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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73년(성종 4)∼1533년(중종 28) = 61세]. 조선 중기 연산군(燕山君)~중종(中宗) 때의 문신이자 유학자. 형조 판서(判書) 등을 지냈다. 자는 공석(公碩)이고, 호는 십청헌(十淸軒), 또는 지비옹(知非翁)이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거주지는 서울과 충청도 충주이다. 아버지는 첨정(僉正) 김훈(金薰)이고, 어머니 진천 송씨(鎭川宋氏)는 군수(郡守) 송학(宋翯)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중추부(中樞府)지사(知事) 김영유(金永濡)이며, 증조할아버지는 한성부소윤(漢城府少尹) 김근(金根)이다.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연산군의 생모 윤씨(尹氏)를 재헌왕후(齋憲王后)로 책봉하고 종묘에 모시는 것을 반대하다가, 거제도(巨濟島)에 유배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반정 공신 박원종(朴元宗)이 무신 정권을 세우려고 하자 이를 저지하였고, <기묘사화(己卯士禍)> 직후에 조광조 일파를 구하려고 중종에게 직언(直言)하였다가 경기도 음죽현(陰竹縣) 유춘역(留春驛)에 장배(杖配)되었다. 만년에 고향 충주로 돌아와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연산군 시대 활동]
1495년(연산군 1)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로 합격하고, 이듬해인 1496년(연산군 2)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4세였다.[『방목(榜目)』] 처음에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로 옮겼다. 1498년(연산군 4) 홍문관(弘文館)정자(正字)가 되었으며, 1500년(연산군 6) 홍문관 박사(博士)를 거쳐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으로 승진하였다.[『연산군일기』 4년 8월 6일],[『연산군일기』 6년 4월 5일],[『연산군일기』 6년 4월 15일] 홍문관 정자 때부터 춘추관(春秋館)사관(史官)을 겸임하여,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하는 데에 기사관(記事官)으로 참여하였다. 그 뒤에 이조 좌랑(左郞)이 된 후 암행어사에 임명되어 함경도의 여러 고을을 염찰(廉察)하였다. 당시 이현보(李賢輔)가 영흥(永興)의 훈도(訓導)로 있었는데, 김세렴이 그를 만나본 후 사람 됨됨이를 알고 조정으로 돌아와 그를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으로 발탁하였다. 이현보는 훗날 유명한 재상이 되었다.
1504년(연산군 10)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다가 사헌부 집의(執義)로 승진하였는데, 임사홍(任士洪)에 의하여 연산군이 자기 생모가 페위된 전후 과정을 알고 윤비(尹妃)의 폐위와 관계된 대신들을 모두 잡아 죽였다. [『연산군일기』 10년 3월 13일] 이것이 갑자사화이다. 그때 연산군은 생모 윤씨를 재헌왕후(齊憲王后)로 책봉하고 종묘에 모시려고 하였는데, 홍문관·사헌부·사간원에서 그 추숭(追崇)을 반대하였다. 홍문관 부제학(副提學)권달수(權達手)가 발론(發論)하고, 사헌부 집의 김세필과 사간원 대사간 강형(姜詗) 등이 이를 적극 지지하였다. 이에 화가 난 연산군은 권달수와 강형을 사형에 처하고, 김세필은 귀양을 보냈는데, 처음에는 청풍(淸風)에 유배되었다가 나중에 거제도로 이배(移配)되었다.[『연산군일기』 10년 4월 1일] 그때 권달수의 부인 정씨(鄭氏)와 강형의 부인 김씨(金氏)는 각각 남편의 시신을 찾아 장례를 마친 다음, 음식을 먹지 않고 굶어죽었다.[『연산군일기』 10년 12월 2일]
