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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69년(선조 2)∼1634년(인조 12) = 66세]. 조선 중기 광해군(光海君)~인조(仁祖) 때의 문신. 병조 좌랑(左郞)과 사도시(司䆃寺)정(正) 등을 지냈다. 자는 이정(而正)이고, 호는 우정(憂亭)이다. 본관은 선산(善山)이며, 거주지는 서울에서 살다가 춘천(春川)으로 옮겼다. 아버지는 사직(司直) 김광계(金光啓)이고, 어머니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신달인(申達仁)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사과(司果) 김맹련(金孟鍊)이며, 증조할아버지는 김구정(金九鼎)이다. 상촌(象村) 신흠(申欽)과 교유하였다.
[광해군~인조 시대 활동]
1590년(선조 23)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2세였다.[『방목(榜目)』] 1610년(광해군 2)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42세였다.[『방목』] 처음에 성균관(成均館)에 분속(分屬)되었다가, 관례대로 승진하여 성균관 전적(典籍)이 되었고, 외직으로 나가서 은계도찰방(銀溪道察訪)이 되었다. 그러나 서인(西人)을 지지하였으므로, 광해군 시대의 권력자이던 북인(北人) 이이첨(李爾瞻)으로부터 핍박을 받아 춘천 우두촌(牛頭村)으로 이사하였으며, 이후 깊은 산골에서 7~8년 동안 은거하였다.
[성품과 일화]
김경직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어려서부터 도량이 있고 의젓한 선비의 기풍이 있었다. 경전(經傳)과 사기(史記)에 두루 통달하여, 문장이 풍부하고 언론(言論)이 강경하였다.
광해군 때 북인 이이첨이 정권을 잡고 그를 여러 번 불렀지만, 김경직은 서인을 지지하였으므로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이첨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정탐하고, 크게 화를 내며 중상 모략하려고 하였으나, 마침 이를 만류하는 자가 있어 그만두었다. 그때 그의 친구 가운데 이이첨을 따르는 자가 와서 그의 뜻을 시험하였으므로 김경직이 준엄하게 책망하며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온 집안이 춘천의 우두촌으로 옮겨갔는데, 소머리[牛頭]라는 이름이 아름답지 않다며 지명을 우도(憂道)라 고치고, 이를 본 따 자기 호를 우정이라고 불렀다. 그때 신흠이 춘천에서 귀양살이하고 있었으므로, 두 사람이 매우 정중하게 교유하여, 서로 학문을 토론하고 시문을 지어 교환하였다.[『도곡집(陶谷集)』 권13 「사도사정김공묘갈명(司䆃寺正金公墓碣銘)」]
[묘소와 후손]
묘소는 강원도 춘천 오봉산(五峰山)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이의현(李宜顯)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 춘천의 도포서원(道浦書院)에 배향되었다.
부인 수원 최씨(水原崔氏)는 병절교위(秉節校尉) 최도(崔渡)의 딸이다. 자녀는 4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최종명(崔宗溟)이고, 차남은 최종락(崔宗洛)이다. 3남 최종필(崔宗泌)은 문과에 급제하여 부사(府使)를 지냈고, 4남 최종윤(崔宗沇)은 판관(判官)을 지냈다. 딸은 현령(縣令)이유수(李幼洙)에게 출가하였다.[『도곡집』 권13 「사도사정김공묘갈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