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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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렴(金世濂)

서지사항
항목명김세렴(金世濂)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인물
유형문신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총론]
[1593년(선조 26)∼1646년(인조 24) = 54세]. 조선 중기 광해군(光海君)~인조(仁祖) 때의 문신. 호조 판서(判書)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 등을 지냈다. 자는 도원(道源) 또는 도렴(道濂)이고, 호는 동명(東溟)이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본관은 선산(善山)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통천군수(通川郡守) 김극건(金克鍵)이고, 어머니 양천 허씨(陽川許氏)는 홍문관(弘文館) 전한(典翰)허봉(許篈)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동인(東人)의 수장인 김효원(金孝元)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영유현령(永柔縣令)을 지낸 김홍우(金弘遇)이다. 외갓집의 허봉(許篈)·허균(許筠) 형제의 문장을 그대로 전수 받았다. 인조가 경연(經筵)에서 가르침을 받은 ‘진유(眞儒)’이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15년(광해군 7) 사마시(司馬試)의 생원(生員)진사(進士) 양시(兩試)에 합격하였고, 이듬해인 1616년(광해군 8) 증광(增廣) 문과(文科)에 갑과 1등 장원으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4세였다.[『방목(榜目)』],[『광해군일기』 8년 4월 5일] 모친상을 당하여 3년간 과거를 보지 못하다가, 상례가 끝나자마자 바로 사마 양시에 합격하고 이어 대과(大科)에 장원은 한 것이었으므로 천재라는 소문이 났다.

6품의 예조 좌랑(左郞)에 임명되어,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사서(司書)를 겸임하였고, 이윽고 홍문관 수찬(修撰)이 되어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광해군일기』 8년 4월 12일],[『광해군일기』 8년 8월 19일],[『광해군일기』 8년 9월 5일] 1617년(광해군 9)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는데, 바로 그때 대북파(大北派)가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廢位)하자는 의논을 일으켰다.[『광해군일기』 9년 11월 13일] 김세렴은 동인 가문 출신이었으나, 대북파의 폐모론(廢母論)을 배척하고 그들을 탄핵하다가 평안도 곽산(郭山)으로 귀양을 갔다.[『광해군일기』 9년 11월 23일] 그리고 1년 뒤에 강릉(江陵)으로 옮겼으며, 또 1년 뒤에 귀양에서 풀려나서 종편(從便 : 편리한 대로 거주함)되었다.[『광해군일기』 11년 5월 14일],[『기언(記言)』 권16 「호조판서김공신도비명(戶曹判書金公神道碑銘)」 이하 「김세렴비명」으로 약칭] 이후 광해군 말년 5년 동안 조용히 은거하면서 학문에 몰두하였다.

[인조 시대 활동]
1623년 3월 서인(西人)의 주도로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다시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었다가 사간원 헌납(獻納)으로 승진되었고, 홍문관 교리(校理)로 옮겼다. 1624년(인조 2) 암행어사에 임명되어, 충청도 지방을 염찰(廉察)하였다. 부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상기를 마치고 나서 다시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었다가, 사간부 헌납으로 옮겼다.[『인조실록』 4년 6월 14일],[『인조실록』 4년 9월 11일] 그때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63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발발하면서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하고,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전주(全州)로 가서 전란에 대비하였는데, 체찰사(體察使)이원익(李元翼)이 왕세자를 수행하여 전주로 가자, 김세렴은 그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그때 김세렴은 군중(軍中)에 있다가 조모의 상을 당하여 체찰부(體察府)에서 타던 말을 타고 황급히 집으로 돌아갔는데, 현직 관리가 분상(奔喪)할 때에는 역마(驛馬)를 타지 못하는 법을 어겼다고 하여 지탄을 받았다. 이에 그는 벼슬을 사양하고, 병을 핑계로 집으로 돌아왔다. 조정에서 세 번이나 그를 부르자 결국 출사(出仕)한 후 여러 번 옮긴 끝에 의정부(議政府) 사인(舍人)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암행어사가 되어, 전라도 지방을 염찰하고 임금에게 보고한 후 여러 폐단을 없앴다.

