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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63(현종 4)∼1722(경종 2)= 60세]. 조선 후기 숙종~영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의정부 좌의정(左議政)이다. 경종 때 이른바 ‘노론(老論) 4대신’의 하나이다. 자(字)는 중강(仲剛)이고, 호(號)는 한포(寒圃), 또는 한포재(寒圃齎)이고,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이조 판서 이민서(李敏敍)이고, 어머니 원주원씨(原州元氏)는 좌의정 원두표(元斗杓)의 딸이다. 밀성군(密城君) 이침(李琛: 세종의 서출 제 5왕자)의 8대손이고, 영의정 이경여(李敬輿)의 손자이고, 좌의정 이관명(李觀命)의 동생이고, 좌의정 이이명(李頤命)의 4촌 동생이다. 노론의 김창집(金昌集)ㆍ민진원(閔鎭遠)ㆍ정호(鄭澔) 등과 가깝게 교유하였고, 옥오재(玉吾齋) 송상기(宋相琦)와 절친한 사이였다. 시문에 능하고 송설체(松雪體)에 뛰어났다.
1686년(숙종 12) 과거에 급제하고, 홍문관 수찬(修撰)ㆍ교리(校理)ㆍ이조정랑(吏曹正郞)ㆍ홍문관 응교(應敎)ㆍ사간원 사간(司諫)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쳤고, 1698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에 우승지(右承旨)ㆍ대사간(大司諫)ㆍ이조 참의(吏曹參議)ㆍ이조 판서(吏曹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1717년(숙종 43)에 숙종이 4촌형 좌의정 이이명(李頤命)을 불러서 독대(獨對)하여 후계자 문제를 논의하였는데, 이것을 <정유독대(丁酉獨對)>라고 한다. 그 직후에 숙종이 특별히 이건명을 우의정에 발탁하여 왕자 연잉군(延礽君) 이윤(李昀: 영조)의 보호를 부탁하였다. 숙종이 승하하자, 국상(國喪)의 총호사(總護使)가 되어 숙종의 장례를 총괄하였다.
경종 때 좌의정이 되어, 김창집(金昌集)ㆍ이이명(李頤命)ㆍ조태채(趙泰采)와 함께 노론의 4대신으로 지목되었다. 노론의 4대신은 우울증을 앓던 경종에게 연잉군(延礽君) 이윤(李昀)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冊封)하여 대리 청정(聽政)하게 하였으나, 소론의 4대신 이광좌(李光佐)ㆍ유봉휘(劉鳳輝)ㆍ조태구(趙泰耈)ㆍ최석정(崔錫鼎) 등이 경종에게 대리 정청을 거두도록 정청(庭請)하여, 마침내 경종이 왕세제의 대리 정청을 거두었다. 이때 소론의 승지 김일경(金一鏡) 등 7인이 노론 4대신을 탄핵하여. 모두 유배시켰다. 이에 이건명은 전라도 흥양(興陽)의 나로도(羅老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1722년(경종 2) 승지 김일경의 사주를 받은 목호룡(睦虎龍)이 노론 4대신을 무고(誣告)하여, 유배지에서 처형당하였다. 그 앞서 이건명이 주청사(奏請使)로서 청나라에 가서 왕세제(王世弟)의 책봉을 요청하면서, 경종이 음위(陰痿) 증세가 있어서 후사(後嗣)를 얻을 수 없으므로 그 동생 이금(李昑)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해야 한다고 주청하였기 때문에 소론의 비판과 공격을 가장 많이 받았다.
[숙종 중반기 활동]
1684년(숙종 10)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2세였다. 그 뒤에 2년이 지나서, 1686년(숙종 12) 알성(謁聖)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4세였다.[『국조방목(國朝榜目)』] 승문원 부정자(副正字)에 보임되어, 춘추관 사관(史官)을 겸임하였다.
1689년(숙종 15) 2월에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서, 장희빈(張禧嬪)을 지지하던 남인이 정권을 잡고, 인현왕후(仁顯王后)를 지지하던 노론의 영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과 노론의 영의정 김수항(金壽恒) 등이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인현왕후는 폐위되고 장희빈이 왕비가 되었다. 이때 9년 전에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을 일으켜서 남인을 출척하는 데에 앞장섰던 노론의 김익훈(金益勳)과 이사명(李師命: 이건명의 4촌형)도 죽음을 당하였다. 1690년(숙종 16) 7월에 남인의 사간원 정언(正言)성준(成儁)이 아뢰기를, “승문원 부정자(副正字) 이건명(李健命)은 이사명(李師命)의 4촌 동생으로서 외람되게 사관(史官)이 되었습니다. 이사명이 처형된 뒤에도 사관으로서 임금의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고 임금의 언동(言動)을 기록하게 할 수 없으니, 사관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임금이 따랐다. 이에 이건명과 이관명(李觀命) 형제도 4촌형 이사명의 죽음으로 인하여 노론의 강경파로 몰려서 파직되어, 한 동안 조정에서 쫓겨나서 은거하였다.
1694년(숙종 20) 3월에 <갑술옥사(甲戌獄事)>가 일어나서 남인이 몰락하고, 소론이 정권을 잡았다. 이에 장희빈이 왕비에서 쫓겨나고 인현왕후(仁顯王后)가 복위되었다. 그해 6월에 세자시강원 설서(設書)가 되었다가, 그해 7월에 사서(司書)로 승진하였다. 이때 홍문록(弘文錄)에 선록(選錄)되었고, 그해 8월에 도당록(都堂錄)에 선임되어, 홍문관 부교리(副校理)에 임명되었다가, 그해 10월에 교리(校理)로 승진하였다. 이때 교리 이건명은 절친한 친구 응교(應敎)송상기(宋相琦)와 함께 숙종에게 임금의 나라를 다스리는 방략 12가지를 건의하였는데, 용사(用舍: 인재 등용과 파직)를 신중히 할 것, 간쟁(諫諍: 언관의 충고)을 받아들일 것, 편사(偏私: 편파적 행위)를 없앨 것, 천노(天怒: 천재지변)에 겸허하게 순응할 것 등이었다. 그해 11월에 이조 좌랑(吏曹左郞)에 임명되었고, 그해 12월에 도목정사(都目政事)를 행할 때 김호(金灝)를 울산 부사(蔚山府使)로 임용하자, 이조 좌랑 이건명이 김호를 임용할 수 없다고 반대하여, 이조 판서 유상운(柳尙運)과 여러 차례 논쟁하였다. 그러나 판서 유상운이 이를 들어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서 이건명을 함경도 북평사(北評事)로 좌천시키자, 좌랑 이건명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가 버렸다. 이조 판서 유상운이 이조 정랑 심권(沈權)을 재촉해서 붓을 들고 서명하도록 강요하여, 마침내 김호를 북평사로 내보내기로 결정하자, 노론이 소론의 유상운을 맹렬히 비난하였다.
1695년(숙종 21) 4월에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서종태(徐宗泰)가 이건명을 소환(召還)하도록 청하여, 이건명은 다시 이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그해 6월에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이 되었고, 그해 7월에 이조 정랑(吏曹正郞)이 되었으나, 소론이 이조 정랑 이건명이 소론의 인물을 배척하고 노론의 인사만을 등용한다고 비난하였으므로, 1696년(숙종 22) 4월에 전라도 옥구 현감(沃溝縣監)으로 좌천되었다. 5월에 다시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임명되어, 세자시강원 문학(文學)을 겸임하였다. 그해 6월에 홍문관 수찬(修撰)이 되었다가, 그해 10월에 홍문관 응교(應敎)가 되었다. 그해 11월에 사간원 사간(司諫)이 되어, 재변(災變)을 만나서 구언(求言)하자, 사간 이건명이 상소하여, 임금이 비용을 절약하여 재변을 만나서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하여 그들로 하여금 유리방랑하게 하지 말도록 건의하였다. 그해 12월에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어, 이조 판서 최석정(崔錫鼎: 최명길의 손자)이 소론의 인사만을 등용한다고 공격하자, 이조 판서 최석정이 변론하고 사임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숙종이 윤허하지 않았다. 그 뒤에 이건명은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
1697년(숙종 23) 1월에 다시 홍문관 응교(應敎)가 되었는데, 그때 숙종이 밤중에 홍문관의 관원들을 소대(召對)하자, 이건명 등이 유점사(楡岾寺)에 있는 어진(御眞: 임금의 화상)을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주장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이때 이건명이 아뢰기를, “붕당(朋黨)을 깨뜨리는 방법은 사색당파를 따지지 말고 먼저 인물의 됨됨이를 평가하는 표준을 만들고, 반드시 화합하는 인사를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하니, 숙종이 말하기를, “대의는 좋다. 상하 군신(君臣)이 이것에 힘쓰고 서로 격려한다면 어찌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해 윤3월에 홍문관 부교리(副校理)가 되었고, 그해 4월에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을 겸임하였다. 그해 4월에 홍문관 응교(應敎)가 되었으나, 그해 5월에 대사간 박태순(朴泰淳)이 탄핵하기를, “지금 나라의 큰 폐단은 당론(黨論)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이건명은 이사명(李師命)의 4촌 동생으로서 자기의 사사로운 혐의를 돌아보지 않고, 상소하여 대신을 배척하면서 훈신(勳臣)을 죄인으로 몰아 죽이려고 하니, 견책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응교 이건명이 상소하기를, “신이 일찍이 박태순을 관찰사에 의망(擬望)하는 것에 반대했었는데, 박태순이 그 일에 원한을 품고 신을 공격하고 배척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대답하지 않고 체직시켰다. 그해 11월에 의정부 사인(舍人)이 되었고, 그해 12월에 암행어사(暗行御史)에 임명되어 경기 지역을 염찰(廉察)하고 돌아와서 임금에게 자세히 보고하였다.
