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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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원(金命元)

서지사항
항목명김명원(金命元)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인물
유형문신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총론]
[1534년(중종 29)∼1602년(선조 35) = 69세]. 조선 중기 명종(明宗)~선조(宣祖) 때의 문신. 좌의정 등을 지냈다. 자는 응순(應順)이고, 호는 주은(酒隱)이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며, 봉작은 경림부원군(慶林府院君)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 김만균(金萬勻)이고, 어머니 순흥 안씨(順興安氏)는 현감(縣監) 안존의(安尊義)의 딸이다. 친할아버지는 홍문관(弘文館) 직제학(直提學) 김천령(金千齡)이며, 친증조할아버지는 김치세(金致世)이다. 양할아버지는 사헌부 지평(持平) 김인령(金引齡)이고, 양증조할아버지는 이조 참의(參議) 김치운(金致運)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자, 이정구(李廷龜)의 스승이다. 유학에 대한 조예뿐만 아니라 무재(武才)도 있었기 때문에,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8도(道) 도원수(都元帥)로 활동하였다.

[명종 시대 활동]
1558년(명종 13) 사마시(司馬試) 생원과로 합격하였고, 1561년(명종 16) 식년(式年) 문과에 갑과(甲科) 3등 탐화(探花)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8세였다. 할아버지 김인령과 아버지 김만균, 형 김경원(金慶元)이 모두 장원 급제하였고, 김명수도 여러 차례 향시(鄕試)에서 장원을 차지하다가 마침내 대과(大科)에서 갑과 3등 탐화로 급제하니, 당시 사람들이 ‘장원 집안[壯元家]’이라고 일컬으며 몹시 부러워하였다.[『월사집(月沙集)』 권44 「좌의정경림부원군증시충익김공신도비명(左議政慶林府院君贈諡忠翼金公神道碑銘)」 이하 「김명원비명」으로 약칭]

홍문관 정자(正字)에 보임되었고, 1562년(명종 17) 홍문관 저작(著作)을 거쳐 1563년(명종 18) 홍문관 박사(博士)로 승진하였다.[『명종실록』 17년 11월 8일],[『명종실록』 18년 6월 20일] 그의 형 김경원도 홍문관 교리(校理)로 있었는데, 당시 권력을 잡인 이량(李樑)이 김명원과 김경원 형제를 배척하는 바람에 모두 파직되었다.[『명종실록』 18년 7월 22일] 이량은 명종의 왕비인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외삼촌으로, 명종이 어머니 문정왕후(文定王后)와 외삼촌 윤원형(尹元衡)의 전횡을 억제하기 위하여 1563년 이조 판서(判書)에 임명하여 인사권을 맡겼던 인물이다. 이런 가운데 이량은 젊은 인재를 포섭하던 과정에서 기대승(奇大升)·윤두수(尹斗壽)·이산해(李山海) 등과 충돌하면서 그 비리가 폭로되었다. 이에 인순왕후의 동생 심의겸(沈義謙)이 기대승 등과 힘을 합쳐 외삼촌 이량을 탄핵하여 삭탈관직하였다. 이때 명종이 특별히 명하기를, “홍문관의 빈자리는 김명원·김경원 형제를 추천하여 임명하도록 하라”고 하였으므로, 김명원은 즉시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에 임명되었다.[『명종실록』 18년 1월 22일]

1564년(명종 19) 김명원은 홍문관 수찬(修撰)으로 승진하였고, 1565년(명종 20) 이이(李珥)와 함께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이 되었으며, 1566년(명종 21)에는 정철(鄭澈)과 함께 사헌부 지평이 되어 언관(言官)으로 활약하였다.[『명종실록』 19년 2월 1일],[『명종실록』 20년 11월 18일],[『명종실록』 21년 4월 28일] 1567년(명종 22) 다시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가 성균관 직강(直講)을 거쳐 홍문관 교리로 승진하였다.[『명종실록』 22년 1월 28일] 이때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갔다가 돌아와서 다시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김명원비명」]