홍문관 부응교(副應敎) 시절 인조가 생부 정원군(定遠君)을 원종(元宗)으로 추존(追尊)하려고 하자, 여러 동료들과 함께 불가하다며 이를 반대하였다.[『인조실록』 9년 4월 23일] 사헌부 집의(執義)로 옮긴 후에는 인조의 반정 공신(反正功臣) 이귀(李貴)가 자천(自薦)을 통해 이조 판서가 되자, 이를 배척하고 탄핵하다가 오히려 현풍현감(玄風縣監)으로 좌천되었다.[『인조실록』 9년 윤11월 21일],[『인조실록』 9년 윤11월 23일] 이후 그는 현풍현감으로서 학규(學規)를 세우고 향약(鄕約)을 수정하는 등 선정(善政)을 베풀다가, 1635년(인조 13) 병으로 사직하니, 고을 사람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워 그의 은덕을 기렸다. 1636년(인조 14) 일본 통신사(通信使)의 부사(副使)로 임명되어 일본 에도[江戶]에 가서 관백(關白)과 만나 학문과 제도를 논하였다. 이후 그는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기록을 『동사록(東槎錄)』으로 남겼다.[『인조실록』 15년 3월 9일]

일본에 통신사로 갔다가 돌아오니, 인조가 <병자호란(丙子胡亂)>을 치루고 막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서울로 돌아왔으므로, 그는 사간원 사간(司諫)에 임명되었다가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나갔다.[『인조실록』 15년 윤4월 3일],[『인조실록』 15년 6월 4일] 1637년(인조 15)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고 병조 참의(參議)와 형조 참의를 역임하였으며, 1639년(인조 17) 이조 참의를 거쳐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었다.[『인조실록』 17년 1월 29일],[『인조실록』 17년 11월 13일] 그러다가 1641년(인조 19) 어버이 봉양을 위해 자청하여 안변부사(安邊府使)로 나갔다.

1642년(인조 20)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에 임명되었는데, 대동법(大同法)을 확대해서 실시하고, 군현(郡縣)에서 회계에 넣지 않은 곡물을 거두었으며, 또 감영(監營)에 저축한 곡식 1만 1천 6백 석으로 군현의 오랜 포흠(逋欠)을 갚고, 군졸의 훈련 및 병기 수리를 통해 위급할 때를 대비하게 하였다.[『인조실록』 20년 6월 4일] 1644년(인조 22)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옮겼는데, 조정에 청하여 3천 냥의 돈과 5천 석의 곡물을 얻어 평안도 백성들의 힘을 덜어 주었다.[『인조실록』 22년 2월 2일] 평양에 잇달아 오가는 청(淸)나라 사신들이 오만하고 포학하여 무례한 짓이 많았으나, 관찰사 김세렴은 정중하게 접대할 뿐 뇌물을 주지 않았으므로 그들도 김세렴을 꺼려하며 탐욕스러운 행동을 하지 못하였다. 아울러 그는 평양에 양몽재(養蒙齋)를 두고 선비를 양성하였다.

1645년(인조 23)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어 홍문관 제학(提學)을 겸임하다가, 곧 승정원 도승지로 영전되었다.[『인조실록』 23년 9월 6일],[『인조실록』 23년 10월 10일] 인조가 그를 매우 신임하였으므로 곧 호조 판서로 발탁하였는데, 그는 군현의 방납(防納)을 철저하게 금지하여, 그 폐단을 크게 줄였다.[『인조실록』 23년 12월 1일]

김세렴은 평소 병이 많은데다가 함경도관찰사와 평안도관찰사로서 4년 동안 고생하는 바람에 몸이 쇠약하여 야위었는데, 1645년(인조 23) 맏아들 김익상(金翊相)이 갑자기 죽자 병이 악화되었다. 그리하여 1646년(인조 24) 1월 17일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54세였다.[『인조실록』 24년 1월 17일]

한편 그는 문장이 아름다웠는데, 특히 시문에 뛰어났다. 문집으로 『동명집(東溟集)』이 있고, 저서로는 일본에 통신사로 갔을 때를 기록한 『동명해사록(東溟海槎錄)』 등이 있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아주 신중하고 행동거지에 짜임새가 있었다. 일을 할 때에는 상세하게 기획하고 조심스럽게 추진하며, 행동할 때에는 당황하여 말이 빠르거나 얼굴빛이 변한 적이 없었다. 정사(政事)의 요체(要諦)를 파악하여 시행하는 정사가 간약하여 백성들이 쉽게 알고 이를 따랐으므로, 조야(朝野)에서 그의 정사를 높이 평가하였다. 경연에서 임금을 가르칠 때에는 임금의 총명을 계도 발전시키려고, 경학(經學)의 뜻을 강론하면서 적당한 실례를 들어 자세히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판서 정경세(鄭經世)는 “인물을 논하자면 당대 제일이다”라고 하였다. 만년에 더욱 경학에 힘을 기울여 먼저 자신을 수양하고 행동을 근신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으며, 그 다음에 백성들을 가르치고 풍속을 바로잡는 일을 하였다. 항상 독서하기를 즐거워하였다. 문장이 매우 전아(典雅)하였는데, 특별히 시에 능하였다. 일찍이 동쪽 바닷가 강릉에 귀양 갔다가 자기 호를 ‘동명’이라고 일컬었다.[「김세렴비명」]

