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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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경(金之慶)

서지사항
항목명김지경(金之慶)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인물
유형문신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총론]
[1419년(세종 1)∼1485년(성종 16) = 67세]. 조선 전기 세종(世宗)~성종(成宗) 때의 문신.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 등을 지냈다. 자는 유후(裕後)이고, 호는 송파(松坡)이며, 시호는 경질(敬質)이다. 본관은 선산(善山)이고, 거주지는 선산과 서울이다. 아버지는 덕산현감(德山縣監) 김지(金地)이고, 어머니는 오씨(吳氏)이다. 할아버지는 문경현감(聞慶縣監)을 지낸 김양보(金揚普)이며, 증조할아버지는 고려 때 예의사(禮儀司) 판서(判書)를 지낸 김주(金澍)이다. 사간원 헌납(獻納) 김성경(金成慶)의 형이자, 형조 정랑(正郞) 김세효(金世孝)의 조부이기도 하다. 『세종실록(世宗實錄)』부터 『예종실록(睿宗實錄)』까지 5대의 실록을 편찬하는 데 참여하였고, 대간으로서 재상을 파면할 정도로 강직하였다.

[세종~단종 시대 활동]
1439년(세종 21) 친시(親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1세였다. 처음에 교서관(校書館) 교감(校勘)에 보임되었다가, 1440년(세종 22) 집현전(集賢殿) 정자(正字)가 되었고, 1442년(세종 24) 집현전 저작랑(著作郞)으로 승진하였으며,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을 거쳐 예문관 봉교(奉敎)로 승진하였다.[『성종실록』 16년 7월 8일] 청요직(淸要職)에 올라 사헌부 감찰(監察)에 임명되었다가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옮겼고, 이조 좌랑(佐郞)과 이조 정랑(正郞)을 거쳐,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 이때 김지경은 세종에게 여러 번의 상소를 올려 환관을 군(君)으로 봉하는 폐단을 없앴으며, 이어 의정부 검상(檢詳)으로 옮겼다.[『성종실록』 16년 7월 8일]

1450년(문종 즉위년) 2월 세종이 세상을 떠나고 문종(文宗)이 즉위하자, 성균관(成均館) 사예(司藝)에 임명되어 『세종실록』 편찬에 기주관(記註官)으로 참여하였다.[『문종실록』 즉위년 9월 7일] 1452년(단종 즉위년) 12세의 단종이 즉위하자, 1453년(단종 1)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다가 경창부(慶昌府) 소윤(少尹)으로 옮겼다.[『단종실록』 1년 11월 21일],[『단종실록』 1년 12월 8일] 1454년(단종 2) 사간원 지사(知事)을 거쳐 집현전 직제학(直提學)으로 옮겼는데, 항상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단종실록』 2년 8월 8일] 이때 『문종실록(文宗實錄)』 편찬에 기주관으로 참여하였다.[『문종실록』 부록 편수관명단]

[세조~예종 시대 활동]
1455년(세조 1) 윤 6월 세조(世祖)는 15세의 단종을 영월(寧越)로 유배 보내고 임금이 된 후 다수의 관료들을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봉하여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이때 김지경은 좌익(佐翼)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봉해졌다.[『세조실록』 1년 12월 27일] 1456년(세조 2) 집현전에서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의 <사육신(死六臣) 사건>이 일어나면서 집현전이 폐지되었다. 1457년(세조 3)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우보덕(右輔德)에 임명되면서 세자 도원군(桃源君 : 성종의 아버지)을 가르쳤으나, 그해 도원군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세조는 제 2왕자 해양대군(海陽大君 : 예종)을 세자에 책봉하였다.[『세조실록』 3년 6월 27일],[『세조실록』 3년 9월 2일],[『세조실록』 3년 11월 10일]

이때 경상도 순흥(順興)에 유배되었던 세종의 제 6왕자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단종을 복위하기 위하여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다가, 순흥 관노의 고발에 의하여 발각되었다. 이에 김지경은 윤자(尹慈)와 함께 예천·순흥으로 파견되어 모반 사실을 조사하여 보고하였다.[『세조실록』 3년 6월 27일] 이후 김지경은 조정의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고향 가까운 고을로 나가서 늙은 어버이를 봉양하겠다는 구실을 내세우며 외직을 자원하여 성주목사(星州牧使)로 나갔다.