[선조 시대 활동]
1568년(선조 1) 함경도순무어사(咸鏡道巡撫御使)에 임명되어, 함경도 여러 고을을 순찰하고 산천의 형세와 오랑캐를 방비할 방책을 조목별로 나열하여 자세히 왕에게 보고하였다.[『선조실록』 1년 6월 4일] 그때 종성부사(鍾城府使)의 자리가 비었으므로, 김명원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하고 종성부사에 임명하였다.[『선조실록』 1년 6월 12일] 1573년(선조 6) 동래부사(東萊府使)로 옮겼다가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되었다.[『선조실록』 6년 1월 3일].[『선조실록』 6년 10월 11일] 선조가 그의 무재를 시험하고자 그에게 먼 변방의 일을 맡겼는데, 장차 무장(武將)으로 크게 쓰려고 하였던 것이다.[「김명원비명」] 이어 판결사(判決事)에 임명되었다가 형조 참의(參議)를 거쳐, 나주목사(羅州牧使)와 정주목사(定州牧使)를 지냈다.

1579년(선조 12) 의주목사(義州牧使)에 임명하여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가자(加資)하자, 대간(臺諫)에서 김명원을 너무 빨리 승진시킨다고 논박하였다. 그러자 선조가 “장차 김명원을 절도사(節度使)로 삼으려고 하니, 바꿀 수가 없다”고 하였다.[『선조수정실록』 12년 8월 1일] 1581년(선조 14) 선조는 김명원을 평안도병마사(平安道兵馬使)의 무관직에 임명하여, 문무(文武)를 겸전한 인물로 키우려고 하였다.[『선조수정실록』 14년 11월 1일] 1582년(선조 15) 중앙으로 들어온 김명원은 호조 참판(參判)이 되었다가, 1583년(선조 16) 외방으로 나가서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되었다.[『선조실록』 16년 3월 4일] 그때 조정에서 전라도관찰사가 전주부윤(全州府尹)을 겸직하자는 논의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는데, 김명원이 장계(狀啓)하여 전라도관찰사를 사임하고 청하기를, “전주부윤 심의겸이 재주와 국량(局量)이 있으니, 청컨대 그가 전라도관찰사를 대신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이에 논의하는 자들이 “이것은 번신(藩臣)이 감히 말할 바가 아닙니다”라고 하며 그에게 죄주기를 청하였으나, 선조는 도리어 김명원을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에 임명하였다.[「김명원비명」],[『선조실록』 16년 5월 18일],[『선조실록』 16년 5월 20일]

1584년(선조 17) 병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품되어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가 되었으며, 이듬해인 1585년(선조 18)에는 형조 판서(判書)가 되었다가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이 되었다.[『선조실록』 17년 1월 22일],[『선조실록』 17년 3월 29일] 1587년(선조 20)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에 임명되었는데, 왜구가 녹도(鹿島)를 함락시키자, 좌참찬(左參贊)에 임명되어 도순찰사(都巡察使)를 겸임하고 함경도 북변(北邊)을 순찰하였다.[『선조수정실록』 20년 9월 1일] 1588년(선조 21) 왜적이 물러가자,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에 옮겨서 임명되었으나, 80세의 노모가 있다고 관직을 사양하자, 선조가 즉시 형조 판서로 바꾸어 임명하였다.[『선조실록』 21년 7월 11일],[『선조실록』 21년 7월 14일] 1589년(선조 22)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가 되었다가 의정부 좌참찬에 임명되어, 의금부(義禁府) 지사(知事)를 겸임하였다.[「김명원비명」],[『선조수정실록』 21년 11월 1일],[『선조실록』 22년 11월 1일]

그때 마침 <정여립(鄭汝立) 모반 사건>이 일어나자, 죄인들을 국문하는 데에 참여하여,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녹훈(錄勳)되어 경림군(慶林君)에 봉해지고,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품되었다.[『선조수정실록』 23년 8월 1일] 정여립 모반 사건은 서인(西人)의 영수 정철(鄭澈)이 위관(委官)이 되어 동인(東人)의 강경파인 이발(李潑)·최영경(崔永慶) 등 1천여 명을 잡아 죽인 사건으로, 김명원은 서인의 중진으로서 정여립 모반 사건을 국문하는 데에 참여하였다. 나중에 동인의 온건파 유성룡(柳成龍)이 정권을 잡았을 때 서인의 강경파 정철은 철저하게 보복을 당하였으나, 서인의 온건파 김명원 등은 사람이 좋아 적을 만들지 않았으므로 보복을 당하지 않았다.

