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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17년(중종 12)~1581년(선조 14년) = 65세]. 조선의 제11대 왕인 중종(中宗)의 딸로 옹주.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어머니는 중종의 후궁으로 병절교위(秉節校尉) 이백선(李白先)의 딸인 이숙원(李淑媛)이다. 친동생은 효정옹주(孝靜翁主)이다. 부마는 여산 송씨(礪山宋氏)로 여성위(礪城尉) 송인(宋寅)이다.
[출생과 혼인생활]
1517년(중종 12) 정순옹주는 중종과 이숙원의 사이에서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정순옹주의 어머니인 이숙원이 1520년(중종 15)에 세상을 떠나자, 자순대비(慈順大妃)와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정순옹주를 돌보았다. 1526년(중종 21) 정순옹주라는 봉작을 받고, 부마로 송지한(宋之翰)의 아들 송인(宋寅)이 정해졌으며, 2년 후인 1528년(중종 23) 정순옹주는 송인과 결혼하였다.[『중종실록』 21년 12월 4일] 부마 송인은 여성위에 봉해졌는데, 경학(經學)과 예학(禮學)에 뛰어나서 당대의 석학들인 이황(李滉)·이이(李珥) 등과 교류하였다.[『선조수정실록』 17년 7월 1일]
그런데 부마는 첩을 둘 수 없음에도 송인은 첩을 두어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1544년(중종 39) 정순옹주의 친동생 효정옹주가 해산 후 사망하였다.[『중종실록』 39년 2월 19일] 중종은 효정옹주의 부마 순원위(淳原尉) 조의정(趙義貞)이 효정옹주의 여비(女婢) 풍가이(豊加伊)를 첩으로 삼은 후 효정옹주를 소박한 것을 문제 삼아 조의정은 유배를 보내고, 풍가이는 장 백 대를 때린 후 풀어줬다.[『중종실록』 39년 2월 23일],[『중종실록』 39년 3월 17일] 그러나 정순옹주와 효정옹주의 이모로 당시 상궁이었던 은대(銀代)가 내수사(內需司)의 종들을 시켜 풍가이를 가두고 매를 때려 죽게 만드는 사건이 벌어졌다.[『중종실록』 39년 6월 4일] 이때 조정에서는 은대의 처벌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은대가 송인과 간통한 종 2명과 갓난아기를 죽인 사실도 드러났다.[『중종실록』 36년 6월 4일],[『중종실록』 39년 6월 5일],[『중종실록』 39년 6월 28일] 이에 중종은 결국 은대를 대구로 유배 보냈다.[『중종실록』 39년 7월 16일] 이 외에도 송인은 첩으로부터 2명의 아들 송유순(宋惟純)과 송유량(宋惟良)을 얻기도 하였다.
한편 1580년(선조 13) 정순옹주의 본가가 화재로 소실되자, 선조(宣祖)는 옹주가 여염의 상가(常家)에 거주할 수 없다며 그 집을 다시 지어주라고 하였다.[『선조실록』 13년 8월 2일] 그리고 이듬해인 1581년(선조 14) 정순옹주는 65세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와 후손]
정순옹주의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에 있다.
정순옹주는 부마 송인과의 사이에 1남 송유의(宋惟毅)를 두었는데, 돈녕부(敦寧府) 봉사(奉事)를 지냈으며, 이조 판서(判書)를 지낸 정대년(鄭大年)의 딸과 혼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