1698년(숙종 24) 1월에 사헌부 집의(執義)가 임명되었고, 그해 3월에 다시 홍문관 부응교(副應敎)가 되었다가, 그해 5월에 다시 사간원 사간(司諫)이 되었다. 그해 5월에 대간(臺諫)에서 발론(發論)할 때 사간 이건명이 정언 정유점(鄭維漸)과 함께 소론의 우의정 최석정(崔錫鼎)을 탄핵하려고 발의하자, 소론의 대사간 서문유(徐文裕)가 이에 반대하여 최석정을 탄핵하지 못하였다. 그해 6월에 다시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었고, 그해 7월에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정사(正使) 서문중(徐文重)ㆍ부사(府使)민진주(閔鎭周) 등과 함께 중국 청나라 연경(燕京)에 갔다가 돌아왔다. 1699년(숙종 25) 1월에 다시 사간원 사간(司諫)이 되었다가, 그해 3월에 사헌부 집의(執義)로 옮겼고, 그해 4월에 다시 홍문관 부응교(副應敎)가 되었고, 그해 5월에 다시 사간원 사간(司諫)이 되었다. 그해 7월에 다시 홍문관 응교(應敎)가 되었다가, 그해 8월에 다시 홍문관 부응교(副應敎)가 되었고, 그해 10월에 다시 사간원 사간(司諫)을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
1700년(숙종 26) 2월에 우승지(右承旨)가 되었고, 1701년(숙종 27) 8월에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승진되었다. 1702년(숙종 28) 4월에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었고, 그해 7월에 다시 이조 참의(吏曹參議)가 되었다가, 그해 8월에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다. 그 해 9월에 좌승지(左承旨)가 되었다가, 그해 11월에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 1703년(숙종 29) 1월에 다시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가, 그해 4월에 다시 이조 참의(吏曹參議)가 되었다. 그해 6월에 다시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는데, 청나라 사신이 와서, 재상이 시(詩)를 지어 청나라를 찬양하는 글을 병풍에 써서 주기를 요구하자, 노론의 이건명ㆍ이관명(李觀命) 형제와 권상유(權尙游) 등은 끝내 이에 응하지 아니하였다. 그해 7월에 강화 유수(江華留守)로 나갔는데, 그해 9월에 강화 유수 이건명이 강화도에 홍수를 막고 전답이 침몰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대청포(大淸浦)ㆍ굴곶이포[屈串浦] 등지에 홍문(虹門)을 개조해서 공사를 시작할 것을 청하였는데, 노론의 영의정 신완(申玩)은 찬성하였으나, 소론의 우의정 김구(金構)는 반대하여, 실행되지 못하였다.[『숙종실록』 29년 9월 25일]
1704년(숙종 30) 1월에 다시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가, 그해 4월에 이조 참판(吏曹參判)이 되었고, 그해 5월에 이조 참판 이건명이 상소하여 전조(銓曹: 이조)에서 변통(變通)해야 할 일 3가지를 진달하였는데, 첫째, 수령(守令)은 현명(賢明)한 사람을 골라서 임명할 것, 둘째, 문반(文班)ㆍ무반(武班)의 산직(散職)은 참상관(參上官)에게만 허여할 것, 셋째, 각 왕릉(王陵)의 제사에는 문관과 무관을 아울러 참여시킬 것 등이었다. 그해 6월에 이조 참판 이건명이 길에서 왕명을 받들고 가는 내관(內官: 내시)을 만났는데, 거만하게 범마(犯馬)하므로 그 하인을 잡아서 그 죄를 다스렸다. 이에 숙종이 대노하여 이건명을 체포하여 장형을 때리고 추고(推考)하게 하였다. 의정부 3정승과 비변사의 여러 대신들이 이건명을 용서하도록 간청하였으나, 숙종은 화를 내기를, “명사(名士)는 비록 과실이 있더라도 반드시 용서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습성은 아주 나쁘다.” 하고, 이건명을 파직하고 중한 형벌에 처하였다. 그러나 숙종은 너무 지나쳤다고 생각하여, 그해 9월에 이건명을 도승지(都承旨)로 발탁하여, 최측근으로 삼았다. 이에 이건명은 노론 가운데 4촌 형 이이명(李頤命)과 함께 숙종의 신임을 가장 많이 받는 신하가 되었다.
[숙종 후반기 활동]
1705년(숙종 31) 2월에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가, 그해 6월에 다시 이조 참판(吏曹參判)이 되었고, 그해 12월에 다시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1706년(숙종 32) 1월에 다시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 되었고, 1707년(숙종 33) 3월에 다시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 되었고, 4월에 다시 이조 참판(吏曹參判)이 되었다가, 6월에 호조 참판(戶曹參判)이 되었고, 8월에 다시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9월에 경기 관찰사(觀察使)가 되었고, 12월에 경기 관찰사에 연임되었다. 1708년(숙종 34) 7월에 다시 이조 참판(吏曹參判)이 되었다가, 11월에 다시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 되었고, 8월에 다시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1709년(숙종 35) 7월에 다시 이조 참판(吏曹參判)이 되었다.
1712년(숙종 38) 1월에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가, 다시 이조 참판(吏曹參判)이 되었고, 3월에 다시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이 되었는데, 5월에 부제학 이건명이 과거 때 대궐 밖에서 시권(試券)을 작성하여 바쳤다는 소문을 듣고 그 감독자들을 처벌하도록 청하였다. 6월에 대사간 이의현(李宜顯) 등이 과거 부정 사건에 대하여 그 진실을 분명히 밝힐 것을 청하고, 뜬소문을 고발한 이건명을 탄핵하자, 영의정 서종태(徐宗泰)가 부제학 이건명을 변론하였다. 그 뒤에 이건명이 정승이 될 때까지 소론이 과거 부정 사건을 가지고 이건명을 계속 공격하였다. 그해 9월에 다시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가, 10월에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임명되었다. 1713년(숙종 39) 1월에 이건명이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이 되었는데, 그때 절친한 친구 송상기(宋相琦)는 대제학(大提學)이 되었다. 그해 3월에 형조 판서(刑曹判書)가 되었고, 윤5월에 다시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가, 8월에 형조 판서가 되었다.
1714년(숙종 40) 8월에 다시 이조 판서(吏曹判書)가 되었고, 9월에 소론의 이조 참의(吏曹參議) 이대성(李大成)이 소론의 유봉휘(劉鳳輝)를 후임으로 천거하자, 노론의 이조 판서 이건명ㆍ이조 참판 이만성(李晩成)이 이에 반대하다가, 이대성의 공격을 받고 사직하는 상소를 올리자, 숙종이 비답하기를, “이대성은 의심과 노여움으로 자못 화평한 마음이 부족하다.” 하고, 이건명과 이만성에게 출사(出仕)하도록 명하였다. 그해 10월에 호조 판서(戶曹判書)가 되었다. 1715년(숙종 41) 10월에 호조 판서에 연임되었다. 1716년(숙종 42) 2월에 소론의 강경파 사헌부 지평(持平)박필몽(朴弼夢)이 상소하여, 이건명이 과거 부정 사건을 중간에서 떠벌려서 일을 어렵게 만들었다고 공격하자, 호조 판서 이건명이 사직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숙종이 박필몽을 불러서 엄하게 심문하였으나, 박필몽이 강변하기를 그치지 않으니, 숙종이 노하기를, “나는 격렬한 당론을 나는 몹시 역겨워한다. 박필몽을 체차(遞差)하고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좌천시키라.” 하였다. 그해 7월에 병조 판서(兵曹判書)가 되었다.
1717(숙종 43) 2월에 숙종이 병환을 치료하기 위하여 온양(溫陽) 온천으로 거둥하자, 약방(藥房) 도제조(都提調)인 우의정 이이명(梨頤命: 이건명의 4촌 형)이 어의(御醫)와 함께 어가(御駕)를 수종하였고, 병조 판서 이건명이 군사를 동원하여, 어가를 호위하였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날마다 비가 내리는데 군사들이 한데에서 지내며 비를 맞고 있으므로, 군사들을 공궤(供饋)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호위 군사들에게 소고기와 술을 먹이도록 하였다. 우의정 이이명이 아뢰기를, “병조 판서를 보내어 군사들을 위로하는 것도 한 가지 좋은 방도입니다.” 하니, 임금이 병조 판서 이건명에게 명하여 군영으로 가서 호위 군사들을 위로하도록 하였다. 그해(정유년) 7월 19일에 병중의 숙종이 희정당(熙政黨)에서 승지와 사관(史官)을 물리치고 좌의정 이이명을 홀로 불러서 독대(獨對)하고, 우울증을 앓는 세자 이윤(李昀: 경종)이 왕위를 계승하기가 어려우므로, 그 대신에 연잉군(延礽君) 이금(李昑: 영조)을 세자로 책봉하여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이에 최숙빈(崔叔嬪)이 낳은 연잉군의 왕위 계승을 은밀히 의논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노론의 <정유독대(丁酉獨對)>이다. 이때 이이명이 4촌 동생 이건명을 추천하여, 연잉군을 보호하도록 요청하였다고 한다. 그해 12월에 이건명은 다시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1718년(숙종 44) 1월에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이 되었다가, 3월에 형조 판서(刑曹判書)가 되었다. 그해 4월에 세자빈(世子嬪) 심씨(沈氏)가 돌아가자, 대제학 송상기(宋相琦)가 시책문(諡冊文)을 짓고, 형조 판서 이건명(李健命)이 글씨를 썼으며, 또 형조판서 이건명이 애책문(哀冊文)을 짓고, 여성군(礪城君) 이집(李楫)이 글씨를 썼다. 이로써 보더라도 이건명은 문장도 잘 짓고 글씨도 잘 썼던 것을 알 수 있다. 그해 7월에 예조 판서(禮曹判書)가 되어, 의금부 판사(判事)를 겸임하였다. 그해 8월에 숙종이 이건명을 특별히 우의정(右議政)에 임명하고, 연잉군의 장래를 부탁하였다. 그해 10월에 정시(庭試)를 시행할 때 홍문관 제학(提學)민진후(閔鎭厚)는 신병(身病)으로 나오지 못하자, 우의정 이건명이 명관(名官: 과거 시험을 주관하는 사람)이 되어 정시를 주관하였다. 그해 11월에 친형 이관명(李觀命)이 이조 참판(吏曹參判)이 되어, 비변사 당상관(堂上官)을 겸임하자, 동생 이건명(李健命)이 우의정으로서 형제가 함께 나라의 중요한 권력을 장악한다는 비난을 받을까봐 염려하여 비변사의 회의에 참석하지 않자, 세자(世子)가 위로하기를, “형제가 주사(籌司: 의정부)에 출입한 고사가 있으니, 혐의스럽게 여기지 말고 참석하도록 하라.” 하였다.
