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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33년(인조 11)∼1687년(숙종 13) = 55세]. 조선 후기 효종(孝宗)~숙종(肅宗) 때의 문신이자, 숙종의 국구(國舅). 병조 판서(判書) 등을 지냈다. 자는 영숙(永叔)이고, 호는 둔암(遁菴) 또는 서석(瑞石)이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봉작은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이다.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거주지는 서울과 충청남도 연산(連山)이다. 아버지는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생원(生員) 김익겸(金益兼)이며, 어머니 해평 윤씨(海平尹氏)는 참판 윤지(尹墀)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이조 참판(參判) 김반(金槃)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예학(禮學)의 대가인 김장생(金長生)이다. 숙종의 원비(元妃)인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숙부 김익희(金益熙)에게 가학(家學)을 배우다가,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서인(西人)의 대표적인 과격파로서 <제 1차 예송(禮訟) 논쟁>과 <제 2차 예송 논쟁>에서 남인(南人)을 공격하는 데에 앞장섰다.
1659년(효종 10) 5월 효종이 갑자기 승하하자, 인조의 계비(繼妃)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服制) 문제로 서인과 남인 사이에 당쟁이 벌어졌다. 서인의 송시열·송준길(宋浚吉) 등은 기년복(朞年服 : 1년 상복)을 주장하였으나, 남인의 윤선도(尹善道)·윤휴(尹鑴) 등은 삼년복(三年服: 3년 상복)을 주장하였다. 현종은 송시열의 고집을 이기지 못하여 기년복을 채택하고, 남인 윤선도는 삼수(三水)로 귀양 보냈다. 그 결과 서인이 정권을 잡고 남인은 축출되었는데, 이 사건이 바로 제 1차 예송 논쟁으로, 기해년(1659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기해예송(己亥禮訟)>이라고도 부른다. 이때 사간원 정언이었던 김만기는 스승 송시열을 도와 남인 윤선도와 윤휴를 공격하였다.[「김만기비명」]
1674년(현종 15) 2월 효종의 왕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세상을 떠났다. 이때 조정에서는 죽은 며느리를 위한 자의대비의 복제 문제가 발생했다. 서인의 송시열과 김수항(金壽恒) 등은 대공복(大功服 : 8개월 상복)을 주장하고, 남인의 허적(許積)과 윤휴(尹鑴) 등은 기년복을 주장하였는데, 현종은 서인의 김석주(金錫冑) 등의 도움을 받아 남인의 기년복을 채택하고, 서인 김수항 등을 귀양 보냈다. 그 결과 남인이 정권을 잡고 서인은 축출되었다. 이 사건이 제 2차 예송 논쟁으로 갑인년(1674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갑인예송(甲寅禮訟)>이라고도 부른다. 이때 병조 판서 김만기는 김석주와 손을 잡고, 세자와 세자빈의 안전을 도모하였다. 1674년(현종 15) 5월 현종이 세상을 떠나자, 김만기는 국장도감(國葬都監) 당상관(堂上官)이 되어 현종의 국상을 치렀다.
[숙종 시대 활동]
1674년(숙종 즉위년) 5월 숙종이 즉위하자, 김만기는 광성부원군에 봉해졌고, 또 호위대장에 임명되어 궁궐의 안팎을 철통같이 호위하였다.[『숙종실록』 즉위년 9월 18일] 그때 진주 유생 곽세건(郭世楗)이 상소하기를, “기해예송에서 송시열이 예를 잘못 인용하여, 효종과 현종의 적통을 그르쳤습니다” 하니, 숙종은 이를 문제 삼아 송시열을 함경도 덕원(德源)으로 귀양 보냈다. 김만기는 1675년(숙종 1) 총융사(摠戎使)를 겸직하며 막강한 병권을 장악하였다.[『숙종실록』 1년 1월 18일] 그리고 국구로서 돈녕부(敦寧府)영사(領事)로 승진하였고, 김석주의 추천으로 대제학에 임명되었다가, 상의원(尙衣院)제조(提調)가 되었다.[『숙종실록』 1년 9월 21일] 이때 남인의 허적이 집권하여 서인을 모조리 몰아냈으나 김만기는 건드리지 않았으며, 김만기 또한 남인과의 충돌은 되도록 피하였다. 그런 한편 1678년(숙종 4) 총융대장(摠戎大將)과 훈련대장(訓練大將)이 되어 병조 판서 김석주와 손을 잡고 남인 정부를 견제하였다.[『숙종실록』 4년 윤3월 21일]
1680년(숙종 6) 허적의 서자 허견(許堅)이 종실 복창군(福昌君)·복선군(福善君)·복평군(福平君) 3형제와 역모를 도모하였다는 <삼복(三福)의 옥>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이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허적과 허견 부자 등이 죽음을 당하고, 남인의 허적 정권이 무너지는 대신 서인이 정권을 잡았다. 그리고 이 사건을 다스린 공으로 김만기와 김석주는 보사공신(保社功臣) 1등에 책훈되었으며, 권력 또한 장악하였다.[『숙종실록』 6년 5월 18일] 그러나 그해 10월 그의 딸 인경왕후가 병에 걸려 2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김만기의 모든 꿈은 무너지고 말았다. 이에 김만기는 모든 병권을 내어 놓고, 모든 지위에서 물러났다. 한편 1681년(숙종 7) 그의 절친한 친구 민정중(閔鼎重)의 형 민유중의 딸이 새 왕비로 간택되어 궁중에 들어왔는데, 그가 바로 인현왕후(仁顯王后)이다.