1591년(선조 24)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임하고 시묘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검사(巡檢使)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뒤에 8도 도원수에 임명되었다.[『선조실록』 25년 4월 29일] 김명원은 1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한강에 나가서 진을 치고 왜군의 북상을 막았으나 중과부적으로 실패하였다.[『선조수정실록』 25년 5월 1일] 이에 김명원은 후퇴하여 임진강(臨津江)을 수비함으로써 왜적의 침공을 지연시켰다.[『선조수정실록』 25년 5월 1일] 선조가 평양에서 의주(義州)로 피난 갈 때 김명원은 순안(順安)에 있다가 행재소(行在所)의 경비를 철저하게 하여, 선조가 의주로 무사히 몽진(蒙塵)하는 데에 큰 공훈을 세웠다. 명나라 구원병이 오자, 1593년(선조 26) 김명원은 관군을 이끌고 이여송(李如松)의 명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왜군을 무찌르고, 평양과 개성을 차례로 탈환한 후 마침내 서울을 수복하였다.

서울로 돌아온 뒤에 김명원은 병을 핑계로 도원수를 사임하였으나, 선조는 그를 판서에 임명하였다. 이에 그는 호조 판서와 예조 판서, 형조 판서, 공조 판서를 잇달아 역임하였다.[『선조실록』 26년 7월 9일],[『선조실록』 28년 9월 27일],[『선조실록』 30년 3월 1일],[『선조실록』 26년 7월 15일] 그러면서 <송유진(宋儒眞)의 난>을 국문하는 데에 참여하여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품되었다.[『선조실록』 27년 5월 2일] 1597년(선조 30) 왜군이 다시 조선을 침략하면서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병조 판서에 임명되어 유도대장(留都大將)을 겸임하였다.[『선조실록』 30년 8월 11일] 이듬해인 1598년(선조 31) 명나라 군문(軍門) 형개(邢玠)가 나오자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품되고 접반사(接伴使)에 임명되어 의주까지 마중 나가서 그를 접대하였다. 그 뒤에 김명원은 병으로 병조 판서를 사임하였다.

그러나 1599년(선조 32) 다시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다가, 1600년(선조 33) 의정부 좌찬성에 특별히 임명되었다.[『선조실록』 32년 7월 6일] 얼마 뒤에 이조 판서를 거쳐 우의정이 되었다.[『선조수정실록』 33년 5월 1일],[『선조수정실록』 33년 6월 1일] 그리고 1601년(선조 34) 경림부원군에 봉해지고 좌의정으로 승진하였으나, 1602년(선조 35) 12월 10일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향년 69세였다.[『선조실록』 34년 5월 16일],[『선조실록』 35년 12월 10일]

[임진왜란 때 도원수 김명원의 활동]
1591년(선조 24)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임하고 시묘살이를 하고 있던 김명원은 1592년(선조 25) 4월 15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의 명에 따라 기복(起復)하고 순검사(巡檢使)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뒤에 8도 도원수가 되었다. 왜군이 상주(尙州)에서 이일(李鎰)의 군사를 무찌르고, 충주(忠州) 탄금대(彈琴臺)에서 신립(申砬)의 군사를 격파하며 파죽지세로 북상하자, 선조는 김명원을 도원수로, 신각(申恪)을 부원수로 임명하여 1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한강에 진을 친 후 왜군의 북상을 막게 하였다. 그리고 4월 29일 선조는 한밤중에 서울을 빠져나가 서북쪽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왜군은 15만 명의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북상하여, 수도 서울로 총집결하였다.