1510년(중종 5)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는데, 그해 4월 17일 영의정 박원종이 세상을 떠났다.[『중종실록』 5년 1월 8일] 박원종은 무신(武臣)으로서 성희안(成希顔)과 손을 잡고 중종반정을 일으켰는데, 박원종 일파가 전횡하자 조정의 문신들이 크게 반발하였다. 박원종은 그의 심복 신윤무(辛允武)·박영문(朴永文)의 말을 듣고 조정의 문신들을 모조리 제거한 후 고려 때처럼 무인 정권을 수립하려고 하였으나, 처족 김세필이 이를 알고 적극적으로 만류하여 이를 막았다.[『중종실록』 1년 10월 27일] 영의정 박원종이 44세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나자, 신윤무·박영문도 처형되었으며 문신 중심의 문치 정치가 이루어졌다. 김세필의 역사적 평가는 중종 때 무인 정치를 막고 문치 정치를 이룩한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는 점이다. 그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하여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었다.[『중종실록』 5년 8월 19일] 이때 김세필이 건의하여, 문형을 지낸 자의 시문(詩文)을 모아 책으로 발간하였다.[『중종실록』 5년 12월 11일]
내직으로 들어와서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이조 참판(參判)이 되었다.[『십청헌집(十淸軒集)』 권4 「선생신도비명(先生神道碑銘)」 이하 「김세필비명」으로 약칭] 1519년(중종 14) 장례원(掌隷院) 판결사(判決使)를 거쳐 성균관 동지사에 임명되어, 조광조와 함께 성균관 유생들을 가르쳤다.[『중종실록』 14년 3월 22일],[『중종실록』 14년 4월 28일] 이때 중종이 장차 『성리대전(性理大全)』을 강독하려고 승정원에 명하여 주자(朱子)의 『성리대전』을 진강할 수 있는 사람을 선발하게 하였는데, 승정원에서 김세필·조광조·김안국 등 21명을 뽑아 보고하였다.[『중종실록』 14년 5월 17일] 그해 10월 정조사(正朝使)에 임명되어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갔다가 다음해 3월에 돌아왔는데, 그 사이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서, 훈구파(勳舊派)의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이 조광조·김정(金淨)·김식(金湜) 등 신진 사림파(新進士林派 )18명을 일망타진하였다.[『중종실록』 14년 10월 13일],[『중종실록』 15년 3월 20일] 요동(遼東)에서 이 소식을 들은 김세필은 조광조와 같은 훌륭한 인재를 제거하는 것은 나라의 큰 손실이라며 개탄하였다.[「김세필비명」]
그해 4월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특진관(特進官)이 되었는데, 그해 9월 경연(經筵)에서 『논어(論語)』를 진강할 때 중종에게 조광조 등 신진 사림파를 제거한 잘못을 과감하게 지적하고, 임금에게 그 잘못을 고치도록 직언하였다.[『중종실록』 15년 4월 23일],[『중종실록』 15년 9월 13일] 이에 좌의정 남곤 등이 그를 탄핵하고, 양사(兩司)에서 추국하기를 청하여, 혹독한 심문을 받은 후 경기도 음죽현(陰竹縣) 유춘역(留春驛)으로 장배(杖配)되었다.[『중종실록』 15년 9월 17일],[『중종실록』 15년 9월 18일],[『중종실록』 15년 9월 21일],[『중종실록』 15년 9월 23일] 1522년(중종 17) 유배에서 풀려나 중추부(中樞府)의 한직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 충주 도관원리(都官院里)로 돌아왔다. 그리고 조광조·김정·김식 등 젊은 후배 신진 사류(士類)를 지켜주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두문불출하면서 고향 충주 도관원리에 ‘십청헌(十淸軒 : 열 번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집)’이라는 서실(書室)을 짓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1533년(중종 28) 충주의 고향집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61세였다. 저서로는 『십청헌집(十淸軒集)』 4권이 남아 있다.
[기묘사화와 김세필]
1519년(중종 14) 9월 김세필은 정조사에 임명되어, 황제에게 신년 하례를 드리려고 명나라 북경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요동에 이르러 기묘사화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보다 앞서 이자(李耔)와 한충(韓忠)이 정사(正使) 남곤과 함께 중국 북경에 사신으로 갔을 때 남곤이 병이 나서 매우 위중하였다. 그때 한충이 말하기를, “이 놈이 죽지 않으면, 반드시 우리들 신진 사류들을 다 없앨 것이다” 하였으나 이자가 눈짓하여 한충을 말리고 정사 남곤을 구료(救療)하여 목숨을 건졌다. 이때에 이르러 기묘사화가 일어났는데, 과연 남곤과 심정이 한 짓이었다. 김세필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남곤·심정이 과연 신진 사류를 다 없애버렸다. 조광조가 무슨 죄가 있는가”라고 한탄하였다.
