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1514년(중종 9)~1580년(선조 13) = 67세]. 조선의 제11대 임금인 중종(中宗)의 딸로 옹주.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어머니 박경빈(朴競嬪)은 <중종반정(中宗反正)>을 주도한 정국공신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 박원종(朴元宗)의 수양딸로, 친아버지는 경상도 상주 지방의 사족 출신 박수림(朴秀林)이다. 친오라버니는 복성군(福城君)이며, 친언니는 혜순옹주(惠順翁主)이다. 부마는 남양 홍씨(南陽洪氏)로 당성위(唐城尉) 홍여(洪礪)이다. <작서(灼鼠)의 변>에 연루되어 작호를 박탈당하고 폐서인 되었다가, 복작(復爵)되었다.
[출생과 혼인생활]
혜정옹주(惠靜翁主)는 1514년(중종 9) 중종과 박경빈의 사이에서 1남 2녀 가운데 차녀로 태어났다. 1525년(중종 20) 판결사(判決事)홍서주(洪敍疇)의 아들 홍여(洪礪)와 결혼하였는데, 남편인 홍여는 당성위에 봉해졌다.
중종은 혜정옹주를 시집보내기 전에 옹주의 집을 지어주려고 하였는데, 집의 규모가 지나치게 크고 사치스럽다고 신하들이 상소하였다.[『중종실록』 18년 4월 25일] 그러나 중종은 혜정옹주의 집은 70칸으로 비록 대전(大典)에 실린 제도보다 지나친 것 같으나 용도를 헤아려 짓는 것이므로 고칠 수 없다고 고집하였다.[『중종실록』 18년 4월 25일] 또한 신하들은 혜정옹주의 집 역사에 유위군(留衛軍)을 보내지 말 것을 청하였으나, 중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중종실록』 21년 1월 26일],[『중종실록』 21년 1월 27일]
1527년(중종 22) 작서의 변에 연루되어 혜정옹주의 어머니인 박경빈과 친오라버니 복성군은 유배되었다. 그리고 몇 년 뒤인 1533년(중종 28) 세자를 모함하려 했다는 <가작인두의 변>으로 어머니 박경빈과 친오라버니 복성군에게 사약이 내려졌고, 혜정옹주의 부마 홍여는 자복하지 않다가 추국 중에 세상을 떠났다.[『중종실록』 28년 5월 23일],[『중종실록』 28년 5월 26일] 이때 혜정옹주는 폐서인이 되었다.[『중종실록』 28년 5월 26일] 그러나 1537년(중종 32) 가작인두의 변으로 모함한 것이 김안로(金安老)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김안로가 축출되었고, 혜정옹주는 도성 안으로 들어와 살게 되었다.[『중종실록』 32년 11월 26일] 그리고 1541년(중종 36) 세자가 복성군의 딸 및 이복누이인 혜순옹주와 혜정옹주를 용서해 줄 것을 상소하였다. 복성군의 딸이 민간에 버려져 서인과 다름없이 되었고, 두 옹주도 속적(屬籍)에서 제적되었는데 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냐며 그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요청한 것이었다. 이에 중종은 속적을 회복시켜 직첩을 돌려주었다.[『중종실록』 36년 11월 9일],[『명종실록』 즉위년 7월 23일]
[묘소와 후손]
혜정옹주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울대리 307-1에 있다.
혜정옹주는 부마 홍여와의 사이에 1녀를 두었는데,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오라버니인 윤임(尹任)의 손자이자 윤흥인(尹興仁)의 아들인 윤호(尹琥)와 결혼하였다. 1580년(선조 13) 윤호가 남도우후(南道虞候)가 되어 떠나려 하자, 선조는 혜정옹주의 병이 위중하고 간호할 다른 자녀가 없으니 본직을 체직하고 간호하게 하였다.[『선조실록』 13년 4월 11일] 그리고 며칠 뒤인 4월 21일 혜정옹주는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