1719년(숙종 45) 1월에 숙종이 병환이 심하여, 세자(世子: 경종)가 의정부 3정승과 비변사 대신을 불러서 정사를 보았는데, 우의정 이건명이 계청(啓請)하기를, “경외(京外)에서 온 가족이 전염병에 걸려서 몰사(沒死)하였으나, 그 시체를 거두어 장사하지 못한 경우에 호(戶)마다 곡식 1석(石)씩을 주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이를 옳게 여겼다. 콜레라 유행이 심하였던 1718년(숙종 44)에 한성부에서 온 가족이 몰사한 경우가 1천 1백 1호(戶)였고, 가족이 일부 사망한 단호(單戶)도 4백 18호였다. 1716년~1717년에 서울과 8도에서 전염병으로 죽은 사상자는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조정과 지방의 관리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였다. 당시 조정의 대신들 가운데 콜레라의 사상자를 염려하여 환곡(還穀)과 신포(身布)를 감면해 주고 전염병을 구제하자고 극력 주장한 사람은 이건명 한 사람뿐이었다. 그해 3월에 우의정 이건명이 장희빈(張禧嬪)의 초라한 무덤을 예조로 하여금 개장(改葬)하게 하고, 세자(世子)로 하여금 망곡례(望哭禮)를 거행하도록 하였다.
그해 5월에 우의정 이건명이 세자(世子)에게 차자를 올려 양역(良役)의 폐단을 혁파할 것을 아뢰기를, “만약 저하께서 양역(良役)의 폐해를 개혁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제일의 급선무로 삼는다면, 우선 마땅히 빨리 경외(京外)로 하여금 1년 동안 징수하는 신포(身布)의 수량과 각 고을의 호전(戶田)ㆍ전결(田結)의 많고 적은 것을 조사하고, 지난날 여러 사람의 의견을 비교하여 그 우열(優劣)을 살펴서 재량(裁量)하고 단연코 이를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해 6월에 친형 이관명(李觀命)이 이조 판서(吏曹判書)가 되었는데, 동생 이건명이 우의정으로서, 도목정사(都目政事)를 2차례 시행하였다. 소론이 이건명ㆍ이관명 형제가 인사 행정을 맡아서 노론의 인사만을 등용하고, 소론의 인물을 배제한다고 맹렬히 비난하였다. 그해 9월 28일에 숙종이 나이 60세 환갑(還甲)을 맞이하여, 우의정 이건명(李健命)이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등과 함께 경현당(景賢堂)에서 축수하는 진연(進宴)을 베풀고, 임금에게 경축사를 올렸다. 숙종은 태조의 전례에 따라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고 죄인을 사면하였다. 이때 우의정 이건명이 숙종에게 청하여, 조정의 관리 중에서 참상관(參上官)은 70세의 이상과 참하관(參下官)은 80세 이상에게 가자(加資)하였다.
1720년(숙종 46) 2월에 숙종의 서출 제3왕자 연령군(延齡君) 이훤(李昍)이 병으로 죽자, 임금이 매우 비통해 하므로, 우의정 이건명이 숙종에게 병환에 해롭다고 하며 억지로라도 마음을 관대하게 가지기를 청하니, 숙종이 말하기를, “마음을 관대하게 갖고 감정을 억제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과인의 병이 너무 깊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것이며, 감정에 내맡겨서 그런 것이 아니다.” 하였다. 그해 3월에 친형 이조 판서 이관명(李觀命)이 면직되었다. 처음에 이조 판서 이관명은 그 동생 이건명이 당시 재상의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두 형제가 인사 행정을 맡아보는 것을 혐의스럽게 여겨서 극력 사양하였다. 이때 임금이 비답하기를, ‘두 번 도목정사(都目政事)를 지난 뒤에는 마땅히 체직시키겠다.’ 하고 약속하였기 때문에, 이때에 이르러 이조 판서 이관명이 간곡히 사직하니, 임금이 마침내 이관명과 이건명 형제를 체직시켰다. 그해 6월에 임금의 병환이 위중으로 대신ㆍ중신을 명산(名山) 대천(大川)에 보내어 기도하였다. 이때 영의정 김창집(金昌集)ㆍ우의정 이건명 등이 종묘(宗廟)ㆍ사직(社稷)에 기도하였다. 그해 6월 8일에 숙종이 승하하였는데, 나이가 60세였다.
우의정 이건명이 총호사(摠護使)에 임명되어, 묘호(廟號)를 ‘숙종(肅宗)’이라고 올리고, 국장(國葬)ㆍ빈전(殯殿)ㆍ산릉(山陵)의 3 도감(都監)을 지휘하여, 그해 10월 21일에 숙종을 명릉(明陵)에 장사지냈다.[묘지명]
[경종 시대 활동]
1720년(경종 즉위년) 6월에 경종이 즉위하자, 우의정 이건명이 총호사(摠護使)에 임명되어, 국장(國葬)ㆍ빈전(殯殿)ㆍ산릉(山陵)의 3도감(都監)을 지휘하여, 그해 10월 21일에 숙종을 명릉(明陵)에 장사지냈다. 그해 8월에 우의정 이건명이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니, 인원대비(仁元大妃: 김주신의 딸)가 숙종의 유훈(遺訓)이 담긴 『자신만고(紫宸漫稿)』 1책을 경종에게 전하였다. 그 책 중에서 숙종이 지은 시 2수와 이건명과 김창집의 화상(畵像)에 붙이는 시 1수가 있었으므로, 이건창이 그 시를 베껴서 김창집에게 전해 주고 두 사람이 함께 울었다. 그해 10월에 이건명이 총호사(摠護使)로서 국장(國葬)을 끝마치자, 경종이 이건명을 좌의정(左議政)에 임명하였다. 그해 11월에 좌의정 이건명이 차자를 올려 사직(辭職)하였으나, 경종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어서 좌의정 이건명이 차자를 올려 전장(銓長: 인사 행정 책임자)의 체직을 허락하도록 청하니, 경종이 이를 허락하였다. 소론이 좌의정 이건명이 인사 행정을 맡아서 소론의 인물을 배제하고 노론의 인사만을 등용한다고 공격하였기 때문이다. 그해 12월에 청나라 칙사(勅使)가 숙종에게 치제(致祭)하려고 나오자, 영의정 김창집ㆍ좌의정 이건명ㆍ어전 통사(御前通事) 김재로(金在魯)가 경종에게 청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의례를 하나하나 가르쳤으나, 막상 칙사를 맞이한 경종이 지나치게 위축되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노론의 4대신은 경종의 왕으로서의 자질을 의심하였다.
1721년(경종 1) 2월에 청나라 칙사(勅使)가 돌아갈 때 주는 인정 물품을 줄인 일로 인해 화를 내고, 좌의정 이건명(李健命)과 호조 판서 민진원(閔鎭遠)이 의논하여, 은화 대신에 별도로 상칙사와 부칙사에게 각각 백금(白金) 1천 냥씩을 뇌물로 주었다. 부칙사는 조선의 문서를 담당하는 예부(禮部)의 대신이었으므로, 노론이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려고 청나라의 관리에게 뇌물을 주었다는 의심을 받았다. 칙사가 돌아갈 때 좌의정 이건명이 외교 관례에 따라서 경종에게 칙사를 교외에까지 나가서 직접 전송하도록 청하였으나, 경종이 청나라 사신을 무서워하여 ‘바람이 차가워서 나가기가 어렵다’고 사절하였다. 우울증을 앓던 경종이 사람을 만나는 것을 기피하는 현상을 나타내자, 노론은 국가의 장래를 위하여, 연잉군(延礽君)을 세제(世弟)로 책봉하여 왕을 대리하여 정사를 듣는 청정(聽政)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때 청나라 사신이 국왕의 동생 연잉군(延礽君)을 만나보고자 하자, 소론의 우의정 조태구(趙泰耈)가 노론의 영의정 김창집(金昌集)과 좌의정 이건명을 공격하였는데, 노론의 대신들이 연잉군을 후사(後嗣)로 삼으려고 한다고 의심하였기 때문이다. 김창집과 이건명이 연명하여 차자(箚子)를 올려, 조태구의 소척(疏斥)에 대하여 변명하였다.