1520년(중종 15) 8월 특진관에 임명되어 경연에 참석하였는데, 그해 9월 경연에서 『논어』를 강독하다가 공자의 ‘잘못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말라’는 대목에 이르렀다. 김세필이 진언하기를 “전하께서도 잘못이 있습니다. 지난번에 조광조 등이 요순(堯舜) 시대의 이상 정치를 본뜨려고 하자, 전하께서 그를 존중하고 총애하여 신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신진 사류들이 갑자기 낡은 것을 고쳐서 새롭게 개혁하려고 서둘다가 조금 과격한 잘못이 있었으나, 그때 전하께서 재량하여 그들을 적당히 처벌하였다면, 반드시 개혁의 보람이 있었을 터인데, 도리어 그들을 귀양 보냈다가 죽여 버렸으니, 이것은 전하의 잘못이 큰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잘못을 알고 빨리 고치면 곧 잘못이 없어질 것이나, 잘못하고도 고치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잘못이 될 것입니다” 하고 눈물이 흘렀다.[「김세필비명」]
경연에서 물러 나오자, 죄의정 남곤이 조정의 백관들을 거느리고 합사(合辭)하여 아뢰기를, “듣건대, 경연의 자리에서 재상 한 사람이 조광조가 죄를 받은 것을 말하였다고 하니, 그를 추국하여 죄를 다스리도록 하소서” 하였다. 그리고 사헌부 대사헌 홍숙(洪淑)과 사간원 대사간 조방언(趙邦彦) 등이 김세필을 잡아다가 국문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김세필은 체포되어 혹독한 심문을 당하였다. 의금부(義禁府)에서 그의 죄를 법률에 따라서 조율(調律)하기를, “조정에서 조광조의 죄상을 이미 율문(律文)에 따라 처벌하였는데, 김세필이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그에 대한 시비를 하였으니, 그 죄는 사형에 해당합니다” 하였다. 중종이 특별히 용서하여 장형만을 집행하고 충청도 음죽현 유춘역에 유배하였다. 김세필이 경연에서 진언할 때에 상진(尙震)이 예문관 검열(檢閱)로서 그 자리에 입시(入侍)하였다가 물러 나와서 탄복하며 말하기를, “오늘 비로소 곧은 말을 들었다” 하였다가, 남곤·심정의 훈구파에서 이를 듣고 노하여 그 역시 탄핵하였다.[「김세필비명」]
1522년(중종 17) 김세필은 사유(赦宥)를 받아, 고향 충주 도관원리의 지비천(知非川) 가에 우거(寓居)하였는데, 이때 스스로 호를 지비옹(知非翁)이라고 일컬었다. 뒤에 중종이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사림파를 용서하자, 조정에서 김세필을 중추부의 벼슬에 임명하였으나, 서울에 올라가서 임금에게 사은(謝恩)하고 곧 고향 충주로 돌아와서 생애를 마쳤다. 그는 조광조의 사림파에 속하지는 않았으나, 정광필·안당(安瑭)처럼 기묘사화 때 나라에서 조광조·김정·김식 등 젊은 인재를 죽인 것을 매우 부끄럽게 여겼던 것이다.
[성품과 일화]
김세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이 매우 고상한데다가 평소 인격 수양이 많았다. 학문은 유학의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중요시하고, 문장은 화려하게 꾸미는 것을 싫어하였다. 집에 있을 때에는 어버이에게 효성을 다하고 형들에게 공경을 다하였다. 조상에게 제사할 때에는 정성을 다하고 제자들을 가르칠 때에는 한결같이 예법대로 행하였다. 관직을 맡아 일을 처리할 때에는 청렴결백하고 정직하였으며, 더욱이 도덕으로써 사람들을 깨우쳐서 일을 성취하게 하였으므로, 항상 신진 사류들의 존경을 받았다.
1490년(성종 21) 성종(成宗)이 성균관에 거둥하여 문묘(文廟)에 배향하고 20세 이하의 성균관 유생(儒生)과 4부 학당(學堂)의 생도(生徒)들을 성균관에 모아 시문의 제술을 시험 보았는데, 그때 18세의 학당 생도 김세필이 1등 장원을 차지하였다. 성종이 기특하게 여겨 특별히 불러서 따로 제목을 내고 운(韻)을 부르니, 김세필이 나는 듯이 붓을 움직여 글을 완성하였다. 성종이 글을 읽어보고 감탄하여 상사(賞賜)를 많이 내려 주었다. 1495년(연산군 1) 김세필은 나이 23세 때 사마시 생원과에 합격하였는데, 그때 이현보도 같이 생원과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잘 알지 못하였던 것 같다. 김세필은 나이 24세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우현보는 32세에 문과 급제하였고, 배경이 없었으므로 멀리 함경도 영흥(永興)의 훈도(訓導)로 나가 있었다. 김세필은 이조 좌랑이었을 때 암행어사에 임명되어 함경도의 여러 고을을 염찰하다가, 이현보를 만나보고 조정으로 돌아와서 그를 사간원 정언으로 발탁하였다. 이때부터 김세필과 이현보의 교우 관계가 계속되었다.
