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중국 송나라의 제 7대 황제인 철종이 사용한 3개의 연호 가운데 마지막 연호이다(1098년~1100년).
이 시기는 나라를 뒤흔들 만큼 당쟁(黨爭)이 매우 극심하였던 시기로, 이를 알기 위해서는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둘러싼 대립에 대하여 알 필요가 있다. 왕안석의 신법은 신종(神宗)이 황위에 있던 희녕(熙寧)3년, 즉 1609년부터 왕안석을 중심으로 추진된 일련의 개혁들을 일컫는다. 신법의 실시로 송나라는 국가 재정 확보와 행정 효율성 증대 등의 성과를 얻었으나, 신법으로 이익이 줄어든 대지주와 대상인들의 반발이라는 반대급부 또한 얻었다. 그러다가 1085년 신종이 사망하면서 10세의 철종(哲宗)이 황위에 올랐고, 이에 신종의 어머니인 선인태후(宣仁太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통하여 정권을 확보하였다. 다음 해인 1086년 곧 원우(元祐)1년, 선인태후는 사마광(司馬光)을 비롯한 구법당(舊法黨) 세력을 등용하였고, 이들은 원우 연간 동안 정권을 유지하면서 신법을 차례대로 폐지하였다. 그러나 1093년 선인태후가 사망하고 철종이 친정(親政)을 하면서, 상황은 또 한 번 바뀌었다. 철종이 다시 신법을 실시하였던 것인데, 이 시기가 바로 소성(紹聖)과 원부(元符) 연간이다. 그렇지만 구법당과 신법당의 대립은 이미 격화될 만큼 격화되어 추스르기 어려울 지경이었으므로 신법 실시는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100년(원부3) 철종이 사망한 이후 휘종과 흠종(欽宗)이 차례로 황위에 올랐으나, 채경(蔡京)을 중심으로 하는 신법파와 구법파의 대치는 전혀 해결되지 못한 채, 송나라의 정치는 계속 불안정하였고, 결국 송나라는 멸망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철종 연간에 발생한 당쟁은 나라를 쇠퇴의 길로 가게 한 원인으로 인식되었다.
한편 조선(朝鮮)은 왕안석의 신법과 신법파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인식하였다. 이는 왕안석이 유학(儒學)의 실용적 해설 및 응용을 강조하고, 또한 경전에 대한 독창적 해석을 실시하면서 유교 전통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였던 탓이 크다. 그러한 가운데 성리학에서 구법당의 사상을 정론(正論)으로 받아들이면서 왕안석의 신법이 배척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는 주로 당쟁이 격심해지거나, 다른 신하들을 탄핵하는 경우에 소성과 원부 연간의 당쟁을 인용하여 비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간혹 훌륭한 인재가 출현한 시기였다고 서술하는 기사도 있지만, 이것은 난세(亂世)임에도 불구하고 인재가 있었다는 표현으로 파악하여야 한다. 정리하자면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원부 연간을 부정적으로 보았는데, 원부 연간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이 결국에는 송나라를 멸망시켰다고 인식하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