1636년(인조 14) 김세렴은 일본 통신사의 부사에 임명되어 일본 에도에 갔는데, 관백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가 사람을 시켜 관제ㆍ복색에 관한 일을 물었다. 그리고 만나서는 『시경(詩經)』ㆍ『서경(書經)』과 인의(仁義)에 관한 학설로 서로 토론하였는데, 이때 관백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머리를 조아리며 “이제야 군자의 말씀을 제대로 얻어 듣게 되었습니다”라고 하며, 황금 1백 70정(錠)을 전별금(餞別金)으로 주었다. 그러나 김세렴은 일본 오사카[大坂] 동쪽 700리 오카자키[岡崎]에 있는 금절하(金絶河)에 이르러 금화들을 얕은 물속에 던져버리면서, “내가 뇌물로 주는 돈을 받지 않은 것을 보여줄 뿐이다. 쓸모 있는 물건을 쓸모없게 하지 말라” 하였다. 그 뒤에 대마도주(對馬島主)가 그 금화들을 건져내어 그 돈으로 세급포(歲給布 : 해마다 주는 포목) 1만 5천 필을 대신 사도록 청하였다.[「김세렴비명」]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직전 요동(遼東)이 후금(後金)의 누르하치 군사에게 점령당하자, 명(明)나라 백성들이 평안도 선천(宣川)의 앞바다에 있는 가도(椵島 : 피도)로 몰려왔다. 당시 명나라 패잔병 출신 모문룡(毛文龍)이 자칭 제독(提督)이라고 일컬으며 피난민을 통솔하면서 후금의 후방을 공격하고, 조선에 막대한 군량미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후금의 누르하치 군사가 모문룡의 세력을 제거하고자 자주 압록강을 넘어 청천강 유역을 드나들었으므로, 후금의 세력을 두려워한 조정의 위정자들이 청천강 이북의 땅을 포기하자는 의논을 제기하였다. 그때 사헌부 집의였던 김세렴은 “국가에서 백성의 마음을 잃는 것이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라며 자세히 그 옳고 그름에 관하여 설명하였다. 또 “인심이 떠나서 대세가 기울어진다면, 전하가 열 길의 성곽과 백만의 군사를 가졌더라도 승패의 운수에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여러 신하들이 이러한 계책을 만든 것이 잘못입니다” 하였다. 인조가 그 의논을 조정의 논의에 붙였는데, 찬성하는 자가 많았음에도 김세렴의 주장을 받아들여 그 일을 시행하지는 않았다.[「김세렴비명」]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강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에 있는데, 허목(許穆)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이 남아있다. 처음에 양주 남쪽에 있는 친족 묘역에 장사하였다가, 20년 뒤에 양주 북쪽 고모현(姑母峴) 서남쪽 언덕에 개장(改葬)하였다.

첫째 부인 문화 유씨(文化柳氏)는 유희발(柳希發)의 딸인데, 자녀가 없었다. 둘째 부인 문화 유씨는 유성민(柳成民)의 딸로, 자녀는 3남 2녀를 낳았다. 1남은 김익상(金翊相)이고, 2남은 김필상(金弼相)이며, 3남은 김준상(金儁相)이다. 딸은 각각 이가우(李嘉雨)와 신향(申晑)의 처가 되었다.[「김세렴비명」]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보감(國朝寶鑑)』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기언(記言)』
■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능허집(凌虛集)』
■ 『동명집(東溟集)』
■ 『동사록(東槎錄)』
■ 『동사일기(東槎日記)』
■ 『미수기언(眉叟記言)』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전후사행비고(前後使行備考)』
■ 『해사록(海槎錄)』
■ 『해사일기(海槎日記)』

■ [집필자] 이현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