1506년(중종 1) 김세필이 성균관 전한으로 있을 때 경연에 나아가서 항상 진강하였다. 진강할 때가 되면, 경연의 서책을 맡아보는 서리(胥吏)가 반드시 진강할 책의 글을 먼저 초록(抄錄)하여 보냈다. 그러면 진강관(進講官)은 그 글의 구두와 글의 뜻을 완전히 익힌 다음에 경연에 들어갔다. 하루는 서리가 책의 다른 부분을 잘못 뽑아서 보내왔는데, 김세필과 동료들이 강연(講筵)에 들어가니, 미리 익힌 글이 아닌데다가 마침 글이 어렵고 그 뜻이 난해하였다. 동료들은 책을 펴고 어찌할 줄을 몰라 실색(失色)하였으나, 김세필은 얼른 글을 읽어 내려가면서 시원하게 글의 뜻을 해석하고 조금도 막히는 데가 없었다. 왜냐하면 평소 김세필은 경전과 사서(史書)를 널리 읽고 두루 공부하여 처음 보는 글이 없었기 때문이다.[「김세필비명」]
1517년(중종 12) 김세필이 광주목사(廣州牧師)로 있을 때의 일이었다. 중종이 경연에서 『역학계몽(易學啓蒙)』을 강독하다가 난해한 부문이 있었으나, 경연관(經筵官) 가운데 아무도 이를 알지 못하였다. 중종이 누가 이를 잘 아는지 물으니, 경연관 가운데 김세필이라고 대답하는 자가 있었다. 중종이 바로 광주목사 김세필에게 명령하여 역마(驛馬)를 타고 조정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임금이 소대(召對)하자, 김세필은 말을 달려 궁중으로 들어가서 『역학계몽』의 난해한 대목을 유창하게 읽고 명쾌하게 해석하였으므로, 중종이 김세필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였다. 1519년(중종 14) 5월 승정원에서 중종의 명령을 받고 주자의 『성리대전』을 진강할 만한 유신(儒臣)을 선발하여 21명을 보고하였을 때 그 가운데 김세필도 포함되어 있었다.
1513년(중종 8) 김세필이 전라도관찰사로 있다가 어머니의 병을 구료하기 위하여 사직하니, 중종이 체직시키도록 명하였다. 그때 반대파 사관(史官)이 논평하기를, “김세필은 본래 까다롭게 살피는 성질이므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 아주 꼼꼼하였는데, 전라도 지방에 있을 때 선정(善政)을 베풀려고 힘썼으나 재능이 이에 미치지 못하여, 처리할 문서가 책상 위에 가득히 쌓여도 이를 결재하지 못하였다. 비록 어머니의 병을 핑계하고 사직하였으나, 사실은 감사의 소임을 감당하지 못하여 물러난 것이다.”고 하였다.[『중종실록』 8년 4월 23일]이와 다른 기록도 있다. 1517년(중종 12) 김세필이 광주목사로 있을 때 중종이 이조에 명하여 지방 수령관 중에 청렴결백하고 지방 행정을 가장 잘 다스리는 사람을 조사하여 보고하게 하였다. 이에 이조에서 김세필과 정성근(鄭誠謹)을 선발하여 보고하였는데, 이를 보면 김세필이 뛰어난 관리의 재능[吏才]을 갖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간이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에 있는데,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이 남아있다.[「김세필비명」] 뒤에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충주의 팔봉서원(八峰書院)에 제향되었다. 팔봉서원은 선조(宣祖) 때 세우고 현종(顯宗) 때 사액(賜額)하였는데, 김세필을 비롯하여 이자·이연경(李延慶)·노수신(盧守愼)이 함께 배향되었다.
부인 고성 이씨(固城李氏)는 부사(府使)이탁(李鐸)의 딸인데, 자녀는 3남 3녀를 낳았다. 장남은 김숙(金䃤)이고, 차남 김구(金㘗)는 참봉(參奉)을 지냈으며, 3남 김저(金䃴)는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을 지내다가,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참화(慘禍)를 당하였다. 딸들은 생원(生員) 양의(楊誼), 만호(萬戶) 최필신(崔弼臣), 생원 이지(李贄)에게 각각 시집갔다.[「김세필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