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1455년(세조 1)∼1519년(중종 14) = 65세]. 조선 중기 성종(成宗)~중종(中宗) 때의 문신. 의정부 좌의정(左議政) 등을 지냈다. 자는 백춘(伯春) 또는 미수(眉叟), 백미(白眉)이고, 호는 병암(屛菴)이며, 시호는 문대(文戴)이다. 본관은 선산(善山)이고, 거주지는 서울과 춘천(春川)이다. 아버지는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을 지낸 김지경(金之慶)이고, 어머니 신천 강씨(信川康氏)는 영덕현감(盈德縣監) 강거례(康居禮)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덕산현감(德山縣監) 김지(金地)이며, 증조할아버지는 문경현감(聞慶縣監) 김양보(金揚普)이다. 고려를 섬긴 김주(金澍)의 현손이자, 좌의정 안당(安瑭)의 매부(妹夫)이기도 하다. 성리학의 원리와 천문⋅역법(曆法)⋅음악의 이론 등에 밝아서 ‘동방의 성인’이라고 일컬어 졌으나, 종중 때 조광조(趙光祖)의 사림파(士林派)에서 그를 대표적인 훈구파(勳舊波)로 간주하여 탄핵하였다.
1518년(중종 13) 중종은 김응기를 한직인 중추부 영사(領事)로 내보내고, 신용개를 좌의정으로, 안당(安瑭)을 우의정으로 임명하였다.[『중종실록』 13년 1월 5일] 안당은 이조 판서 때 조광조의 사림파를 대거 등용한 장본인으로 김응기의 처남이었다. 김응기는 평소 중풍을 앓았는데, 여기에 탄핵까지 당하자 지병이 악화되었다. 그리하여 그 뒤 1년이 지나도록 중병을 앓다가, 1519년(중종 14) 6월 서울 집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65세였다.[『중종실록』 14년 6월 9일]
[성품과 일화]
성품이 단정하고 근엄하며, 행동이 규율과 법도가 있었다.[『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권29] 그는 효도와 우애, 공순과 검소를 천성으로 타고났다. 말을 빨리 하거나 안색이 갑자기 변하지 않았으며, 구차스럽게 남에게 웃거나 말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독서를 좋아하여 잠자는 것과 밥 먹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학문은 근본 이치를 연구하였는데, 특히 심오한 성리학 이론에 정통하였으며, 천문⋅역법과 음악의 이론까지도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집에 있을 때에는 가산을 경영하지 않고 첩을 두지 않았으며, 벼슬할 때에는 밤낮으로 정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평생 정도(正道)를 지키고 청렴결백하게 살면서, 나라를 걱정하였다. 김응기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위로는 공경대부(公卿大夫)로부터 아래로는 일반 백성들에게 이르기까지 너나없이 애석해 하면서 말하기를, “착한 사람이 돌아갔다”라고 하였다.[『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권2 「김응기(金應箕)」]
1488년(성종 19) 5월 예조 정랑 김응기가 경연의 시독관(試讀官)을 겸임하고 있을 때였다. 성종이 경연에 나아가서, 김응기에게 명하여 동양 음악의 이론을 엮은 『율려신서』를 진강하게 하였다. 이때 성종은 동양 음악의 ‘격팔상생법(隔八相生法)’을 배우고자 하여 조강(朝講)이 파한 뒤에도 김응기만을 남게 하였다.[『국조보감(國朝寶鑑)』 권17] 김응기는 음악뿐만 아니라 천문 역법에도 정통하였는데, 그가 관상감 제조를 겸임하고 혜성을 관측하여 성종과 연산군에게 자세히 보고한 부분은 상당히 주목할 만하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상도 선산 동면(東面) 도개리(道開里)의 선영에 있는데, 저자 미상의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
첫째 부인 해평 김씨(海平金氏)는 전생서(典牲署)영(令) 김맹치(金孟恥)의 딸인데, 자녀는 1남을 낳았다. 둘째 부인 순흥 안씨(順興安氏)는 성균관 사예(司藝)안돈후(安敦厚)의 딸인데, 자녀가 없었다. 외아들 김세효(金世孝)는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에 합격하여 형조 정랑을 지냈다.[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