그해 8월에 좌의정 이건명이 차자를 올려 양역(良役)을 변통(變通)하는 일의 가부를 논하기를, “신포(身布)를 내고 창칼을 잡고 나라를 지키고 있는 양민은 10분의 2, 3에 지나지 못하고, 양반(兩班)ㆍ중인(中人)ㆍ서얼(庶孽)로서 신포를 내지 않는 한유(閒遊)의 무리들이 10분에 8, 9를 차지하고 있으니, 양민은 족징(族徵)과 인징(隣徵)을 당하다가, 목을 매어 죽는 자까지 있습니다. 청컨대 결포(結布)의 법을 우선 한두 고을에 시험해 보소서.” 하니, 경종이 하유(下諭)하기를, “묘당(廟堂: 의정부)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이에 비변사(備邊司)에서 좌의정 이건명(李健命)의 주장에 따라서 결포의 법을 충청도 임천(林川), 전라도 남원(南原), 경상도 의령(宜寧)에 시험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그 뒤에 정변(政變)이 일어나서 이건명이 화를 당하자, 양역(良役)을 변통(變通)하는 일은 결국 시행되지 못하였다.
당시 경종이 우울증으로 인하여 왕권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한 노론은 연잉군(延礽君) 이금(李昑: 영조)을 왕세제(王世弟)로 삼아서 왕을 대리(代理)하여 청정(聽政)하게 하려고 하자, 경종을 지지하던 소론은 노론이 정권을 독차지하려고 한다고 맹렬히 반대하였다. 그러나 소론의 온건파 대신 최석항(崔錫恒: 영의정 최명길의 손자)과 이광좌(李光佐) 등은 다른 대안이 없다고 생각하여, 연잉군(延礽君) 이금(李昑)을 왕세제(王世弟)로 삼는 것까지는 용인하였으나, 연잉군(延礽君)이 경종을 대리(代理)하여 청정(聽政)하는 것은 극력 반대하였다. 왜냐하면, 34세의 경종이 후사(後嗣)를 얻을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경종이 우울증이 더욱 심해져서 모든 국사는 내전의 인원대비(仁元大妃)가 도맡아서 처리하였다. 인원대비는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죽고 난 뒤에 숙종의 세 번째 왕비로 맞아들인 인원왕후(仁元王后) 김씨(金氏)인데, 서인의 대신 김주신(金柱臣)의 딸이었다. 노론의 대신 영의정 김창업과 좌의정 이건명이 병중에 있는 김주신을 만나서, 연잉군(延礽君)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고, 대리(代理)하여 청정(聽政)하는 문제를 비밀리에 합의하였다.
1721년(경종 1) 8월 20일 밤 2경(二更)에 영의정 김창집(金昌集)과 좌의정 이건명이 빈청(賓廳)에 나가서 원임 대신(原任大臣)ㆍ육경(六卿)ㆍ삼사 장관(三司長官) 등을 불러서 회의를 하고 연잉군(延礽君)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할 것을 청하였는데, 영의정 김창집이 말하기를, “성상께서 춘추가 한창 젊은데도 아직껏 저사(儲嗣: 후사)가 없으니, 주야로 걱정이 됩니다.” 하고, 연잉군(延礽君) 이금(李昑)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할 것을 청하였다. 이건명은 말하기를, “이 일은 일각(一刻)이라도 늦출 수가 없으므로 신 등이 감히 깊은 밤중에 소대(召對)를 청한 것이니, 빨리 대계(大計)를 정해야 합니다.” 하였다. 노론의 승지 조영복(趙榮福)이 거듭 다그치자, 경종이 마지못하여 말하기를, “윤허하고 따르겠다.” 하였다. 경종이 대내(大內)로 들어가서, 대비의 언문 교서(諺文敎書)를 받아서 전하기를, “선대왕(先大王: 숙종)의 혈육으로는 다만 주상과 연잉군(延礽君)뿐이니,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는가.” 하여, 마침내 무수리 최숙빈(崔叔嬪)이 낳은 연잉군을 왕세제(王世弟)로 삼았다. 이때 왕세제(王世弟)를 책봉하는 교서(敎書)를 이건명의 4촌 예조 판서 이관명(李觀命)이 지었다.
다음해 8월에 궁궐 밖의 사저(私邸)에서 살고 있던 연잉군(延礽君)을 대궐 안으로 들어와서 거처하게 하였다. 또 영의정 김창집과 좌의정 이건명이 연잉군의 위호(位號)를 ‘왕세제(王世弟)’로 정하였다. 또 왕세제의 학문을 위하여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을 설치하고, 노론의 영의정 김창집과 좌의정 이건명이 왕세제의 사부(師傅)를 맡고, 소론의 이조 판서 최석항(崔錫恒)을 좌우빈객(賓客)으로, 노론의 공조 판서 이관명(李觀命)을 좌부빈객(左副賓客)으로 각각 임명되었다. 그러나 소론은 세자시강원의 겸직에 부임하기를 거절하였다. 소론의 대신 유봉휘(柳鳳輝)가 상소하여, 왕세제의 책봉을 비판하였고, 소론의 우의정 조태구(趙泰耈)는 상소하여, 좌의정 이건명을 맹렬히 비난하였으므로, 좌의정 이건명과 우의정 조태구는 조회 석상에서 격렬하게 다투었다. 이에 경종이 놀라서 두 사람을 불러서 위로하고 양쪽을 화해시키려고 애를 썼다.[『경종실록』 1년 8월 25일] 그해 10월에 노론의 사헌부 집의(執義) 조성복(趙聖復)이 처음으로 왕세제(王世弟)로 하여금 왕을 대리하여 정사를 듣는 청정(聽政)을 시행할 것을 청하자, 경종이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기를, “내가 이상한 병에 걸려서 조금도 회복될 기미가 없으니, 만기(萬機)를 수응(酬應)하기가 진실로 어렵다. 이제 왕세제는 젊고 영명(英明)하므로, 만약 청정(聽政)하게 하면, 내가 마음을 편하게 병을 조섭할 수가 있을 것이니, 대소의 국사(國事)를 모두 왕세제로 하여금 결단하게 하라.” 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의정부 좌참찬 최석항(崔錫恒)이 대궐로 달려와서, 청대(請對)하여 눈물을 흘리며 대리 정청을 거두도록 간청하였다. 소론의 호조 판서 조태억(趙泰億) 등이 왕세제에게 대리 청정하라는 어명을 거두도록 경종에게 간청하였다.[『경종실록』 1년 10월 11일]
그해 10월 16일에 소론이 주도하여, 대소 관원들이 대궐의 뜰[庭]에 모여서 왕세제에게 대리 청정하라는 어명을 거두도록 청(請)하는 정청(庭請) 운동을 전개하고, 소론의 4대신 조태구(趙泰耈)ㆍ유봉휘(劉鳳輝)ㆍ이광좌(李光佐)ㆍ조태억(趙泰億) 등이 모두 합문(閤門) 밖에서 비답을 기다렸으나, 경종은 대리 청정을 취소할 수 없다고 비답하였다. 노론의 4대신 김창집(金昌集)ㆍ이건명(李健命)ㆍ이이명(李頤命)ㆍ조태채(趙泰采)가 2품 이상 대신과 삼사(三司)를 불러서 설득하였는데, 청정 운동에 참여한 이관명(李觀命)ㆍ민진원(閔鎭遠) 등의 노론의 온건파는 모두 승복하였으나, 최석항(崔錫恒)ㆍ이광좌(李光佐) 등 소론의 온건파는 불가하다고 주장하였다. 이광좌는 성난 목소리로 노론의 4대신을 꾸짖기를, “그대들은 신하의 절의(節義)를 다하였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자, 노론의 좌의정 이건명이 노여여 이광좌를 꾸짖고 물러가라고 고함치고 서로 크게 다투었다.