며칠 후인 5월 2일 왜군의 선발 부대가 한강에 이르자, 김명원의 군사는 왜적의 대군을 보고 놀라 감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모두 도망쳤다. 한편 김명원은 상복 차림으로 전쟁에 임하였는데, 후퇴하여 임진강을 수비하면서 흩어진 군사들을 불러 모아 목책(木柵)을 설치하고 강여울을 방비하였다. 그러면서 군사가 조금씩 정비되니, 왜군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김명원은 군사들을 위무(慰撫)하면서 가볍게 움직이지 않았는데, 조정에서는 그가 너무 신중함을 지키고 공격하지 않는다면서 사자를 보내 빨리 왜적과 싸우라고 독려하였다. 이때 김명원이 아뢰기를, “신이 이빈(李薲)·유극량(劉克良) 이하 장수 20여 명과 군사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임진강을 사수하고 벽제(碧蹄) 등에 매복을 설치하여 많은 적을 죽였습니다. 이양원(李陽元)도 이일·신각 이하 장수 10여 명과 군사 5천 여 명을 거느리고 양주의 대탄에 주둔하여 진격할 것을 모색하고 있는 중입니다” 하니, 상하가 모두 기뻐하면서 멀지 않아 환궁하게 될 것이라고 크게 기대하였다.[『기재사초(寄齋史草)』 권하 「임진일록(壬辰日錄)」 1] 그러나 김명원은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임진강을 건너갔다가 왜적의 복병을 만나 크게 패배하여 신길(申硈)과 유극량 등이 모두 전사하고, 황급히 퇴각하였다.

이때 김명원은 부원수 신각이 마음대로 군사를 이끌고 본대를 이탈하여 유도대장 이유원을 따라갔기 때문에 임진강의 방어선이 무너졌다고 보고하고, 부원수 신각의 처벌을 주장하였다. 처음에 신각은 김명원을 따라 한강에서 왜적을 방어하였는데, 김명원의 군사가 무너지자,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여 유도대장 이양원을 따라 양주(楊州)로 갔다. 그때 마침 근왕병을 이끌고 온 함경도병사(咸鏡道兵使) 이혼(李渾)을 만나 군사를 합쳐 진을 결성하고, 민가를 약탈하던 왜적을 양주의 개재[蟹嶺]에서 요격하여 70여 급(級)을 참수하였다. 이것은 임진왜란 때 조선이 처음으로 거둔 승전이었으므로 원근에서 듣고 모두 기뻐하였다. 그러나 김명원이 부원수 신각이 군사를 이끌고 도망쳤다고 장계를 올리고 그의 처벌을 거듭 요청하였으므로, 선조는 이를 그대로 믿고 선전관을 보내 현장에서 신각의 목을 베도록 명하였다. 선전관이 떠나고 난 뒤에 부원수 신각이 승리했다는 보고를 들은 선조는 즉시 뒤따라 선전관을 보내 사형을 중지하도록 명하였으나, 제때에 미치지 못하는 바람에 신각은 처형되고 말았다.[『국조보감(國朝寶鑑)』 권31] 신각의 억울한 죽음 때문에 김명원은 평생토록 비난을 받았다.

한편 선조가 의주로 피신을 할 때 김명원은 순안에 머물고 있었다. 왜적의 정찰대가 날마다 부현(斧峴)까지 왔으므로, 김명원은 밤낮으로 군사의 행렬에 있으면서 진영(陣營)을 떠나지 않고, 밤에도 옷에서 띠[帶]를 풀지 않은 채 군사들을 독려하였다. 김명원은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요충지에 배치하여 적로(賊路)를 막아 행재소를 호위하였으므로, 왜적이 서쪽으로 진출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해 6월 22일 선조 일행은 무사히 의주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해 7월 명나라 부총병 조승훈(祖承訓)이 요동 군사 5천 명을 이끌고 먼저 조선에 들어왔으며, 그해 12월에는 명나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4만 2천 명의 군가를 거느리고 들어왔다. 이에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 1월 조선의 관군과 명나라 이여송의 군사가 연합하여 평양을 공격하여 평양성을 탈환하였다. 명나라 장수 사유(史儒)가 경솔하게 진격하다가 패배하자, 일로(一路)의 군사들이 크게 놀라서 모두 말하기를, “적병이 또 이르렀다”고 하였다. 그때 임금의 대가(大駕)가 의주에 머물고 있었으므로, 어떤 사람이 도원수 김명원에게 행재소에 빨리 보고할 것을 청하였으나, 김명원은 “조금 기다려서 확실한 소식을 전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이다”라고 만류하였다. 한참 있다가 왜군들이 특별히 움직이지 않았다는 보고를 듣고, 군사 막료들은 도원수 김명원의 신중한 행동에 모두 탄복하였다.[「김명원비명」]

