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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20년(숙종 46)~1758년(영조 34) = 39세]. 조선의 제 21대 임금인 영조(英祖)의 딸로 옹주.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어머니는 이준철(李竣哲)의 딸인 이정빈(李靖嬪)이다. 친오라버니는 효장세자(孝章世子)로 더 잘 알려져 있는 경의군(敬義君)이고, 친언니는 화억옹주(和憶翁主)이다. 부마는 경주 김씨(慶州金氏)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이다.
[출생과 혼인생활]
1720년(숙종 46) 화순옹주(和順翁主)는 영조와 이정빈의 1남 2녀 가운데 차녀로 태어났다. 어머니 이정빈은 동궁전 나인으로 있다가 영조가 연잉군(延礽君)이었을 때에 영조의 후궁이 되었으나, 화순옹주가 태어난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게다가 언니 화억옹주도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으므로 화순옹주는 실질적인 장녀로서 영조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그러다가 6세가 된 1725년(영조 1) 화순옹주로 봉해졌다.[『영조실록』 1년 2월 18일]
1758년(영조 34) 부마 김한신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영조는 슬퍼하며 현종(顯宗)의 딸인 명안공주(明安公主)의 부마 해창위(海昌尉) 오태주(吳泰周)의 예(例)에 따라 김한신의 장례를 거행하도록 하였다.[『영조실록』 34년 1월 4일] 그런데 화순옹주는 부마 김한신이 세상을 떠난 후 7일 동안 곡기를 끊으며 부마를 따라가려 하였고, 걱정이 된 영조는 직접 화순옹주 집에 거둥하여 화순옹주를 달랬다. 이에 화순옹주는 약을 먹어보려 하였으나 곧 토하고 말았다.[『영조실록』 34년 1월 8일],[『영조실록』 34년 1월 17일] 이후 화순옹주는 계속해서 곡기를 끊었으며, 그렇게 10일째 되던 날 영조는 결국 병이 나서 가망이 없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영조실록』 34년 1월 14일] 그리고 그로부터 사흘 후 부마 김한신이 세상을 떠난 지 13일 만에 화순옹주 또한 세상을 떠났다.[『영조실록』 34년 1월 17일]
영조가 화순옹주의 상(喪)에 다녀간 후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이 화순옹주를 정려(旌閭)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영조는 자식으로서 아비의 말을 따르지 않고 마침내 굶어 죽었으니 효(孝)에 모자람이 있고, 아비가 되어 자식을 정려하는 것은 자손에게 법을 주는 도리가 아니며 또한 뒤에 폐단이 될 수 있다며 허락하지 않았다.[『영조실록』 34년 1월 17일]
[묘소 및 후손]
화순옹주의 묘소는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부마 김한신과 합장되어 있다. 정조(正祖)는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기 위하여 옹주를 열녀로 봉하고, 열녀정문을 세웠다.[『정조실록』 7년 2월 6일] 화순옹주의 열녀정문은 ‘화순옹주홍문(和順翁主紅門)’이며 1976년 충남유형문화재 제 45호로 지정되었다.
화순옹주는 부마 김한신과의 사이에 자식이 없었으므로, 부마 김한신의 형인 김한정(金漢禎)의 3남 김이주(金頤柱)를 양자로 들였다. 김이주는 해평 윤씨(海平尹氏) 윤득화(尹得和)의 딸과 결혼하여 4남 2녀를 두었는데, 4남 김노경(金魯敬)의 아들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