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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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옹주(和平翁主)

서지사항
항목명화평옹주(和平翁主)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왕족
유형인물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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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27년(영조 3)~1748년(영조 24) = 22세]. 조선의 제 21대 임금인 영조(英祖)의 딸로 옹주.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어머니는 찬성(贊成)에 증직된 이유번(李楡蕃)의 딸 이영빈(李暎嬪)이다. 남동생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이며, 여동생은 화협옹주(和協翁主)화완옹주(和緩翁主), 그리고 일찍 세상을 떠난 3명이 있다. 부마는 반남 박씨(潘南朴氏)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다. 정조(正祖)의 친고모이기도 하다.

[출생과 혼인생활]
1727년(영조 3) 영조와 이영빈의 사이에서 1남 6녀 가운데 장녀로 태어난 화평옹주(和平翁主)는 5세 때 천연두를 앓았다. 이때 영조는 추국을 정지하고 옹주의 마마를 치료한 두의(痘醫) 이엽(李燁) 등을 가자(加資)하고 상을 내렸다.[『영조실록』 7년 1월 12일] 1735년(영조 11) 화평옹주의 집을 짓기 위하여 영조는 인조(仁祖)의 친동생인 능원대군(綾原大君)의 옛 집 이현궁(梨峴宮)을 수리하게 하였다.[『영조실록』 11년 4월 4일] 이어 화평옹주는 1738년(영조 14) 예조 참판(參判)박사정(朴師正)의 아들인 박명원(朴明源)과 혼인하였으며, 부마 박명원은 금성위에 봉해졌다.[『영조실록』 14년 2월 30일]

화평옹주는 자신의 마음을 잘 알아준다며 영조가 특히 사랑한 옹주였다. 그런데 1748년(영조 24) 병에 걸려 위독해진 화평옹주가 가인(家人)을 시켜 영조에게 다시 천안(天顔)을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소식을 전하자, 영조는 옹주의 집으로 바로 거둥하였다. 그러나 화평옹주는 끝내 2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영조는 빈소(殯所)에서 통곡하면서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였다. 이 날 날씨가 매우 더웠는데도 영조는 환궁하지 않고 밤을 새웠다.[『영조실록』 24년 6월 24일]

영조는 화평옹주의 장례일이 가까워지면서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 옹주의 집에 행행하였는데, 부마 박명원의 만류도 듣지 않을 정도였다.[『영조실록』 24년 7월 3일] 그리하여 전후 곡림(哭臨)한 것이 모두 다섯 번이었다.[『영조실록』 24년 윤7월 29일] 그리고 화평옹주의 장례를 지냈을 때 영조가 내린 의물(儀物)의 성대함은 국장(國葬)에 버금갈 정도였다. 분묘(墳墓)를 만드는 데만도 수개월이 걸려 주위 백성들이 피해를 보기도 하였다.[『영조실록』 24년 8월 2일] 이후에도 영조는 어딘가에 갔다 환궁할 때면 화평옹주를 잊지 못하여 그 집을 방문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이것이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영조실록』 25년 5월 5일],[『영조실록』 25년 5월 13일],[『영조실록』 25년 6월 23일],[『영조실록』 27년 1월 9일]

[묘소 및 후손]
화평옹주의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파주1리 산 57-1에 있으며, 부마 박명원과 합장하였다. 1790년(정조 14) 영조의 친필로 비문을 쓴 묘비가 세워졌다.

화평옹주와 부마 박명원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으므로, 부마 박명원의 맏형 박흥원(朴興源)의 3남 박수현(朴壽賢)을 계후로 삼았다.[『영조실록』 24년 6월 24일] 박수현은 뒤에 박상철(朴相喆)로 이름을 바꾸었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국조보감(國朝寶鑑)』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 『한중록(閑中錄)』
■ 『연암집(燕巖集)』
■ 『홍재전서(弘齋全書)』
■ 지두환, 『영조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9.

■ [집필자] 정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