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1733년(영조 9)~1752년(영조 28) = 20세]. 조선의 제 21대 임금인 영조(英祖)의 딸로 옹주.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어머니는 찬성(贊成)에 증직된 이유번(李楡蕃)의 딸 이영빈(李暎嬪)이다. 친언니로는 화평옹주(和平翁主)가 있으며, 나머지 3명의 친언니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 친남동생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이고, 친여동생은 화완옹주(和緩翁主)이다. 부마는 평산 신씨(平山申氏) 영성위(永城尉) 신광수(申光洙)이다.
[출생과 혼인생활]
화협옹주(和協翁主)는 1733년(영조 9) 영조와 이영빈의 1남 6년 가운데 둘째 딸로 태어났으며, 11세가 되던 1743년(영조 19 ) 화협옹주로 봉해졌다.[『영조실록』 19년 2월 18일] 동생 사도세자와 화협옹주는 2살 차이였는데, 가례 순서를 두고 영조는 신하들과 생각이 달랐다. 신하들은 종묘사직의 주인은 세자라며 사도세자의 가례를 먼저 해도 무방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영조는 세자의 지위가 있다하더라도 형제간의 순서는 뛰어 넘을 수 없다며 누나인 화협옹주의 혼인날을 먼저 잡으라고 하였다.[『영조실록』 19년 2월 22일] 이에 영의정 신만(申晩)의 아들인 신광수(申光綬)가 화협옹주의 부마로 결정되었으며, 신광수는 영성위에 봉해졌다.[『영조실록』 19년 4월 5일] 그리고 그로부터 한 달 후 화협옹주와 신광수는 혼인하였다. 이때 가뭄이 들었으므로 영조는 혼인을 미루고자 하였으나, 신하들이 그대로 진행하되 절약하여 거행할 것을 건의하였으므로 이를 따랐다.[『영조실록』 19년 윤4월 28일]
1752년(영조 28) 영조는 화협옹주의 집을 방문하였다가 밤이 깊도록 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동이 틀 무렵에 환궁하였다.[『영조실록』 28년 11월 25일] 그런데 이틀 후 화협옹주가 2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이 소식을 들은 영조는 날이 밝기도 전에 옹주의 집으로 가려고 하였다. 이에 신하들이 1748년(영조 24) 화협옹주의 친언니인 화평옹주가 세상을 떠나 상(喪)을 치룰 때 영조의 몸이 적지 않게 손상을 입었다며 가지 말기를 청하였다. 이에 영조는 큰소리로 화를 내며 몸이 손상을 받은 것은 조정 신하들의 당론(黨論)때문이라면서, 옹주의 죽음과 연결시키지 말라고 하였다.[『영조실록』 28년 11월 27일] 사도세자 또한 화협옹주의 죽음에 대해 “그 누이와의 사이에는 특별한 정이 있었는데, 지금 이렇게 세상을 떠나니 이 슬픔을 비유할 데가 없다”며 슬퍼하였다.[『홍재전서(弘齋全書)』 권16 「지(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