1463년(세조 9) 『국조보감(國朝寶鑑)』을 편찬하는 데에 참여하여 가자(加資)되고, 사헌부 집의(執義)에 임명되었다.[『세조실록』 4년 1월 4일],[『세조실록』 9년 2월 24일] 1465년(세조 11)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었다가, 중추부(中樞府) 첨지사(僉知事)가 되었다.[『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권18 「김지경(金之慶)」] 또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나갔다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서, 1467년(세조 13)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다.[『세조실록』 11년 7월 3일],[『세조실록』 13년 8월 14일] 이때 김지경은 사헌부 대사헌 양성지(梁誠之)와 함께 “유자광(柳子光)은 서자인데, 병조 정랑에 임명된 것은 잘못이니, 신 등은 바꾸어 임명하도록 청하는 바입니다” 라고 상소하였다. 이에 세조가 불러서 화를 내며 “이것은 특별한 나의 은전인데, 경들이 세종 때의 일을 들먹이면서 나를 곤혹스럽게 하는가” 하였다.[『세조실록』 13년 9월 28일] 1468년(세조 14)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나갔다.[『세조실록』 14년 1월 10일]

[예종~성종 시대 활동]
1469년(예종 1) 예문관 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어, 『세조실록(世祖實祿)』 편찬에 수찬관(修撰官)으로 참여하였다. 또 이조 참의(參議)가 되었다가 성절사(聖節使)에 임명되어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가게 되었다. 이때 이조 판서 홍응(洪應)과 이조 참판(參判) 이형(李衡) 등이 아뢰기를, “구례에는 본조의 이조 참의는 체직(遞職)될 때에 반드시 가자(加資)하였는데, 이제 이조 참의 김지경이 성절사 중국에 가니, 품계를 더해 주소서”라고 하니, 예종(睿宗)이 붕당(朋黨)을 위하여 이조에서 사사로이 가자(加資)하기를 청한다며 이조 판서 홍응·이조 참판 이형·이조 정랑 허선(許譔) 등을 파직하고 김지경의 고신(告身)을 거두었다.[『예종실록』 1년 8월 7일],[『예종실록』 1년 8월 14일] 이에 김지경은 파직되어 고향 선산으로 돌아갔다.

그해 11월 예종이 세상을 떠나고 14세의 어린 성종이 즉위하였으며, 이듬해인 1470년(성종 1) 김지경은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 예문관 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었다.[『성종실록』 1년 4월 26일] 이어 1471년(성종 2)에는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에 특별히 승품(陞品)되고,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다.[『성종실록』 2년 10월 23일] 이때 김지경은 성준(成俊)과 함께 좌의정 김국광(金國光)의 탐오(貪汚)와 임금을 속인 일들을 탄핵하여 재상의 자리에서 쫓아냈다.[『성종실록』 2년 11월 21일] 1472년(성종 3) 『예종실록』 편찬에 편수관으로 참여하였고, 공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중추부 지사를 거쳐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나갔다.[『성종실록』 3년 6월 22일],[『성종실록』 3년 6월 29일] 이곳에서 전라도 지방의 감초(甘草) 등 약초 재배를 체계적으로 관리하였고, 세곡(稅穀)을 서울로 운송하는 대책도 강구하였다. 1473년(성종 4) 호조 참판에 임명되었으며, 1474년(성종 5) 호조 참판으로서 성절사에 임명되어 표문(表文)을 받들고 명나라 북경에 다녀온 후 중추부 지사가 되었다.[『성종실록』 4년 8월 3일],[『성종실록』 5년 10월 15일],[『성종실록』 5년 10월 22일]

1475년(성종 6)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나가서 선정을 베풀어 유임되었는데, 3년 동안 성곽과 목책(木柵)을 보수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성종실록』 6년 8월 16일] 1477년(성종 8) 조정으로 들어와 중추부 동지사(同知事)가 되었으며, 1483년(성종 14) 상호군(上護軍)이 되어 대간(臺諫)의 우두머리에서 한직으로 물러났다.[『성종실록』 14년 12월 25일] 1484년(성종 15) 종2품상 가정대부(嘉靖大夫)로 승품되어,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에 임명되었다.[『성종실록』 15년 9월 3일] 1485년(성종 16) 병으로 사직한 후 부호군(副護軍)에 임명되어 한직에서 병을 치료하다가, 그해 7월 8일 서울 집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67세였다.[『성종실록』 16년 7월 8일]

