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자료문의 : 한국학중앙연구원 031-730-8765

휘순공주(徽順公主)

서지사항
항목명휘순공주(徽順公主)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왕족
유형인물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자료문의 연락처: 한국학중앙연구원 031-730-8765


[총론]
[1492년(성종 23)~? = ?]. 조선 제10대 임금인 연산군(燕山君)의 딸로 공주.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폐서인(廢庶人)되었다. 이름은 이수억(李壽億)이며, 휘신공주(徽愼公主)라고도 한다. 어머니는 연산군의 정비(正妃)로, 거창 신씨(居昌愼氏) 신승선(愼承善)의 딸인 폐비 신씨(廢妃愼氏)이다. 부마는 능성 구씨(綾城具氏)로 능양위(綾陽尉) 구문경(具文璟)인데, 중종반정 이후 이혼하였다가 2년 후 재결합하였다.

[출생 및 혼인 생활]
연산군과 폐비 신씨의 첫째 딸로 태어난 휘순공주(徽順公主)는 11세가 되던 1502년(연산군 8) 구수영(具壽永)의 아들 구문경과 혼인하였다. 이에 앞서 그 한 해 전인 1501년(연산군 7) 구문경은 휘순공주의 부마로 간택되면서 능양위가 되었다.[『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7년 윤7월 3일] 이런 가운데 휘순공주의 집이 완성되었고, 1503년(연산군 9) 휘순공주는 본격적인 혼인 생활을 위하여 궁을 나왔다.[『연산군일기』 9년 3월 1일] 그리고 얼마 후 연산군은 휘순공주의 집을 넓히기 위하여 해당 관사를 통해 수십 채의 가옥 값을 주고 헐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듬해인 1504년(연산군 10)에는 휘순공주의 집을 압박한다는 이유로 평시서(平市署)의 터를 이동시키기도 하였다.[『연산군일기』 9년 3월 6일],[『연산군일기』 10년 8월 20일] 그리고 그해 12월에는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처형된 임희재(任熙載)의 부인이자 구문경의 누이인 구순복(具順福)에 대하여 휘순공주의 뜻에 따라 남편에게 연좌시키지 않고 놓아주었다.[『연산군일기』 10년 12월 14일]

휘순공주에 대한 연산군의 특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성종(成宗) 대에 관노비를 사점(私占)하여 장리(贓吏)로 금고형에 처해진 강학손(姜鶴孫)은 휘순공주에게 뇌물을 주는 방법을 통해 연산군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다.[『연산군일기』 11년 7월 4일],[『중종실록(中宗實錄)』 2년 5월 8일],[『중종실록』 6년 5월 25일] 또 휘순공주 유모의 남편인 이팽동(李彭同) 등은 그 세력을 믿고 제멋대로 행동하여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연산군일기』 11년 9월 4일] 이 외에도 휘순공주의 노비는 잡역을 면제해 주고, 그 전지는 세금이 제외되었다.[『연산군일기』 11년 11월 28일],[『연산군일기』 12년 3월 18일]

그러던 가운데 1506년(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中宗)이 왕위에 오르면서 휘순공주 또한 폐서인되었다.[『중종실록』 1년 9월 11일] 이어 시아버지 구수영은 자신의 아들이 죄인의 사위가 되었다면서 휘순공주와 구문경의 이혼을 허락해 줄 것을 조정에 요청하여 허락 받았다.[『중종실록』 1년 9월 25일] 그러나 2년 후인 1508년(중종 3)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정광필(鄭光弼)은 부부는 난신자녀(亂臣子女)에 포함되어 있어도 국가에서 이혼시킬 수 없는 것이라며 휘순공주 부부의 재결합을 주장하였다.[『중종실록』 3년 10월 7일] 이에 중종은 부원군(府院君) 이상끼리 의논하도록 하였고, 이 모임에서 출가한 딸은 친부 쪽의 죄에 연좌시키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오면서 휘순공주 부부는 재결합 하였다.[『중종실록』 3년 10월 7일],[『중종실록』 3년 10월 7일] 그리고 사간원(司諫院)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종반정 당시 몰수된 휘순공주의 집을 대신하여 빈 집을 주든가 빈 집에 해당하는 면포를 주도록 하였다.[『중종실록』 3년 10월 10일],[『중종실록』 3년 10월 15일]

[묘소 및 후손]
휘순공주의 묘소는 남편 구문경의 묘소와 함께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77번지에 있다.

휘순공주는 구문경과의 사이에서 1남 구엄(具渰)을 두었다. 한편 중종반정 이후 연산군의 아들들도 처형되는 바람에 연산군이 죽은 후에는 그 제사를 지낼 후손이 없었다. 그리하여 구엄이 외손봉사(外孫奉祀)를 하였는데, 이 덕분에 구엄은 유배를 갈 때에도 가까운 곳으로 배정 받는 등 조정으로부터 많은 특혜를 받았다.[『명종실록(明宗實錄)』 1년 5월 25일],[『명종실록』 4년 10월 2일] 그러나 구엄 또한 제사를 이을 아들이 없었으므로, 연산군의 제사는 구엄의 외손자인 이안눌(李安訥)에게로 이어졌다.

[참고문헌]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지두환, 『연산군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8.

■ [집필자] 정주영, 김가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