1682년(숙종 8) 김만기는 훈련대장에서 면직되었다. 이후 그는 집안에서 두문불출하며 몇 년 동안 지내다가 1687년(숙종 13) 1월 병이 위독해졌다. 숙종은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김진구(金鎭龜)에게 역마를 타고 빨리 서울에 올라와서 아버지 김만기를 간호하도록 명하고, 전라도관찰사 자리를 다른 사람으로 교체시켰다.[『숙종실록』 13년 1월 16일] 숙종이 어의(御醫)와 약을 보내고 또 맏아들과 부인이 극진히 간호하였으나, 병세는 좋아지지 않다가 그해 3월 15일 서울 집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55세였다.[『숙종실록』 13년 3월 15일] 그의 문집으로는 『서석집(瑞石集)』 18권이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침착하고 깊이가 있었으며, 행동이 묵직하고 후덕하였다.[『숙종실록』 13년 3월 15일] 천부적인 자질이 매우 너그럽고 후덕하며 침착하고 안정되었다. 사리에 아주 밝고, 마음이 넓었으며 뜻도 굳세었다. 관대하고 화평하였으므로, 김만기가 효도와 우애를 힘써 행하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행해졌고, 학업을 지도 받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졌다. 예절의 집안에서 생장하여 예학의 전수자로 인정을 받았으나, 불행하게도 너무 빨리 과거에 급제하는 바람에 예학 방면에 전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숙종을 깨우치기 위하여 왕가를 바로잡고 백성들을 사랑하라고 항상 진언하였으며, 반드시 유학에 바탕을 두고 성실하고 간절하게 상언(上言)하였기 때문에 빈말이 되지 않았다.[「김만기비명」]
김만기가 태어나기 전에 어머니 윤씨가 태몽에 용의 징후가 있었으므로, 그의 아명을 구정(九鼎)이라 하였다. 어머니의 할아버지인 윤신지(尹新之)가 아명을 짓고 말하기를, “이 아이가 장차 국가의 큰 그릇이 되라는 뜻이다” 하였다. 그는 평소에 남을 구차하게 헐뜯거나 비웃지 않았다.[『숙종실록』 13년 3월 15일] 그럼에도 어릴 때에 청(淸)나라 사신을 맞이하기 위한 채붕(綵棚)이 대문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고 버텨 서서 움직이지 않으면서, “원수놈의 오랑캐가 구경할 물건이라면, 꼴도 보기 싫다”고 욕하였다.[「김만기비명」]
일찍이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서장대(西將臺)에 올라가서 자기의 뜻을 나타낸 시를 지었는데, 그 내용이 강개하고 격렬하였다. 임금이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저절로 나라가 다스려졌다는 요순(堯舜) 시대의 이상 정치를 그리워하였는데, 이 시에서 그가 깊게 닦은 사상을 엿볼 수 있다. 효종이 승하한 후 복제 문제로 서인과 남인이 치열하게 정권 다툼을 벌이자, 김만기는 더욱 정치가 싫어져서 언제나 벼슬을 버리고 조용히 쉬고 싶어 하였다. 그러나 형세가 여의치 않아, 왕가의 위기가 중첩되고 사화(士禍)가 그치지 않으므로, 김만기가 부득이 병조 판서를 맡아 국가에 충성을 다하고 지혜를 짜내어 종사를 안정시켰다. 큰 과업이 이루어지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몸을 수습하고 헌신짝을 벗어던지듯이 벼슬을 내버린 후 스스로 모든 직책에서 물러났다.[「김만기비명」]
김만기는 문장도 뛰어났는데, 이치에 맞도록 글을 쓰기에 힘썼으므로, 문리(文理)가 바르고 짜임새가 있었다. 그가 젊었을 때 지은 글을 보고, 윤신지와 김익희(金益熙)는 그가 장차 문단(文壇)에서 주도권을 잡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김만기와 그의 차남 김진규(金鎭圭), 그리고 그의 손자 김양택(金陽澤)이 문장으로 뛰어났으므로 3대에 걸쳐 문형(文衡)의 자리를 맡았다.
또 김만기는 경사(經史)에 정통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자(諸子) 백가(百家)의 글에도 널리 통달하였다. 김만기는 일찍이 여러 유학자들이 음률(音律)에 별로 마음을 쓰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였는데, 예(禮)와 악(樂)은 하나이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종묘의 제례 음악을 바로잡으면서 음률을 정리하여 고쳤는데, 고증이 정확하여 조금의 착오도 없었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충이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 속달리(速達里)의 노치(蘆峙)에 있는데, 송시열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이 남아있다. 지금의 경기도 군포시 대야미동 산 1-12번지이다. 현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부인 청주 한씨(淸州韓氏)는 군수 한유량(韓有良)의 딸인데, 자녀는 4남 3녀를 낳았다. 장남 김진구는 문과에 급제하고 관찰사를 지냈고, 차남 김진규도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을 지냈다. 3남은 김진서(金鎭瑞)이고, 4남은 김진부(金鎭符)이다. 장녀는 숙종의 원비인 인경왕후이고, 차녀는 사인(士人) 정형진(鄭亨晉)의 처가 되었다. 장남 김진구의 아들이 김춘택(金春澤), 김보택(金普澤), 김운택(金雲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