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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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승(金德承)

서지사항
항목명김덕승(金德承)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인물
유형문신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총론]
[1595년(선조 28)∼1658년(효종 9) = 64세]. 조선 후기 광해군(光海君)~인조(仁祖) 때의 문신.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사간원(司諫院) 헌납(獻納) 등을 지냈다. 자는 가구(可久)이며, 호는 소전(少痊), 또는 소첩(巢睫)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거주지는 서울과 충주이다. 아버지는 의금부(義禁府) 도사(都事) 김진선(金盡善)이고, 어머니 여흥 민씨(驪興閔氏)는 민철명(閔哲命)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인 김희우(金希禹)이며, 증조할아버지는 통사랑(通仕郞) 김광수(金光壽)이다. 영의정 김우항(金宇杭)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학식은 해박하고 문장은 출중하였으며, 중국어도 능통했다. 서화(書畵)에도 조예가 깊었다.

[광해군~인조 시대 활동]
1618년(광해군 10)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고, 이듬해 1619년(광해군 11) 개성(開城)에서 베풀어진 별시(別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5세였다. 처음에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거쳐 1624년(인조 2)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로 옮겼다. 1625년(인조 3) 동지사(冬至使)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왔다.[『인조실록』 3년 4월 29일] 그때 후금(後金)의 오랑캐 때문에 요동(遼東)의 길이 막혀 해로(海路)로 중국에 갔다 왔는데, 관례대로 나라에서 지급하는 은전(銀錢)과 비단을 모두 아랫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1625년(인조 3) 공조 좌랑(左郞)에 임명되어 춘추관(春秋館) 기사관(記事官)을 겸임하였고, 사헌부 지평(持平)으로 옮겼다.[『인조실록』 3년 10월 22일],[『승정원일기』 인조 3년 6월 24일]

1626년(인조 4)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로 나갔으며, 1627년(인조 5)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에 임명되고, 성균관 직강(直講)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사서(司書)를 거쳐 예조 좌랑이 되었다.[『승정원일기』 인조 4년 3월 24일],[『승정원일기』 인조 5년 6월 6일],[『승정원일기』 인조 5년 7월 3일],[『승정원일기』 인조 6년 1월 24일] 1628년(인조 6) 중국어에 능통하다고 하여 특별히 한학교수(漢學敎授)를 겸임하였다. 1629년(인조 7) 해운판관(海運判官)으로 나가서, 조운(漕運)의 폐단을 상소하였다.[『인조실록』 7년 2월 15일] 1630년(인조 8) 호조 정랑(正郞)에 임명되었고, 1631년(인조 9) 세자시강원 문학(文學)과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을 거쳐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된 후 춘추관(春秋館) 편수관(編修官)을 겸임하였다.[『승정원일기』 인조 8년 7월 24일],[『승정원일기』 인조 9년 6월 3일] 통례원(通禮院) 상례(相禮)를 거쳐 성균관 사예(司藝)로 옮겼고, 1634년 (인조 12)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다.[『인조실록』 12년 10월 11일] 이 무렵 광해군 때이던 1617년(광해군 9) 생원시의 장원 이영구(李榮久)가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廢母論)을 상소하면서 그와 함께 합격한 사람들의 이름을 연명하였는데, 김덕승(金德承)도 그 상소에 함께 연명하였다고 하여 문제가 되었다.[『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권3] 그러나 김덕승은 이름을 도용당하였다고 주장하였고 다른 동방들도 이를 증명하여 주었으므로 마침내 무고임이 밝혀졌다.

1635년(인조 13) 군기시(軍器寺) 정(正)이 되었다가, 공주목사(公州牧使)로 나갔다. 1636년(인조 14) 장악원(掌樂院) 정이 되었다가, 연안부사(延安府使)로 나갔다.[『승정원일기』 인조 14년 3월 5일] 그해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서 오랑캐의 기병(騎兵)이 이미 황주(黃州)를 지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군병을 거느리고 군전(軍前)으로 달려갔다가 돌아왔다. 1637년(인조 15)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버티던 인조가 청(淸)나라 태종(太宗)에게 항복하고 화의가 성립되면서,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이 볼모로 잡혀갔는데, 그 행로(行路)가 연안부를 경유하였으나, 성 밖에 나와서 등대하지 않았다고 하여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이후 김덕승은 가족과 함께 충주(忠州)로 내려가서 살다가, 10여 년이 흐른 1646년(인조 24) 상의원(尙衣院) 정에 임명되었다가, 1648년(인조 26) 성균관 사성으로 옮겼다.[『승정원일기』 인조 24년 3월 13일] 1649년(인조 27) 사복시(司僕寺) 정을 거쳐 1651년(효종 2) 군자감(軍資監) 정으로 옮겼고, 1652년(효종 3) 양양부사(襄陽府使)로 나갔다. 1655년(효종 6) 임기를 마치고, 양주(楊州)의 선영 아래 임시 막사로 돌아와서 지내다가, 1658년(효종 9) 12월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64세였다