[성품과 일화]
성품이 강직하고, 절개가 있었으며, 일을 할 때에는 실질적인 데에 힘쓰고 겉치레를 꾸미지 않아 사람들이 모두 그를 존경하고 중하게 여겼다. 그는 일을 처리할 때면 항상 상세하고 올바르게 하였으며, 관직에 있을 때에는 부지런하고 삼가면서 노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대간에 있을 때에는 큰일을 당하면 강개(慷慨)하여 감히 직언을 하였고, 조금도 사의(私意)를 두어 아첨하는 일이 없었다.[『성종실록』 16년 7월 8일]

1469년(예종 1) 8월 그가 이조 참의로 있다가 성절사에 임명되어 명나라 북경에 가게 되었을 때 이조 판서 홍응와 이조 참판 이형 등이 “구례에는 본조에서 이조 참의로 있다가 체직될 때에 반드시 가자하였는데, 지금 이조 참의 김지경이 성절사가 되어 중국의 서울에 가게 되니, 그에게 품계를 더해 주소서”라고 하였다. 20세의 예종은 붕당을 위하여 사사로이 가자를 청한다며 두세 번 이를 힐문(詰問)하고, 좌찬성 김국광(金國光)에게 “신하는 복덕(福德)을 마음대로 행사할 수 없는데, 홍응 등이 남에게 벼슬을 주려고 하니, 죄주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김국광 등은 반대하지 않고 “성상의 분부가 매우 마땅합니다”라고 하였다.[『예종실록』 1년 8월 7일]

그러나 김지경은 자신에게 아무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여 피혐(避嫌)하지 않았고, 젊은 예종은 화가 나서 홍응·이형을 비롯하여 허선·김여석(金礪石) 등을 파직하고, 김지경의 고신을 거두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사헌부에 전지(傳旨)하기를, “이조 참의 김지경은 홍응 등이 품계를 더하도록 계청(啓請)하였는데도 피혐하지 않았으니, 그가 몰래 청탁한 것이 틀림없다. 그를 추국(推鞫)하여 아뢰라” 하였다. 이에 사헌부에서 김지경을 잡아다가 곤장 30대를 때리고 심문하였으나, 김지경은 끝까지 자복(自服)하지 않았다. 그러자 사헌부에서 “김지경이 홍응과 이형에게 몰래 청탁하였을 것이니, 청컨대 홍응과 이형을 아울러 추핵하도록 하소서”라고 청하였다. 이때 나이 20세인 예종이 옥사를 명확하게 처리하는 슬기로움을 보여주었다. 예종은 “김지경은 법에 따라 물어야 하고 능욕하여서는 안 된다. 홍응과 이형 등은 정문(庭問 : 대궐 뒤뜰에서 임금이 죄인을 심문하는 것)할 것 없이 공함(公緘 : 공적으로 묻는 글)으로 묻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그리고 사헌부에게 김지경·홍응·이형 등을 국문하지 말고, 김지경의 고신을 돌려주게 하였다.[『예종실록』 1년 8월 7일],[『예종실록』 1년 8월 7일],[『예종실록』 1년 8월 10일],[『예종실록』 1년 8월 14일]

한편 사론(史論)에서는 그에 대하여 “김지경은 청렴하고 근신하여 스스로 자기 행실을 지키며, 구차스럽게 벼슬하면서 녹봉을 타먹는 데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는 파직당할 때마다 곧 고향 선산으로 돌아갔으나, 거의 누구를 원망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 때문에 죄를 얻으니 당시의 여론이 애석하게 여겼다”라고 하였다.[『예종실록』 1년 8월 14일]

[묘소와 후손]
시호는 경질이다. 묘소는 경상도 선산 동면(東面) 도개리(道開里)의 선영에 있는데, 묘표(墓表)가 남아있다.

부인 신천 강씨(信川康氏)는 영덕현령(盈德縣令) 강거례(康居禮)의 딸인데, 자녀는 2남 2녀를 낳았다. 장남 김응기(金應箕)는 문과에 급제하여 의정부 좌의정(左議政)을 지냈고, 차남 김응규(金應奎)는 향시(鄕試)에 세 번 장원하며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일찍 죽었다.[『추강집(秋江集)』] 장녀는 돈용교위(敦勇校尉) 최빈(崔彬)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예문관 검열 하윤(河潤)에게 시집갔다. 손자 김세효(金世孝)는 형조 정랑을 지냈다.[『국조인물고』 권18 「김지경」]

[참고문헌]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예종실록(睿宗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보감(國朝寶鑑)』
■ 『동문선(東文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추강집(秋江集)』

■ [집필자] 이현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