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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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선옹주(淑善翁主)

서지사항
항목명숙선옹주(淑善翁主)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왕족
유형인물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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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93년(정조 17)~1836년(헌종 2) = 44세]. 조선의 제 22대 임금인 정조(正祖)의 딸로 옹주.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어머니는 좌찬성(左贊成)박준원(朴準源)의 딸인 박수빈(朴綏嬪)이다. 친오라버니는 조선의 제 23대의 임금인 순조(純祖)이다. 부마는 풍산 홍씨(豊山洪氏) 영명위(永明尉) 홍현주(洪顯周)이다.

[출생과 혼인생활]
1793년(정조 17) 숙선옹주(淑善翁主)는 정조와 박수빈의 1남 1녀 가운데 1녀로 태어났다.[『정조실록』 17년 3월 1일] 10세 되던 1802년(순조 2) 숙선옹주로 작호가 정해졌다.[『순조실록』 2년 11월 28일] 그리고 이듬해인 1803년(순조 3) 순조는 숙선옹주가 12세가 되는 1804년(순조 4)에 숙선옹주의 가례를 행하기 위하여 부마 간택을 진행하였다.[『순조실록』 3년 12월 8일],[『순조실록』 4년 1월 16일],[『순조실록』 4년 3월 17일] 그 결과 순조는 정랑(正郞)홍인모(洪仁謨)의 아들 홍현주를 부마로 정한 후 영명위에 봉하였고, 가례청(家禮廳)을 설치하였다.[『순조실록』 4년 4월 9일] 순조는 하나 뿐인 친동생의 가례일이 정해지자 특별히 홍현주의 집으로 쌀 1백 석, 무명 10동(同), 포(布) 5동, 돈 3천 냥을 보내 혼례비용에 보탬이 되게 하였다.[『순조실록』 4년 4월 15일] 그리고 1804년(순조 4) 5월 27일 숙선옹주는 홍현주와 결혼하였다.[『순조실록』 4년 5월 27일]

순조와 숙선옹주는 우애가 각별히 돈독하였는데, 숙선옹주가 혼인할 때 순조는 직접 『여훈(女訓)』과 『여계(女戒)』를 지어 하사하였다. 또 숙선옹주가 출합(出閤) 한 뒤에는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나뿐인 누이라며 이해해 달라면서 숙선옹주의 집에 행행하기도 하였다.[『순조실록』 4년 6월 1일],[『순조실록』 4년 6월 2일],[『순조실록』 4년 6월 3일]

숙선옹주는 1836년(헌종 2) 44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에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치부(致賻)와 예장(禮葬) 등의 절차를 전례대로 거행하고 성복일(成服日)에는 내시(內侍)를 보내어 조제(弔祭)하도록 하였다.[『헌종실록』 2년 6월 7일]

한편 숙선옹주는 한시에 재능이 있어, 역대 공주와 옹주 가운데 가장 많은 작품을 남겼다. 부모를 그리는 「偶吟(우음)」, 조카인 명온공주(明溫公主)를 생각하는 「月夜懷明溫(월야회명온)」, 은자(隱者)의 삶을 노래한 「逢隱者(봉은자)」 등의 한시가 그것이다. 이 한시들은 부마 홍현주의 문집인 『홍현주시문고(洪顯周詩文稿)』에 실려 있다.

[묘소 및 후손]
숙선옹주의 묘소는 양주(楊州) 상가대(上街垈)에 있다.

숙선옹주는 부마 홍현주와의 사이에 1남을 두었다. 1남 홍우철(洪祐喆)은 판서(判書)이정신(李鼎臣)의 딸 완산 이씨(完山李氏)와 결혼하였다.

[참고문헌]
■ 『정조실록(正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헌종실록(憲宗實錄)』
■ 『국조보감(國朝寶鑑)』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 『홍현주시문고(洪顯周詩文稿)』
■ 지두환, 『정조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9.
■ 최연미, 「조선시대 여성 저서의 편찬 및 필사 간인에 관한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0.
■ 김미란, 「숙선옹주의 한시 연구」, 『온지논총』12, 온지학회, 2005.
■ 엄미경, 「조선후기 홍현주 일가 문집의 차시 연구」, 계명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 [집필자] 정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