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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66년(세조 12)~1509년(중종 4) = 44세]. 조선 중기 성종(成宗)~중종(中宗) 때의 문신. 대제학(大提學)과 의정부 좌찬성(左贊成) 등을 지냈다. 자는 자헌(子獻)이고, 호는 선동(仙洞) 또는 일재(一齋)이다. 봉작은 연창부원군(延昌府院君)이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안동부사(安東府使) 김원신(金元臣)이며, 어머니 진주 강씨(晉州姜氏)는 세종(世宗)의 동서(同壻) 대민공(戴敏公) 강석덕(姜碩德)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 김수(金脩)이고, 증조할아버지는 문정공(文靖公) 김자지(金自知)이다. 세종 때 유명한 서예가 강희안(姜希顔)의 조카이자, 인천군(仁川君) 채수(蔡壽)의 사위이기도 하다. 영의정 김근사(金謹思)의 삼촌이며, 좌의정 김안로(金安老)와는 7촌이자 동서 간이다. 일찍부터 문장에 뛰어나서, 연산군(燕山君) 때 문형(文衡)으로서 연산군의 총애를 받았으므로,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사림(士林)들의 많은 비난을 받았다.
한편 김감(金勘)은 연산군 말기 병조 판서 임사홍과 권력 다툼을 벌였다. 1503년(연산군 9) 세자 창녕대군(昌寧大君)이 김감의 집에 우거하였는데, 연산군이 김감에게 아들이 없으므로 김감을 수양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였다.[『연산군일기』 9년 3월 20일] 그런데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김감의 장인 채수가 폐비 윤씨(廢妃尹氏) 사건에 연루되어 죽게 되자, 김감의 아내 채씨(蔡氏)가 글을 올려 아버지 채수를 살려달라고 호소하였다. 이에 연산군은 채수의 형을 감해서 태형 50대를 때리고 귀양을 보냈다.[『연산군일기』 10년 윤4월 21일] 이틈을 타서 임사홍의 청에 따라 창녕대군은 임사홍의 집으로 옮겨 갔고, 이러면서 김감은 임사홍과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났다.[『연산군일기』 10년 8월 1일] 결국 그는 1506년(연산군 12) 예조 판서와 대제학의 자리를 빼앗기고 중추부 판사에 임명되었다가,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쫓겨났다.[『연산군일기』 12년 7월 24일]
[성품과 일화]
김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김감은 연산군을 섬겨서 은총이 견줄 사람이 없을 만큼 숭품(崇品)에 올랐으며, 또 문형의 직임을 맡았지만, 사림의 여론이 좋지 않았다. 중종반정 뒤에도 능히 시세를 따라 처세를 잘하여 세상 사람들을 거스르지 않았다. 일찍이 권세를 잡고 남의 집을 빼앗았으므로, 탄핵을 당하였으나, 중종이 그에게 죄주지 않았다.[『중종실록』 4년 5월 6일]
벼슬하면부터 글을 잘한다고 하여 항상 문한(文翰)의 자리에 있었다. 젊었을 때에는 매우 바쁜 업무에 종사하였는데, 일을 만나면 바람을 일으킬 만큼 빠르게 처리하였으나, 그 일을 재단(裁斷)하는 것이 정밀하고 타당하여 시기와 형편에 알맞았다. 그는 음악과 여색을 좋아하지 않고 오직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만을 탐독하였는데, 아무리 병이 들어 몸이 아프더라도 항상 옆에 책을 펴두고 병석에 누워 있을 때에도 책 읽기를 그만 두지 않았다. 문장을 지으면 글이 우아하고 건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연과 논리가 모두 정연하게 갖추어졌는데, 진부한 문체를 구사하지 않고 속된 말을 전혀 쓰지 않았다.[ 「김감비명」]
아버지 김원신이 안동부사(安東府使)로 있을 때 김감도 아버지를 따라서 안동에 가서 공부하였다. 그때 마침 성종(成宗) 때 문장가로 유명한 문정공(文貞公) 손순효(孫舜孝)가 경상도관찰사로 있었는데, 우연히 김감이 지은 글을 보고, 대단히 감탄하여 칭찬을 더하고 한번 만나보기를 청하였다. 김감이 감영(監營)으로 찾아가자, 손순효가 그를 매우 공경하고 소중하게 여겨서 아랫사람들에게 명령하기를, “이 사람을 대우하는 예(禮)를 간략히 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 하고, 어린 김감을 직접 후하게 대접하였다. 그 뒤에 손순효는 항상 김감의 문장을 칭찬하며, 김감의 좋은 평판을 조정에 널리 퍼뜨렸다.[ 「김감비명」]
김감의 장인 인천군 채수는 문과에 장원 급제한 문장가로 유명하였는데, 세 사위 중에서 맏사위 김안로와 막내사위 이자(李耔)도 장원 급제하였다. 과거에 장원 급제한 사람들만이 모여서 즐기는 ‘용두회(龍頭會)’라는 모임을 채수의 집에서 용두회를 개최하던 날 세 명의 사위 가운데 김감만이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다. 김감이 이 모임에 참석하고자 하였으나, 장원 급제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여 거절당했다. 김감이 그의 아내를 시켜 장인에게 가서 고하기를, “저도 35세 때에 대제학을 지냈으니, 이만하면 모임에 참여시킬 만하지 않습니까. 제발 참석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장인 채수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렇게 애걸하니, 참석시키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여 용두회 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장인 채수가 마침내 김감을 집으로 불러서 용두회 회원과 함께 술을 마시고 시를 창화(唱和)하면서 즐겼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 권9]
연산군이 폭정이 심해지면서 서울 도성 주변에 금표(禁標)를 세워 백성들을 먼 곳으로 이주시키고 사냥을 일삼을 때 김감이 금표의 안내문을 짓고, ‘추천시(鞦韆詩)’라는 시를 지어 아첨하였다. 연산군 때 젊은 나이로 의정부 우찬성(右贊成)이 되어 중추부 판사를 겸임하다가 임사홍과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하여 경상도관찰사로 쫓겨나자, 연산군에게 충성을 서약하는 ‘경서문(敬誓文)’을 지어 왕에게 바치기도 하였다.[『연산군일기』 12년 7월 29일]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경이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廣州) 동쪽 정수리(定水里) 견산(見山)의 선영에 있는데, 좌의정 신용개(申用漑)가 지은 신도비(神道碑)가 남아 있다.
부인 인천 채씨(仁川蔡氏)는 채수의 딸인데, 후사가 없었으므로, 동생 김훈(金勳)의 아들 김달사(金達思)를 양자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