10월 17일에 경종이 창경궁(昌慶宮)에 있었는데, 소론의 우의정 조태구(趙泰耈)는 한밤중에 창경궁의 선인문(宣仁門: 북문)으로 들어가서 비밀리 청대(請對)하고, 경종에게 눈물을 흘리고 간청하여 마침내 대리 청정하라는 어명을 거두도록 하였다. 그날 아침에 김창집ㆍ이이명(李頤命)ㆍ이건명이 비변사에서 예관(禮官)을 모아서, 왕세제가 대리 청정하는 절차를 논의하다가, 경종이 조태구의 간언에 따라 왕세제의 대리 청정을 거두었다는 말을 듣고, 노론의 대신 김창집ㆍ이이명ㆍ이건명 등은 크게 놀라고 당황하여 지름길로 내달려서 합문(閤門)에 이르렀고, 이윽고 노론과 소론의 2품 이상 대신과 삼사(三司)의 관료들이 잇따라 도착하여 아울러 청대(請對)하니, 경종이 진수당(進修堂)에 나아가서 인견하였다. 노론의 영의정 김창집이 말하기를, “신 등이 힘써 간쟁(諫爭)하지 못한 죄는 만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하였으나, 소론의 우의정 조태구는 말하기를, “오늘 천안(天顔)을 뵐 수 있으니,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하였다. 이건명은 말하기를, “이제 만약 성상께서 여러 신하들의 청을 굽어 따르시어 빨리 내리신 명령을 도로 거두신다면 어찌 큰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노론의 여러 신하들이 서로 잇따라 힘써 간쟁(諫爭)하며 경종에게 비답을 내리기를 청하였으나, 경종이 끝내 비답하지 아니하였다.[『경종실록』 1년 10월 17일]
그해 10월 28일에 좌의정 이건명(李健命)은 주청사(奏請使)에 임명되어 청나라에 가서 왕세제의 책봉(冊封)을 청하게 되었다. 주청사 이건명은 부사(副使)윤양래(尹陽來)와 함께 청나라 연경(燕京)으로 떠났다. 그해 12월에 승지 김일경(金一鏡)이 환관 박상검(朴尙儉)과 몰래 결탁하여, 왕세제 연잉군(延礽君)이 경종에게 시선(視膳: 임금의 수라를 살피는 것)하고, 문침(問寢: 임금의 잠자리를 문안하는 것)하는 길을 막아서 내전(內殿)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고, 또 왕세제를 모해하려고 꾀하다가 실패하였다.[영조의 「지문」] 그해 12월 6일에 김일경(金一鏡)ㆍ박필몽(朴弼夢)ㆍ이명의(李明誼) 등 7인이 상소하기를, “전하께서는 빨리 사흉(四凶: 노론 4대신)을 법으로 다스려서 창궐(猖獗)하지 못하게 하소서. 저들 네 사람은 선왕을 잊고 전하를 저버리므로 죄악이 차고 넘칩니다. 나라 사람들이 모두 ‘죽이는 것이 옳다.’고 하는데, 어찌하여 전하께서는 너그럽게 용서하여 지금까지 조정에 두고 있습니까. 천토(天討)를 행하여 더럽고 악한 자들을 숙청하여, 적신(賊臣) 말자(末子)가 정치에 간여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경종이 크게 기뻐하며 비답하기를, “나의 뜻에 부응하여 진언(進言)한 것을 내가 깊이 가납(嘉納)한다.” 하였다. 이에 경종은 우의정(右議政) 조태구(趙泰耈)를 영의정에 임명하고 영의정 김창집과 좌의정 이건명을 체직시키라고 명하였다.
그해 12월 12일에 사간(司諫) 이진유(李眞儒)ㆍ헌납(獻納) 이명의(李明誼)ㆍ지평(持平)박필몽(朴弼夢)ㆍ정언(正言) 서종하(徐宗廈)가 노론 4대신을 탄핵하기를, “김창집(金昌集)은 숙종 때 고묘(告廟)의 의논을 저지해서 막았고, 이이명(李頤命)은 숙종과 독대(獨對)하였으며, 이건명(李健命)은 언로(言路)를 막았으며, 조태채(趙泰采)는 겉으로 정청(庭請)에 참여하고, 실제로는 세 대신과 함께 대리 청정의 절차를 의논하였으니, 그 정상이 너무나 흉악합니다. 만약 이러한 무리를 조정에 둔다면, 반드시 종묘사직에 근심을 끼칠 것입니다. 청컨대, 모두 절도(絶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고, 이건명은 돌아오기를 기다려 처벌하소서.” 하니, 경종이 그대로 따랐다. 이에 박필몽이 일어나서 사례하기를, “이제 아뢴 대로 하라는 하교를 받았으니, 진실로 종사의 더할 수 없는 다행입니다. 이제부터는 신민(臣民)이 편안히 잠을 잘 수가 있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소론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 등 7인이 상소하여, 노론 4대신을 탄핵하여 노론 4대신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여 마침내 소론이 정권을 잡았다. 이것을 <신축환국(辛丑換局)>이라고 한다. 이때 노론의 4대신 등 50여 명이 유배되었다.
1722년(경종 2) 2월에 소론의 승지 김일경(金一鏡)이 목호룡(睦虎龍)을 시켜서, 영의정 김창집의 손자 김성행(金省行), 좌의정 이이명의 아들 이기지(李器之)와 조카 이희지(李喜之: 이사명의 아들) 등 노론의 명문가 자제 13명이 궁녀와 결탁하여 경종을 죽이려고 하였다고 무고하게 하여, <신임사화(辛壬士禍)>를 일으켜서 노론의 4대신과 50여 명을 처형하고 170여 명을 유배하였다. 그러나 이건명은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으므로, 우선 역모죄로 처결하여 전라도 고양군 흥양(興陽)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기로 결정하였다. 그해 3월에 주청사(奏請使)인 좌의정 이건명(李健命)과 부사(副使)윤양래(尹陽來)가 청나라 연경(燕京)에서 출발하면서 먼저 군관을 보내어 청나라에서 왕세제(王世弟)의 책봉(冊封)을 허락 받았다고 치계(馳啓)하였다. 이때 정국(政局)이 뒤바뀌어서 왕세제 연잉군(延礽君: 영조)의 처지가 지극히 위태로웠는데, 청나라에서 왕세제 책봉을 허락 받았다는 보고가 이르자, 왕세제의 처지가 다소 안정되었다. 그러나 이건명은 주청사로 중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에 본국에 정변(政變)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자신의 행로를 어떻게 해야 할지와 가족들의 안위가 걱정되어, 몹시 괴로워하였다.
그해 4월에 의금부에서 이건명이 돌아오기 직전에 의금부에서 그의 유배지를 바꾸었다. 처음에 이건명을 전라도 흥양(興陽)의 사도(蛇島: 뱀섬)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사도(蛇島)는 바다와 떨어져 있는 땅이 아니라고 하여, 의금부에서 이건명을 본현(本縣)의 나로도(羅老島)에 이배(移配)시킬 것을 계청(啓請)하니, 경종이 그대로 따랐다. 그해 4월 18일에 동지사(冬至使) 겸 주청사(奏請使)의 부사(副使)윤양래(尹陽來)와 서장관(書狀官) 유척기(兪拓基)가 청나라에서 돌아와서 임금에게 복명(復命)하였으나, 상사(上使) 이건명(李健命)은 죄를 받은 몸이므로 서울 도성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도성문 밖에서 대죄하다가, 바로 체포당하여 전라도 흥양 나로도 유배지로 압송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다만 청나라에서 왕세제의 책봉(冊封)을 순조롭게 허락하였다고 하여, 중외(中外)에서 왕세제 연잉군(延礽君)에게 축하하였다. 사헌부와 사간원의 양사(兩司)에서 번갈아 가면서 노론 4대신의 죄를 탄핵하고 처형하도록 청하였으나, 경종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해 8월에 대간(臺諫)에서 끈질기게 노론 4대신과 노론 중진을 처형할 것을 청하자, 경종이 마지못해서 허락하였다. 1722년(경종 2) 8월 19일에 이건명은 전라도 고흥군 흥양(興陽: 남양면)의 나로도(羅老島)에서 처형되었는데, 향년이 60세였다. 이때 선전관(宣傳官) 이언환(李彦瑍)ㆍ의금부 도사(都事) 이하영(李夏英)이 흥양(興陽)의 나로도(羅老島)에서 이건명을 처참(處斬)하는 데에 입회하였다.
문집으로 『한포재집(寒圃齎集)』 10권이 남아 있다.
[경종 때 왕세제의 책봉과 대리 청정]
1720년(경종 즉위년) 6월에 경종이 34세의 나이로 즉위하였으나, 우울증이 점점 심해졌다. 그해 8월에 우의정 이건명이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니, 인원대비(仁元大妃: 김주신의 딸)가 숙종의 유훈(遺訓)이 담긴 어서(御書) 6권 1책을 경종에게 전하였다. 그 글에는 숙종의 정신과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었는데, 숙종은 경종에게 연잉군(延礽君)을 보호하고 형제가 화목하라고 부탁하였다. 그 중에는 숙종이 지은 시 2수와 이건명과 김창집의 화상(畵像)에 붙이는 시 1수가 있었으므로, 이건명이 그 시를 베껴서 김창집에게 전해 주고 두 사람이 이를 읽어보고 울었다고 한다.[『소재집(疏齋集)』 10권-제발(題跋)] 숙종이 어서(御書)에서 말하기를, “내가 『자신만고(紫宸漫稿)』를 지었으나, 자손들에게 이를 간행(刊行)하게 할 뜻은 없다.” 하였으나,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이를 간행하기를 주장하였다. 이로써 보면, 1717년(정유년)에 숙종이 노론의 실력자 이이명(李頤命: 이건명의 4촌 형)을 불러서 <정유(丁酉) 독대(獨對)>를 할 때 세자 경종을 밀어내고 연잉군(延礽君)을 세자로 삼으려고 하였다는 소론의 주장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해 12월에 청나라 칙사(勅使)가 강희제(康熙帝)의 특명을 받고 숙종에게 치제(致祭)하려고 우리나라에 나오자, 영의정 김창집(金昌集)ㆍ좌의정 이건명(李健命)ㆍ어전 통사(御前通事) 김재로(金在魯) 등이 입대(入對)하여 경종에게 청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의례를 하나하나 가르쳤다. 이건명이 경종에게 말하기를, “연접(延接)할 때에 일거수일투족을 저들이 살피지 않는 것이 없으니, 저들을 수응(酬應)할 때에 소홀하게 대하지 마소서.” 하였다. 김재로가 칙사를 접대하는 절차를 아뢰고, 이어서 청하기를, “홀기(笏記)에 의해 전달할 뜻을 친히 하교하소서.” 하였다. 이건명 등이 또 청하기를, “다례(茶禮)와 연향(宴享)할 때에 친히 수저를 들고 젓수어서 저들이 보도록 하소서.” 하니, 경종이 알았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막상 칙사를 맞이한 경종이 지나치게 위축되어서 아무런 말도 한마디 하지 못하고 침묵하였으며, 통사(通事)가 왕복할 때에 겨우 홀기(笏記)에 적힌 글을 몇 마디 읽어서 말을 전했을 뿐이다. 우울증을 앓던 경종이 사람을 만나는 것을 기피하는 현상을 나타내자, 실권을 잡은 노론은 비록 경종이 왕이 되었으나, 왕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왕의 자질을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1721년(경종 1) 2월에 좌의정 이건명(李健命)과 호조 판서 민진원(閔鎭遠)이 입대(入對)하여, 이건명이 아뢰기를, “청나라 칙사(勅使)가 호조에 청구한 인정 물품을 줄였다고 하여 화를 내고, 또 별도로 기증(寄贈)하는 물품을 얻고자 일부러 말썽을 부립니다.” 하였다. 인정 물품은 사신에게 인정으로 주는 뇌물을 말한다. 이에 노론의 대신 영의정 김창업과 좌의정 이건명이 호조 판서 민진원과 상의하여 은화(銀貨)를 주는 대신에 별도로 상칙사(上勅使)와 부칙사(副勅使)에게 각각 백금(白金) 1천 냥씩을 뇌물로 주어서, 칙사의 불평을 무마하였다. 특히 부칙사는 조선의 외교 문서를 담당하는 예부(禮部)의 대신이었으므로, 노론이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려고 먼저 청나라의 대신들에게 뇌물을 주었다고 소론이 의심하였다. 또 청나라 칙사가 돌아가기 전에 국왕의 동생 연잉군(延礽君)을 한번 만나보고자 하자, 소론파 우의정 조태구(趙泰耈)가 노론파 영의정 김창집과 좌의정 이건명을 공격하였는데, 노론의 대신들이 연잉군을 후사(後嗣)로 삼으려고 한다고 의심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김창집과 이건명이 연명하여 차자를 올려, 조태구의 소척(疏斥)에 대하여 변명하였다. 청나라 칙사가 돌아갈 때 외교 관례에 따라서 경종에게 칙사를 교외에까지 나가서 직접 전송하게 되었으나, 좌의정 이건명이 경종에게 이를 청하자, 경종이 청나라 사신을 무서워하여 ‘바람이 차가워서 나가기가 어렵다’고 사절하였다. 이것은 경종이 대인 기피증에 걸린 결과이다.
