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 = ?]. 조선 초기 세종(世宗)~세조(世祖) 때의 문신. 중추원(中樞院) 첨지사(僉知事)와 형조 참의(參議) 등을 지냈다. 자는 회숙(晦叔)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김순생(金筍生)이다.
[세종~세조 시대 활동]
1441년(세종 23) 과거에서 생원(生員)으로 병과(丙科) 2위로 급제하였다.[『국조방목(國朝榜目)』] 1447년(세종 29)에는 승정원(承政院) 주서(注書)로서 도둑이 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흥천사(興天寺) 탑(塔)에 파견되었다. 흥천사 탑에는 보물을 많이 넣어두었고, 또 태조(太祖)가 직접 쓰던 물건도 들어 있었는데, 이때 도둑이 한창 성행하였기 때문이다.[『세종실록』 29년 5월 3일] 이어 1449년(세종 31)에는 사관(史官)의 일원으로 하위지(河緯地), 양성지(梁誠之) 등과 함께 『고려사(高麗史)』 개찬(改撰)에 대하여 논의하였다.[『세종실록』 31년 2월 5일] 문종(文宗) 대에는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에 임명되었으며,[『문종실록』 즉위년 8월 8일] 단종(端宗)이 즉위하자 사간원(司諫院) 우헌납(右獻納)에 제수되었다가 그해 7월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이 되었다.[『단종실록』 1년 1월 4일],[『단종실록』 1년 7월 1일]
[성품과 일화]
김계희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김종서(金宗瑞)와 가까이 지냈는데, 남에게 숨기는 속마음이 있고, 남에게 붙기를 잘한다는 평을 받았다. 형조의 도관좌랑(都官佐郞)이 되어서는 일의 가부(可否)를 결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번은 송사(訟事) 중이던 사람이 사헌부에 호소하기를, “방장(房掌)은 의심이 많고 변덕이 심하며, 대답하는 말은 온화하고 수월하나, 사리에 의거하여 바르게 분변하지 않으니, 판결이 날 기약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사람들은 김계희의 태도를 잘 설명한 것이라고 하였다.[『단종실록』 1년 9월 13일]
세조 때 나주목사(羅州牧使)를 역임하였는데, 정치를 잘 베풀고 크게 학교를 일으켰으므로, 그가 떠난 뒤에는 백성들이 그를 사모하였고, 그가 죽은 뒤에는 부모를 잃은 것 같이 슬퍼하였다. 이후 그를 위하여 보(寶)를 세워 매년 기일(忌日)에 고을 안의 모든 사람들이 모여 명륜당(明倫堂)에서 제사를 지냈다.[목민심서(牧民心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