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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471년(성종 2)에 신숙주(申叔舟)가 일본의 지세(地勢)와 국정(國情), 교빙내왕(交聘來往)의 연혁, 사신관대예접(使臣館待禮接)의 절목(節目)을 기록한 책.
[개설]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는 1471년(성종 2)에 신숙주(申叔舟)가 일본의 지세(地勢)와 국정(國情), 교빙내왕(交聘來往)의 연혁, 사신관대예접(使臣館待禮接)의 절목(節目)을 기록한 책이다. 신숙주는 1417년생으로 자는 범옹(泛翁), 호는 희현당(希賢堂)ㆍ보한재(保閑齋)이며, 경상도 고령현 사람이다. 그는 경사에 두루 통달하고. 시문에 능했으며, 문집으로 『보한재집(保閑齋集)』이 있다. 성운학(聲韻學)에 조예가 깊었고, 세종 때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 참여하여, 한글 자모(字母)를 제정하는 데 기여했으며, 『홍무정운역훈(洪武正韻訓釋)』, 『사성통고(四聲通考)』, 『동국정운(東國正韻)』등을 편찬하였다. 군사 문제에도 관심이 있어, 『병정(兵政)』ㆍ『병장설(兵將說)』ㆍ『북정록(北征錄)』 등을 저술하였고, 외교에도 수완이 뛰어나, 1441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정사(正使) 변효문(卞孝文), 부사(副使) 윤인보(尹仁甫)를 따라, 일본 교토(京都)에 다녀왔다.
[편찬/발간 경위]
이 책의 고간본(古刊本) 또는 고사본(古寫本)은 국내에서는 발견되지 않았고, 일찍이 인조 때 중간된 것이 예조 소속의 나이 많은 관리 집에서 겨우 1본(本)만이 보장(保藏)되었을 뿐이었다.
중간된 뒤에도 1782년(정조 6) 4월의 외규장각형지안(外奎章閣形止案)과 같은 장서목록(藏書目錄)에서나, 또는 김경문(金慶門)의 『통문관지(通文館志)』와 안정복(安鼎福)의 『열조통기 (列朝通紀)』와 같은 인용 서목에 책명만 보일 정도이다. 더욱이 그 내용도 지도를 제외한 전문(全文)이 『해행총재(海行摠載)』에 수록되어 있을 뿐이다.
이에 비해 일본에서는 고사본 2, 3본이 알려져 있다. 즉, 고간본도 동경(東京)의 나이가쿠문고(內閣文庫) 소장의 구사에키모리씨고조쿠재장본(舊佐伯毛利氏江粟齋藏本), 동경대학 사료편찬소(史料編纂所) 소장의 구요안원장서본(舊養安院藏書本) 등 몇 종류가 있다.
[서지 사항]
5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갑인자본(甲寅字本)이다. 크기는 세로 36.2cm 가로 22.0cm이며,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 전래되고 있는 『해동제국기』는 5장 분량의 초주갑인자본 외에도, 임진왜란 직후인 훈련도감에서 간행한 ‘을해자체목활자본’ 그리고 근대에 들어와, 1923년 후손 신용휴가 간행한 목활자본 등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책은 훈련도감에서 간행한 을해자체 목활자본에 해당한다. 이 책을 바탕으로 1933년에 조선사편수회에서 『조선사료총간』 제2집으로 영인본을 간행하였고, 1974년에 한국고전번역원에서 『해행총재』를 간행하면서, 이 책을 영인 수록한 바 있다.
[구성/내용]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는 일본에 대한 신숙주의 관찰과 그 기록의 집대성이다. 이 책은 15세기 일본의 정치ㆍ사회ㆍ풍속ㆍ지리를 전면적으로 관찰하고, 이를 가장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이 책에 대한 분석을 통해 우리는 그의 대일 관찰과 한국ㆍ일본 양국의 외교 실정을 이해할 수 있다.
‘해동제국’이란 곧 일본의 본국ㆍ구주 및 대마도ㆍ이키도(壹岐島)와 유구국(琉球國)를 총칭하는 말이다. 찬술 당시의 내용은 ‘해동제국총도(海東諸國總圖)ㆍ일본의 본국도(本國圖)ㆍ서해도구주도(西海道九州圖)ㆍ이키도도(壹岐島圖)ㆍ대마도도(對馬島圖)ㆍ류큐국도(琉球國圖)’ 등 6매의 지도와 일본국기(日本國紀)ㆍ유구국기(琉球國紀)ㆍ조빙응접기(朝聘應接紀) 등이었다.
그 뒤 2, 3편의 추록(追錄)이 첨가되어 1473년 전산전 부관인 양심조 궤향일 정서계(畠山殿副官人良心曹饋餉日呈書契)가 권말에 부록(附錄)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3월 예조좌랑 남제(南悌)가 삼포왜호(三浦倭戶)의 실화(失火)를 진휼(賑恤)할 때 왕명을 받들어, 삼포의 지도를 모사하고, 또 항거왜인(恒居倭人)의 호구(戶口)를 조사한 결과로 만들어진 웅천제포도(熊川薺浦圖)ㆍ동래부산포도(東萊釜山浦圖)ㆍ울산염포도(蔚山鹽浦圖) 3매가 권두의 지도에 첨가, 삽입되었다.
또한 1501년(연산군 7) 류큐국의 사자(使者)가 우리나라에 내빙할 때 병조판서 이계동(李季仝)의 건의로 선위사(宣慰使)성희안(成希顔)이 국정을 상문열기(詳問列記)한 것이 이 책 끝에 부록되었다. 이와 같이 수차의 추록이 있었으나, 원내용에 대해 보수(補修)한 흔적은 없다.
이 책의 찬자인 신숙주는 세조 때의 중신(重臣)으로서, 일찍부터 국가의 추기(樞機)에 참여한 인물이었다. 특히 그는 세조의 명령에 따라 영의정으로서 예조의 사무를 겸장, 사대교린(事大交隣)의 외교 정책을 전담하였다. 그리고 성종 즉위 이후 구규(舊規)를 정비하고 신제(新制)를 입안(立案), 해동제국 사인응접(使人應接)의 사례를 개정해 외교상의 면목을 일신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해동제국기』는 그의 견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그 당시 일본에서 전래된 문헌과 왕년(往年)의 견문, 예조에서 관장한 기록 등을 참작해 교린 관계에 대한 후세의 궤범(軌範)을 만들기 위해 찬술한 것이다. 따라서 추록된 부분도 연산군대의 것을 제외하고는 그가 직접 첨가한 것으로 추측된다.
[의의와 평가]
이 책은 한일 관계의 역사적 변천과 조빙응접(朝聘應接) 규정의 연혁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이 상당히 정비되어 있어 교린 관계의 선규(先規)로서 오랫동안 참고가 되어 왔다. 조선 초기와 일본 무로마치막부시대(室町幕府時代)의 한일외교 관계에 있어서 가장 정확하고 근본적인 사료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뿐만이 아니라, 일본에서도 에도시대(江戶時代) 한일관계 연구의 유일한 사료로 폭넓게 이용되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