경종이 우울증이 더욱 심해져서 모든 국사는 내전의 인원대비(仁元大妃)가 도맡아서 처리하였다. 인원대비는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죽고 난 뒤에 숙종의 세번 째 왕비로 맞아들인 인원왕후(仁元王后) 김씨(金氏)인데, 서인의 대신 김주신(金柱臣)의 딸이었다. 김주신은 박세당(朴世堂)의 문인(門人)으로서 소론의 최석정, 노론의 김창협ㆍ서종태(徐宗泰)와 가깝게 지냈다. 그러나 영의정 김창업과 좌의정 이건명이 병중에 있는 김주신을 몰래 찾아가서, 경종의 정신 이상 증세가 점차 심해지고, 또 34세의 나이가 되도록 후사(後嗣)가 없다고 지적하고, 왕의 동생 연잉군(延礽君) 이금(李昑: 영조)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여 왕을 대리(代理)하여 국정을 다스리는 청정(聽政)을 할 수 밖에 없다고 간곡히 설득하였다. 국구(國舅) 김주신은 이를 고민하다가, 운명하기 직전에 딸 인원대비(仁元大妃)에게 똑똑한 연잉군을 왕세자로 책봉하고 대리 청정(聽政)하게 하는 것이 국가의 앞날을 위하여 좋을 것이라고 충고하고, 눈을 감았다. 김주신과 인원대비는 영조가 왕위에 오르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으므로, 영조가 왕위에 오른 뒤에 김주신의 사당에 예관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 주었다.
1721년(경종 1) 8월 20일 밤 2경(更)에 영의정 김창협과 좌의정 이건명이 빈청(賓廳)에 나가서 원임 대신(原任大臣)ㆍ육경(六卿)ㆍ삼사 장관(三司長官) 등을 불러서 회의를 열고, 연잉군(延礽君)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할 것을 청하였는데, 판부사 김우항(金宇杭), 예조 판서 송상기(宋相琦), 이조 판서 최석항(崔錫恒)은 소명(召命)을 어기고 나오지 않았다. 김창협ㆍ이건명이 판부사 조태채(趙泰采), 호조 판서 민진원(閔鎭遠), 공조 판서 이관명(李觀命), 병조 판서 이만성(李晩成), 형조 판서 이의현(李宜顯), 대사헌 홍계적(洪啓迪), 대사간 홍석보(洪錫輔) 등과 더불어 청대(請對)하니, 경종이 시민당(時敏堂)에서 대신들을 인견(引見)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성상께서 춘추가 한창 젊은데도 아직껏 후사가 없으시니, 주야로 걱정이 됩니다. 다만 사체가 지극히 중대하기 때문에 감히 앙청(仰請)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고, 이건명은 말하기를, “자성(慈聖: 인원대비)의 하교(下敎)에서 이르기를, ‘국사가 걱정이 되어 억지로 미음을 든다.’ 하였으니, 이 일은 일각이라도 늦출 수가 없으므로 신 등이 감히 깊은 밤중에 소대(召對)를 청한 것이니, 전하께서 빨리 대계(大計)를 정하소서.” 하였다. 여러 신하들도 차례로 연잉군을 왕세제로 삼도록 청하여 마지않았다. 그때 노론파 승지 조영복(趙榮福)이 나서서 말하기를, “대신들과 여러 신하들의 말은 모두 종사(宗社)의 대계(大計)를 위한 것이니, 청컨대 빨리 윤허하고 따르소서.” 하고, 거듭 재촉하자, 경종이 어쩔 줄 몰라서 안절부절 하다가 마지못하여 이르기를, “윤허하고 따르겠다.” 하였다.[『경종실록』 1년 8월 20일]
경종이 이를 대비에게 아뢰려고 한밤중에 대내(大內)로 들어가서, 오래도록 나오지 않았다. 새벽 5경(更)에 파루(罷漏) 종(鍾)이 울린 뒤에 경종이 대신들을 낙선당(樂善堂)에 불러서 보았다. 김창집이 묻기를, “벌써 자성(慈聖)께 품계(稟啓)하셨습니까.” 하니, 경종이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이건명이 말하기를, “반드시 자전(慈殿)의 수찰(手札)이 있어야만 거행할 수 있습니다.” 하자, 경종이 책상 위를 가리키면서 이르기를, “봉서(封書)는 여기 있다.” 하므로, 김창집이 받아서 봉투를 뜯었다. 피봉 안에는 종이 두 장이 들었는데, 한 장은 해서(楷書)로 ‘연잉군(延礽君)’이란 세 글자가 쓰여 있었고, 다른 한 장은 언문 교서(諺文敎書)였는데, 인원대비가 언문으로 쓰기를, “선대왕(先大王: 숙종)의 혈육으로는 다만 주상(主上)과 연잉군(延礽君) 뿐이니, 어찌 다른 뜻이 있을 수 있겠는가. 나의 뜻은 이러하니, 대신들에게 하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이를 읽어보고 눈물을 흘렸다. 이건명이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언문 교서를 해자(楷字)로 번역해서 승정원에 내리게 하고 승지로 하여금 전지(傳旨)를 쓰게 할 것을 청하니, 경종이 그렇게 하라고 명하였다. 승지 조영복이 탑전(榻前)에서 전지(傳旨)를 썼는데, 전지에 이르기를, “연잉군 이금(李昑)을 저사(儲嗣: 세자)로 삼는다.” 하였다. 이리하여 연잉군이 후사(後嗣)로 결정되었던 것이다.[『경종실록』 1년 8월 20일]
그 다음날 8월 21일에 예조에서 연잉군(延礽君)이 저사(儲嗣)로 정해졌으니, 궁궐 밖의 사저(私邸)에서 거처할 수 없다고 하여, 빨리 대궐 안에로 들어와 거처하게 할 것을 청하자, 경종이 연잉군을 대궐 안으로 들어와서 거처하게 하였다. 또 영의정 김창집과 좌의정 이건명이 말하기를, “연잉군의 위호(位號)를 마땅히 ‘왕세제(王世弟)’로 정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경종이 그 의논에 따라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또 왕세제의 학문과 수성(修省)을 위하여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을 설치하고, 노론의 영의정 김창집과 좌의정 이건명이 왕세제의 사부(師傅)를 맡고, 노론의 예조 판서 송상기(宋相琦)와 소론의 이조 판서 최석항(崔錫恒)을 좌우 빈객(賓客)으로, 노론의 공조 판서 이관명(李觀命)을 좌부빈객(左副賓客)으로, 소론의 병조 판서 이만성(李晩成)을 우부빈객(右副賓客)으로 각각 임명되었다. 그러나 소론은 세자시강원의 겸직에 부임하기를 거절하였으나, 소론의 온건파는 대안이 없었으므로, 왕세제 책봉까지는 어느 정도 용인하였다. 이때 소론의 대신 유봉휘(柳鳳輝)가 상소하여, 왕세제의 책봉이 사리에 합당하지 않다고 비판하였고, 또 소론의 우의정 조태구(趙泰耈)는 상소하여, 좌의정 이건명을 맹렬히 비난하였는데, 그 상소에서 이건명과 이이명의 조부 영의정 이경여(李敬輿)를 헐뜯었으므로, 좌의정 이건명과 우의정 조태구와 격렬하게 다투었다. 이에 경종이 놀라서 두 사람을 각각 불러서 위로하고 양쪽을 화해시키려고 애를 썼다.[『경종실록』 1년 8월 25일]
그해 10월에 노론의 사헌부 집의(執義) 조성복(趙聖復)이 처음으로 왕세제(王世弟)로 하여금 왕을 대리하여 정사를 듣는 청정(聽政)을 시행할 것을 청하자, 경종이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기를, “내가 이상한 병에 걸려서 십여 년 이래로 조금도 회복될 기미가 없으니, 만기(萬機)를 수응(酬應)하기가 진실로 어렵다. 내가 왕위에 오르고 나서부터 밤낮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요즘은 증세가 더욱 심하고 나빠져서, 만기를 수응하기도 어려워서 정사가 정체되는 것이 많다. 이제 왕세제는 젊고 영명(英明)하므로, 만약 청정(聽政)하게 하면, 내가 마음을 편히 하여 병을 조섭할 수가 있을 것이니, 대소의 국사(國事)를 모두 왕세제로 하여금 헤아려서 결단하게 하라.” 하였다. 소론의 승지 이기익(李箕翊)ㆍ남도규(南道揆)와 홍문관 응교 신절(申晢)ㆍ교리 이중협(李重協)이 왕세제에게 대리 청정하라는 명령을 거두도록 청하였고, 이 소식을 듣고, 의정부 좌참찬 최석항(崔錫恒)이 대궐로 달려와서, 청대(請對)하여 눈물을 흘리며 대리 정청을 거두도록 간청하였다. 이때 소론은 김창집ㆍ이건명 등을 비난하기를, “주상으로 하여금 정무에서 손을 놓게 만들려고, 승지 조성복을 사주하여 상소를 올려서 한번 시험해 보려고 한다.”고 공격하였다. 소론의 호조 판서 조태억(趙泰億) 등이 왕세제에게 대리 청정하라는 어명을 거도도록 경종에게 간청하였다. 이에 좌의정 이건명은 최석항의 청대(請對)를 막지 못한 해당 승지를 추고할 것을 청하였다.[『경종실록』 1년 10월 11일]