당시 방어사(防禦使)김응서(金應瑞)는 젊고 용기에 넘쳐 조정에서 군사를 함부로 진격시키지 말도록 경계하는 것을 알면서도, 여러 번 원수부(元帥府)첩정(牒呈)하여 싸우기를 요청하고 김명원의 뜻을 시험하였다. 김명원은 이것을 싫어하여 손수 서명하고 첩정한 대로 시행하게 하였는데, 순찰사(巡察使) 이원익(李元翼)이 곁에 있다가 놀라서 말하기를, “공은 어찌하여 조정에 보고하지 않고 곧바로 싸우도록 허락합니까?”라고 하였으나, 도원수 김명원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김응서가 출병하여 이곳저곳 배회하다가 왜적을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왔으나, 김명원은 이것 또한 문책하지 않았다. 아마도 신각의 억울한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김명원은 두 번 다시 남의 앞길을 가로막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뒤에 김명원은 사적으로 이원익에게 이르기를, “이놈은 심장이 곧지 못하니, 조심하고 그를 가볍게 믿지 마시지요”라고 하였다.[「김명원비명」]

명나라 군사가 조선에 들어와서 조선의 관군과 명나라 군사가 연합하여 왜적을 공격하였는데, 김명원은 훌륭한 계책을 세워서 서로 호응하여 왜적과 싸웠다. 일을 주선하는 데에도 김명원이 번번이 기의(機宜)에 알맞게 처리하였으므로, 명나라 장수들이 김명원을 의지하고 존중하여 싸울 때에는 반드시 김명원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김명원이 조선의 8도 군사와 명나라 군사를 이끌고 왜적의 소굴에 쳐들어가서 다방면으로 교란시키니, 왜적의 기세가 꺾이고 위축되어 밤에 불이 꺼지듯이 조용해졌다. 1593년(선조 26) 1월 이여송의 명나라 군사가 평양성을 탈환하고, 그해 2월 조선의 관군과 명나라 군사가 개성을 탈환하였으며, 그해 5월 한양을 수복하였다. 그리고 그해 10월 선조 일행이 1년 5개월 만에 환도하였는데, 김명원도 이때 선조를 따라 서울로 돌아왔다.[「김명원비명」]

[성품과 일화]
김명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이 침착하고 원대하였으며, 기량이 너그럽고 공평하였다.[「김명원비명」] 또 성품이 선량하여 남과 잘 지냈으며, 풍모가 온화하고 우아하여 그의 인품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선조실록』 35년 12월 10일] 어려서부터 남과 더불어 다투지 않았고, 평상시에 말을 빨리하거나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안으로는 마음속에 남과 쌓인 감정이 없었고, 겉으로는 일부러 자기를 드러내고자 꾸미는 법이 없었다. 관직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집안 형편은 더욱 영락(零落)하였는데, 타고난 성품이 검소하여 거처와 음식이 마치 보잘 것 없는 선비와 같았다. 그러나 손님을 맞이하면 반드시 술자리를 마련하고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이야기하여 화기애애하였다.[「김명원비명」]