[성품과 일화]
김덕승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천성이 바르고 엄숙하여, 일할 때에는 삼가고 조심하였으며, 가정에서 행실이 순수하고 검소하였다. 서책을 매우 좋아하여 그가 거처하는 곳의 좌우에는 고금의 도서들이 가득 쌓여 있었으며, 장기바둑 놀이나 노래 등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다. 안팎의 관직을 40여 년이나 거쳤으나, 서울에는 단 한 칸의 집도 마련하지 못하였고, 대대로 전해 오는 선영 아래 토지 이외에는 한 구역의 땅도 늘리지 않았다. 평소 생활하면서 재물에 대해서는 한 마디 말도 한 적이 없었고, 문전에는 시정배의 출입이 없었다. 학식은 해박하고 문장은 출중하였으며, 그와 교유한 사람은 모두 당대의 걸출한 인사들이었다. 그는 마음가짐과 행동을 바르게 하고, 한 번도 시대의 조류에 편승해서 명예를 구하려고 하지 않았다. 대간(臺諫)에 있을 때에는 칭송과 비방을 일체 생각하지 않고 서슴없이 직언하였기 때문에 벼슬길에 오랫동안 있었으나, 공경대부(公卿大夫)의 반열에 오르지 못하였다.[『약천집(藥泉集)』 권20 「사복시정김공묘갈명(司僕寺正金公墓碣銘)」]

김덕승은 태어나서 겨우 말을 배울 무렵부터 벌써 책을 좋아하여 때때로 울고 떼를 쓰다가도 어른들이 책을 주면 바로 울음을 그쳤다. 조금 자라자, 총명이 뛰어나서 경전(經典)과 사서(史書)를 배우면서 한자의 뜻과 운(韻)을 함께 공부하여 중국어의 사성(四聲)을 터득하였기 때문에 중국어를 따로 배우지 않고도 능통하였다. 일찍 부모를 여의었으나, 능히 혼자 각고의 노력으로 널리 많은 책을 읽었을 뿐만 아니라, 천문 역법과 제자(諸子) 백가(百家)의 여러 사상에도 통달하여, 그 깊은 뜻을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는 항상 경사(經史) 이외에도 운서(韻書)를 깊이 연구하였고 서화에도 능하였으며, 천문 역법과 잡가(雜家)에도 조예가 깊었다.[『약천집』 권20 「사복시정김공묘갈명」]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장단(長湍) 서쪽 구정리(口井里)에 있는데, 남구만(南九萬)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

첫째 부인 여주 이씨(驪州李氏)는 좌찬성(左贊成)이상의(李尙毅)의 딸인데, 1남 2녀를 낳았고, 둘째 부인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현감(縣監)윤정(尹珵)의 딸인데, 3남 2녀를 낳았다. 장남 김홍경(金洪慶)은 문과에 급제하여 부사(府使)를 지냈고, 차남은 김홍명(金洪命)이다. 3남은 김홍범(金洪範)이며, 4남 김홍복(金洪福)은 문과에 급제하여 관찰사(觀察使)를 지냈다. 장녀는 이후길(李後吉)의 처가 되었고, 차녀는 교관(敎官) 신행(申涬)의 처가 되었다. 3녀는 현감 이세원(李世瑗)의 처가 되었으며, 4녀는 박태진(朴泰進)의 처가 되었다. 김홍경의 둘째 아들 김우항(金宇杭)은 문과에 급제하여 영의정을 지냈다.[『약천집』 권20 「사복시정김공묘갈명」]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소전집(少痊集)』
■ 『약천집(藥泉集)』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송자대전(宋子大全)』
■ 『서계집(西溪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월사집(月沙集)』
■ 『임하필기(林下筆記)』
■ 『응천일록(凝川日錄)』
■ 『조천항해록(朝天航海錄)』

■ [집필자] 이현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