 정통(正統) 연호를 본 따 정통제(正統帝) 혹은 정통 황제(正統皇帝)로 불린다.
이 기간 동안 영종은 국내 · 외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국내적으로는 끊임없이 민란이 발생하였고, 국외적으로는 몽골 제국을 통일한 몽골계의 오이라트족의 침입을 받는 상황이었다. 무역의 확장을 위해 명과 교섭하기를 원하였던 오이라트족은 여러 차례 협상이 결렬되자 족장 에센을 중심으로 명나라 변방에 침입하였던 것이다. 영종은 이들을 물리치기 위하여 직접 전투에 참가하였다가 오히려 포로가 되고 말았는데, 이 사건이 바로 <토목의 변>으로써, 중국 역사상 황제가 포로로 잡힌 첫 번째 사건이다.
이에 황제의 자리를 공석으로 둘 수 없어, 영종의 동생인 경제가 황위에 오르고 연호를 경태로 개원하였던 것이다. 이어 영종은 곧 풀려났으나, 경제는 영종을 태상황제(太上皇帝)의 지위에 올린 후 남궁에 유폐하였고, 영종은 황위를 되찾기 위하여 여러 노력을 기울였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러다가 경제가 병에 걸린 틈을 타서 영종은 경제를 폐위시키고 다시 황위에 올랐으며, 이를 가리켜 <탈문(奪門)의 변(變)>이라 한다. 이렇게 하여 영종은 제 8대 황제가 되었으며, 이어 천순(天順)으로 개원하였다. 그리고 제 6대 시대와 구분하기 위하여 이때의 영종은 ‘천순제(天順帝)’ 혹은 ‘천순 황제(天順皇帝)’라고 불린다.
한편 정통 연간은 조선의 세종18년부터 세종31년까지에 해당한다. 그런데 조선은 독자적인 연호 대신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였던 까닭에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도 연대(年代)를 표기하는 목적으로 이 연호가 주로 등장한다. 이 외에도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토목의 변>과 관련된 기사들이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으며, 정통고사(正統故事)로 지칭되는 내용도 바로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