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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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숙의(金引齡)

서지사항
항목명곽숙의(金引齡)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인물
유형문신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총론]
[?~? = ?]. 조선의 10대 왕인 연산군(燕山君)의 후궁. 본관은 현풍(玄風)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곽린(郭璘)이며, 어머니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권치중(權致中)의 딸이다.

[연산군의 후궁]
곽숙의(郭淑儀)는 연산군이 세자였던 1491년(성종 22) 간택을 통해 양원(良媛)에 봉해져 동궁전에 입궐하였다.[『성종실록』 22년 11월 4일] 입궐 전부터 혼담이 오가는 집안이 있었으나 성종(成宗)이 그녀에 대해 금혼령을 내리는 바람에 조정 대신들과 성종 사이에 이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성종실록』 22년 10월 16일],[『성종실록』 22년 10월 19일],[『성종실록』 22년 10월 20일],[『성종실록』 22년 10월 20일],[『성종실록』 22년 10월 21일] 그리고 이 논쟁 직후 곽숙의는 동궁전에 들어왔다.

1505년(연산군 11)에는 죄인 이유녕(李幼寧)의 집을 받았고,[『연산군일기』 11년 6월 27일] 이듬해인 1506년(연산군 12)에는 정세량(鄭世良)의 집을 사고자 하는 뜻을 보이자 연산군이 그 집을 시가(市價)에 준하여 아뢰라고 하였다.[『연산군일기』 12년 3월 5일]

그런 가운데 1506년(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곽숙의는 비구니로 출가하여 한양의 정업원(淨業院) 주지로 활동하였다.[『중종실록』 17년 3월 3일] 1519년(중종 14) 무렵까지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중종실록』 14년 12월 17일]

[묘소와 후손]
곽숙의의 묘는 어디 있는지 알려지지 않는다.

곽숙의는 연산군과의 사이에서 자녀가 없다.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 이미선, 「조선시대 후궁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2.
■ 황인규, 「조선전기 정업원과 비구니주지」, 『한국불교학』51, 2008.
■ 황인규, 「조선전기 후궁의 비구니 출가와 불교신행」, 『불교학보』57, 2011.
■ 지두환, 『연산군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8

■ [집필자] 홍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