장인을 모시고 친부모와 같이 봉양하였다. 젊어서 이황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는데, 『주역(周易)』을 상당히 상세하게 공부하여 이에 통달하였으므로, 이황이 가상하게 여기고 서책(書冊)을 주어 그의 학문을 격려하였다. 김명원은 이미 향시에서 시문(詩文)이 훌륭하다는 명성을 떨쳤으므로, 과거에 급제하자 바로 홍문관에 뽑혀 들어가 8년 동안 경연(經筵)에서 진강(進講)하였다. 선조는 그가 유학에 조예가 깊은 사실을 알고 날로 그에 대한 은혜를 두텁게 하였다. 김명원이 함경도를 순찰하고 돌아오자 선조가 변방의 일을 맡겼는데, 그가 장상의 재질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북방에서 오랑캐의 변란이 일어나면 김명원을 북방으로 파견하였고, 남방에서 왜란이 일어나면 김명원을 남방으로 파견하였다. 또 김명원은 인사 행정을 공평하게 하였으므로, 선조는 그에게 이조 판서와 병조 판서의 직임도 맡겼다.[「김명원비명」]

어느 날 이항복(李恒福)이 시어(詩語) 때문에 벼슬자리를 물러나자, 김명원이 경연의 자리에서 정성을 다하여 이항복을 변명하였다. 반대파에서 두 사람을 아울러 탄핵하여 몰아내려고 하였으나, 김명원은 그들의 행동에 마음을 쓰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아량에 탄복하였다. 김명원은 일찍이 병서(兵書)를 배우고 활과 말을 상당히 익혔으나, 장수의 재질이 있다고 스스로 자부하지 않았다. 또 조정에서 응대(應對)한 글이나 우연히 흥이 나서 지은 시들이 사람들에게 전송되어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음에도 김명원은 사장(詞章)과 문한(文翰)을 남에게 나타내려고 하지 않았다.[「김명원비명」]

졸기에서는 “젊어서 벼슬길에 올라 장재가 있다고 소문이 났다. 그가 역임한 무관의 관직은 거의 모두 임진왜란 때였는데, 그는 도원수가 되어서도 자기 재능과 공적을 자랑하지 않았다. 임금이 의주에 머무를 때에는 패잔병을 수습하여 보잘것없는 병기를 가지고 순안에 진을 치고, 순변사 이원익과 힘을 합쳐 왜적에 대적하였다. 그 뒤에 정승이 되어서 건의한 것은 별로 없었으나, 마음씀씀이가 아름다워 남을 해치려고 하지 않았다”고 전하였다.[『선조실록』 35년 12월 10일]

[묘소와 후손]
시호는 충익이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대자산(大慈山)의 선영에 있는데, 이정구(李廷龜)가 지은 신도비(神道碑)가 남아있다.

부인 청주 한씨(淸州韓氏)는 호조 정랑(正郞)한관(韓綰)의 딸인데, 자녀는 3남 4녀를 낳았다. 장남 김수개(金守愷)는 후손이 없고, 차남 김수인(金守仁)은 김명원의 형인 병마사(兵馬使) 김경원(金慶元)에게 양자로 갔으며, 3남 김수렴(金守廉)은 익산군수(益山郡守)를 지냈다. 장녀(長女)는 현감(縣監) 남복시(南復始)에게, 차녀(次女)는 종실(宗室) 문성군(文城君) 이건(李健)에게, 3녀(三女)는 최상진(崔尙鎭)에게 각각 시집갔다. 3남 김수렴의 아들 김남중(金南重)은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판서를 지냈다.[「김명원비명」]

[참고문헌]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보감(國朝寶鑑)』
■ 『계갑일록(癸甲日錄)』
■ 『고대일록(孤臺日錄)』
■ 『기언(記言)』
■ 『기재사초(寄齋史草)』
■ 『기축록(己丑錄)』
■ 『난중잡록(亂中雜錄)』
■ 『명재유고(明齋遺稿)』
■ 『미수기언(眉叟記言)』
■ 『상촌집(象村集)』
■ 『서애집(西厓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우복집(愚伏集)』
■ 『월사집(月沙集)』
■ 『임하필기(林下筆記)』
■ 『잠곡유고(潛谷遺稿)』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청음집(淸陰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후광세첩(厚光世牒)』

■ [집필자] 최양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