그해 10월 16일에 소론이 주도하여, 대소 관원들이 대궐의 뜰[庭]에 모여서 왕세제에게 대리 청정하라는 어명을 거두도록 청(請)하는 정청(庭請) 운동을 전개하고, 소론의 4대신 조태구(趙泰耈)ㆍ유봉휘(劉鳳輝)ㆍ이광좌(李光佐)ㆍ조태억(趙泰億) 등이 모두 합문(閤門) 밖에서 비답을 기다렸다. 마침내 밤이 깊어서 경종이 대리 정청을 취소할 수 없다는 비답을 내렸다. 노론의 4대신 김창집(金昌集)ㆍ이건명(李健命)ㆍ이이명(李頤命)ㆍ조태채(趙泰采)가 모여서 숙의한 다음에 2품 이상 대신과 삼사(三司)를 불러서 묻기를, “지금 성상의 비답에 ‘좌우의 측근들이 청정(聽政)하는 것이 옳겠는가, 왕세제가 청정(聽政)하는 것이 옳겠는가’라고까지 하교하였는데, 다시 간쟁(諫爭)하는 것이 옳겠는가. 정청(庭請)은 이제 중지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자, 정청에 참여한 이관명(李觀命)ㆍ민진원(閔鎭遠) 등의 노론의 온건파는 모두 승복하였으나, 최석항(崔錫恒)ㆍ이광좌(李光佐) 등 소론의 온거파는 불가하다고 주장하였다. 이광좌는 항의하는 목소리로 노론 4대신을 꾸짖기를, “이 일은 인신(人臣)의 분의(分義)로서 정청(庭請)을 그만둘 수 없다. 그런데 그대들은 오늘의 정청을 중지시키려고 하니, 신하의 절의(節義)를 다하였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자, 이건명이 화를 내어 이광좌를 꾸짖고 물러가라고 고함쳤다. 이건명과 이광좌는 여러 사람 앞에서 고성으로 서로 다투었다.
그해 10월 17일에 경종이 창경궁(昌慶宮)에 있었는데, 소론의 우의정 조태구(趙泰耈)는 병이 심하여 걸을 수가 없었으나, 견여(肩輿)를 타고 밤중에 창경궁의 선인문(宣仁門: 북문)으로 들어가서 비밀리 청대(請對)하고, 경종에게 눈물을 흘리고 간청하여 마침내 대리 청정하라는 어명을 거두도록 하였다. 이때 소론의 사직 이광좌 등은 금호문(金虎門: 서문)으로 들어가서 청대하려고 하였으나, 노론의 승지 홍계적(洪啓迪) 등이 이를 가로막아서 청대하지 못하였다. 경종이 조태구를 인견(引見)하고 대리 청정을 거두었다는 소문을 듣고, 노론의 승지들이 당황하였고 대궐의 안팎이 물 끓듯이 동요하였다. 그날 아침에 김창집이 이이명(李頤命)ㆍ이건명과 함께 비변사에서 예관(禮官)을 모아서, 왕세제가 대리 청정하는 절목(節目)을 논의하다가, 경종이 조태구의 간언에 따라 왕세제의 대리 청정을 거두었다는 말을 듣고, 노론의 대신 조태채(趙泰采)는 병을 핑계대고 집으로 돌아갔고, 노론의 대신 김창집ㆍ이이명ㆍ이건명 등은 크게 놀라고 당황하여 지름길로 내달려서 합문(閤門)에 이르렀다.
이윽고 노론과 소론의 2품 이상 대신과 삼사(三司)의 관료들이 잇따라 도착하여 아울러 청대(請對)하니, 경종이 진수당(進修堂)에 나아가서 인견하였다. 노론의 영의정 김창집이 말하기를, “어젯밤에 차마 듣지 못할 하교를 받들었습니다. 신 등이 힘써 간쟁(諫爭)하지 못한 죄는 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하였으나, 소론의 우의정 조태구는 말하기를, “오늘 천안(天顔)을 뵐 수 있으니,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오늘 갑자기 대신들이 정청(庭請)을 이미 정지했다는 말을 듣자, 신이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놀라움을 견디지 못하여, 사생(死生)을 걸고 감히 청대(請對)하여 천의(天意)를 돌이키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는 신 한 사람의 말이 아니라, 곧 온 나라 사람의 말입니다. 전하께서 비록 화열(火熱)의 병환으로 기무(機務)를 사양하려고 하지만, 화열이 오를 때는 잠시 정사의 결재를 정지하고 마음이 안정되기를 기다린다면, 저절로 생각이 맑아질 것입니다. 전하께서 어찌하여 생각이 이에 미치지 못하십니까. 국가는 전하의 국가가 아니라 곧 조종(祖宗)의 국가입니다. 대보(大寶)의 자리는 인군(人君)이 스스로 사사로이 하는 곳이 아닙니다.” 하였다. 이건명은 말하기를, “어젯밤의 전교는 전고(前古)에 듣지 못한 일이므로, 신은 곧장 땅을 뚫고 들어가려고 해도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2품 이상의 대신들을 모아서 물었으나, 말한 바가 각각 같지 아니하였으므로, 신 등이 반복해 생각했지만 어찌 할 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만약 성상께서 여러 신하들의 청을 굽어 따르시어 내리신 명령을 도로 거두신다면 어찌 큰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노론의 여러 신하들이 다시 서로 잇따라 힘써 간쟁(諫爭)하며 경종에게 비답을 내리기를 청하였으나, 경종이 끝내 비답하지 아니하였다.[『경종실록』 1년 10월 17일]
그해 10월 28일에 좌의정 이건명(李健命)은 주청사(奏請使)에 임명되어 청나라에 가서 왕세제의 책봉(冊封)을 청하게 되었다. 노론과 소론이 첨예하게 대립하여 싸우는 시기에 노론의 중심인물인 이건명이 조정을 비우는 것은 큰 잘못이었다. 아마도 청나라에서 왕세제를 책봉하면, 소론도 이에 승복하리라고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주청사 이건명은 부사(副使)윤양래(尹陽來)와 함께 청나라 연경(燕京)으로 떠났다. 당시 서울에서 동팔참(東八站)ㆍ요양(遼陽)을 거쳐 중국의 연경(燕京: 북경)까지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려면, 보통 4, 5개월이 걸렸는데, 그 사이에 소론의 급진강경파 준소(峻少) 계열의 김일경(金一鏡)ㆍ박필몽(朴弼夢) 등에 의하여 쿠테타가 일어나서 노론이 일망타진 되었던 것이다.
1663년(현종 4)에 이건명은 아버지 이민서(李敏敍)와 어머니 원주원씨(原州元氏) 사이에 2남 3녀 중에서 둘째 아들로서 서울에서 태어났다. 친조부는 영의정 이경여(李敬輿)이고, 외조부는 좌의정 원두표(元斗杓)이었으므로, 당대 최고의 명문 집안에서 태어났다. 형 이관명(李觀命)은 동생 이건명보다 두 살 위였으나, 동생 이건명이 1684년(숙종 10) 나이가 22세 때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는데, 형 이관명은 1687년(숙종 13) 나이가 27세 때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로 합격하였다.[『사마방목』] 또 동생 이건명이 1686년(숙종 12) 나이가 24세 때 알성(謁聖)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청요직(淸要職)에 진출하였으나, 형 이관명은 과거에 거듭 실패하고, 음서(蔭敍)로 진출하여 세자익위사 세마(洗馬)가 되었다. 1688년(숙종 14) 2월에 아버지 이민서(李敏敍)가 돌아가자, 3년 동안 이건명ㆍ이관명은 선영(先塋)에 여막(廬幕: 오두막집)을 짓고 함께 여묘살이를 하였다. 그 뒤에 형 이관명은 음직으로 공조 정랑(工曹正郞)과 함열 현감(咸悅縣監)을 지내다가, 1698년(숙종 24) 나이가 38세 때 겨우 알성(謁聖)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문과방목』] 그러므로 동생 이건명은 빨리 관계에 진출하여 출세가 빨랐으나, 형 이관명은 늦게 관계에 진출하여 출세가 비교적 늦었다.
