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1587년(선조 20)~1627년(인조 5) = 41세]. 조선의 제14대 임금인 선조(宣祖)의 딸로 옹주.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어머니는 전생서(典牲署) 주부(主薄)를 지낸 김한우(金漢佑)의 딸인 김인빈(金仁嬪)이다. 친오라버니는 의안군(義安君), 신성군(信城君), 정원군(定遠君)이며, 친언니는 정신옹주(貞愼翁主), 정혜옹주(貞惠翁主)이다. 친남동생은 의창군(義昌君)이고, 친여동생은 정안옹주(貞安翁主), 정휘옹주(貞徽翁主)이다. 부마는 평산 신씨(平山申氏)로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이다. 인조(仁祖)의 고모이기도 하다.
[출생과 혼인생활]
1587년(선조 20) 선조와 김인빈의 사이에서 태어난 정숙옹주(貞淑翁主)는 선조로부터 『소학(小學)』을 배웠고, 궁인을 따라 『십구사략(十九史略)』을 익혔다. 1595년(선조 28) 정숙옹주로 봉해졌으며, 1599년(선조 32) 영의정 신흠(申欽)의 아들인 신익성과 결혼하였는데, 부마 신익성은 동양위에 봉해졌다.[『선조실록』 32년 11월 26일]
1627년(인조 5) 정숙옹주는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친조카인 인조(仁祖)는 친제(親祭)를 정지하라고 하였다.[『인조실록』 5년 11월 6일] 이때 정숙옹주의 예장일(禮裝日)이 세자 가례(嘉禮)와 겹쳤으므로 인조는 세자의 가례를 연기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신하들이 『예기(禮記)』의 증자문(曾子問)에서 소공(小功)과 시마(緦麻)는 가벼우므로 혼례를 폐하지 않고 예를 마친 다음 곡하는 것이라고 하였다며 정숙옹주는 세자의 소공친(小功親)이므로 비록 초상 중이라도 혼례를 폐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인조실록』 5년 12월 4일] 결국 인조는 신하들의 말에 따라 정숙옹주의 예장은 세자의 가례일 다음날에 광주(廣州) 동면(東面) 고랑리(古浪里)에서 행해졌다. 그리고 인조는 정숙옹주의 자손에게 3년 상을 지내는 동안 왕자의 예에 따라 녹봉을 지급하도록 하였다.[『인조실록』 6년 9월 28일]
[묘소 및 후손]
정숙옹주의 묘소는 광주 동면 고랑리에 있다.
정숙옹주는 부마 신익성과의 사이에서 5남 4녀를 두었는데, 1남은 신면(申冕), 2남은 신승(申昇), 3남은 신경(申炅)이며, 4남은 신최(申最), 5남은 신향(申晑)이다. 그리고 1녀인 신혜순(申惠順)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2녀인 신경강(申敬康)은 홍명하(洪命夏)와 결혼하였으며, 3녀인 신순강(申順康)은 강문두(姜文斗)와 4녀인 신지강(申止康)은 김좌명(金佐明)과 각각 혼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