이건명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하는 정성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친구와 친척와 복례(僕隷)에 이르기까지 각기 그 정의(情誼)를 다하였다. 문장(文章)과 필법(筆法)도 참으로 아름다웠는데, 이것들은 모두 이건명이 여사(餘事)로서 즐긴 것이다. 시문(詩文)에 능하였는데, 이건명이 정무(政務)에 바쁜 틈을 타서 여가(餘暇)에 지은 글들이 많았으나, 참화(慘禍)를 겪으면서 그 집안에서 간직한 글들이 거의 불태워 없어졌다. 그러나 그가 신원(伸寃)되고 복작(復爵)되자, 가까운 친구들과 후배들이 그의 흩어진 시(詩)와 소차(疏箚)와 기타 잡문(雜文)을 모아서 그의 문집 『한포재집(寒圃齋集)』 10권을 편집하여 1758년(영조 34)에 간행하였다. 그 뒤에 정조는 그의 문집에 실린 이건명의 시문(詩文)을 읽어보고 평하기를, “그가 시대를 가슴 아파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시문에 그대로 나타나 있어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한다.”고 하였다.[『홍재전서(弘齋全書)』 161권] 글씨는 송설체(松雪體)에 뛰어났다. 숙종의 묘지명(墓誌銘)을 짓고, 경종의 왕비 단의왕후(端懿王后) 심씨(沈氏)의 애책문(冊文)을 짓고, 대제학 송상기(宋相琦)가 지은 단의왕후의 시책문(諡冊文) 글씨를 썼다.
1720년(숙종 46) 6월 8일에 숙종이 승하(昇遐)하였다. 이날 밤 반함(飯含)할 때 광경을 소론의 사관이 몰래 기록하기를, “중궁(中宮: 인원왕후)이 원상(院相)들로 하여금 세자(世子: 경종)를 도와서 행례(行禮)하도록 명하였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손을 씻으려고 하니, 우의정 이건명(李健命)이 혼자 담당하겠다고 앞으로 나섰다. 이건명이 상례(喪禮)대로 인도하고 세자가 반함하는데, 세자가 숟가락을 잡고 쌀을 퍼서 넣을 때 손이 약간 떨렸다. 내시(內侍)가 붙잡자, 세자가 물리치고 석미(淅米: 깨끗이 씻은 쌀)와 실주(實珠: 맑은 진주)를 입에 넣었다. 세자가 반함을 끝마치자, 이건명의 안내를 받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영의정 김창집은 두 손을 마주잡고 상(床)의 남쪽에 가만히 서서 있었을 뿐이다. 반함은 대절(大節)이므로 내전(內殿)의 하교(下敎)가 있었던 것은 본래 세자의 너무 슬퍼하다가, 정신을 잃고 행동할까봐 염려했기 때문이다. 영의정 김창집은 처음에 손을 씻고 자기가 세자를 도와주려고 하였으나, 반함을 행할 때에, 세자가 내시(內侍)를 물리치고 조용히 예(禮)를 행하였지만, 끝내 김창집이 옆에서 도와주는 바가 없었다.” 하였다.[『숙종실록』 46년 6월 8일] 이로써 보면, 우의정 이건명이 혼자 나서서 숙종의 반함하는 의식을 집행할 만큼 영의정 김창집보다 적극적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건명이 주청사(奏請使)로 중국에 가지 않고 조정에 남아 있었다면, 준소(峻少) 계열의 김일경(金一鏡)과 박필몽(朴弼夢)의 쿠테타를 막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1722년(경종 2) 8월에 이건명은 죽음을 앞두고 전라도 흥양(興陽)의 나로도(羅老島)에서 친형 좌의정 이관명(李觀命)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녀를 부탁하기를, “오늘의 일이 조만간에 있을 줄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마침내 여기에 이르고 보니, 또한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우선 할아버지의 음덕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10대 후손까지 용서를 얻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 은덕을 입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면목이 없습니다. 불초(不肖)가 스스로 그 화(禍)의 기틀을 자취한 것이니, 그 누구를 원망하고 허물하겠습니까. 또 두 아들이 너무나 부족하고, 여러 손자들이 아직 어린 모습을 생각하면, 훗날의 바라는 바는 오직 형님에게 달려 있습니다. 다행히 잘 지도하고 가르쳐서 세대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여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사생(死生)의 즈음에 한번 서로 영결(永訣)할 인연조차 없으니, 끝내 눈을 감지 못할까봐 두렵습니다. 세상 천만가지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였다.[『한포재집』 10권-서(書)]
이건명이 유배지에서 죽음이 임박하자, 또 장남 이면지(李勉之)와 3남 이술지(李述之) 두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내가 불초(不肖)하여 조정에 벼슬한 지 거의 40년이 되었으나, 위로 군부(君父)에게 미쁨을 받지 못하고 아래로 동료들에게 믿음을 얻지 못하여, 마침내 죽음을 당하게 되었으니, 오히려 누구를 허물하겠는가. 너희들은 나를 경계로 삼아서 과거 시험에 마음을 두지 말라. 오직 책을 읽고 자기 몸을 신칙하는 데에만 힘쓰도록 하라. 손자들 가운데 혹 총명하여 과거를 못 보아서 애석하게 여길 만한 아이가 없지 않을 것이다. 밤낮으로 가르치고 경계하여 충효(忠孝)의 오래된 집안의 가풍(家風)을 실추하지 않도록 한다면, 내가 지하(地下)에서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 나머지 크고 작은 일들은 죽음이 임박하므로, 다 말하지 않겠다.” 하였다.[『한포재집』 10권-서(書)] 그러나 장남 이면지(李勉之)와 3남 이술지(李述之)도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심문을 받다가, 곤장을 맞고 죽었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묘소는 경기 파주군 교하(交河) 매곡(梅谷)에 있는데, 도곡(陶谷) 이의현(李宜顯)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도곡집(陶谷集)』 20권] 무덤은 처음에 파주 교하(交河)의 선영(先塋)에 있었는데, 1731년(영조 7)에 인조의 장릉(長陵)을 천장할 때 파주 매곡으로 옮기고, 두 부인을 나란히 합장하였다. 과천(果川)의 사충서원(四忠書院), 전라도 흥덕(興德)의 동산서원(東山書院), 나주의 서하사(西河祠), 옥구(沃溝) 삼현단(三賢壇)에 제향되었다. 전라도 고흥군 흥양(興陽: 남양면)에 이건명의 유허비(遺墟碑)가 세워져 있는데, 1768년(영조44)에 역천(櫟泉) 송명흠(宋明欽)이 이건명의 유배지에 세운 것이다.[『역천집』 15권] 비문의 제목은 「한포재 이건명의 적소(謫所) 유허비[寒圃齋李公謫廬遺墟碑]」이다.
1725년(영조 1)에 영조가 즉위하자, 이건명은 신원되고 충민(忠愍)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때 과천에 사충서원(四忠書院)을 세우고, 충민공(忠愍公) 이건명(李健命),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 충문공(忠文公) 이이명(李頤命), 충익공(忠翼公) 조태채(趙泰采)를 제향하였으나, 1727년(영조 3)에 소론 이광좌(李光佐) 등이 집권하자, 시호를 회수하고 사충서원을 철폐하였다. 1755년(영조 31)에 노론의 정권이 확립되자, 다시 시호를 내려주고, 사충서원을 중건하여, 노론 4대신을 제향하였다. 중건된 사충서원에는 이건명을 비롯한 노론 4대신을 각각 그린 화상(畵像)이 있고, 1786년(정조 10)에 사액(賜額)하여, 노비와 토지를 내려 주었다. 1781년(정조 5) 1월에 정조가 영조의 장릉(長陵)에 거둥하여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는데, 영조가 왕세제(王世弟)에 책봉된 지 60돌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그때 정조는 왕세제 책봉을 추진하여 영조를 옹립한 노론의 4대신 이건명ㆍ김창집ㆍ이이명ㆍ조태채의 충성을 추념(追念)하여, 승지를 보내어 과천의 사충사(四忠祠)에 치제하였다.[『국조보감』 70권]
첫째부인 광산김씨(光山金氏)는 승지 김만균(金萬均)의 딸인데, 일찍이 돌아가서 자녀가 없다. 둘째부인 안동김씨(安東金氏)는 군수 김수빈(金壽賓)의 딸인데,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장남 이면지(李勉之)는 생원(生員)이고, 차남은 이성지(李性之)이고, 3남은 이술지(李述之)인데, 차남 이성지는 17세의 나이로 병사(病死)하고, 장남 이면지와 3남 이술지는 <신임옥사(辛壬獄事)>에 연루되어 옥중(獄中)에서 심문을 받다가 죽었으나, 나중에 신원(伸寃)되고, 두 사람 모두 사헌부 지평(持平)에 추증(追贈)되었다. 장녀는 판관(判官)김희경(金喜慶)의 처가 되었고, 차녀는 좌랑(佐郞) 홍경보(洪鏡輔)의 처가 되었다. 측실에서 2녀를 두었는데, 서출 1녀는 구태훈(具泰勳)의 처가 되었고, 서출 2녀는 구홍준(具弘柱)의 처가 되었다. 맏손자 이복상(李復祥: 이면지 아들)은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大司諫)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