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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92년(성종 23)~? = ?]. 조선 제10대 임금인 연산군(燕山君)의 딸로 공주.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폐서인(廢庶人)되었다. 이름은 이수억(李壽億)이며, 휘신공주(徽愼公主)라고도 한다. 어머니는 연산군의 정비(正妃)로, 거창 신씨(居昌愼氏) 신승선(愼承善)의 딸인 폐비 신씨(廢妃愼氏)이다. 부마는 능성 구씨(綾城具氏)로 능양위(綾陽尉) 구문경(具文璟)인데, 중종반정 이후 이혼하였다가 2년 후 재결합하였다.
[출생 및 혼인 생활]
연산군과 폐비 신씨의 첫째 딸로 태어난 휘순공주(徽順公主)는 11세가 되던 1502년(연산군 8) 구수영(具壽永)의 아들 구문경과 혼인하였다. 이에 앞서 그 한 해 전인 1501년(연산군 7) 구문경은 휘순공주의 부마로 간택되면서 능양위가 되었다.[『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7년 윤7월 3일] 이런 가운데 휘순공주의 집이 완성되었고, 1503년(연산군 9) 휘순공주는 본격적인 혼인 생활을 위하여 궁을 나왔다.[『연산군일기』 9년 3월 1일] 그리고 얼마 후 연산군은 휘순공주의 집을 넓히기 위하여 해당 관사를 통해 수십 채의 가옥 값을 주고 헐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듬해인 1504년(연산군 10)에는 휘순공주의 집을 압박한다는 이유로 평시서(平市署)의 터를 이동시키기도 하였다.[『연산군일기』 9년 3월 6일],[『연산군일기』 10년 8월 20일] 그리고 그해 12월에는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처형된 임희재(任熙載)의 부인이자 구문경의 누이인 구순복(具順福)에 대하여 휘순공주의 뜻에 따라 남편에게 연좌시키지 않고 놓아주었다.[『연산군일기』 10년 12월 14일]
[묘소 및 후손]
휘순공주의 묘소는 남편 구문경의 묘소와 함께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77번지에 있다.
휘순공주는 구문경과의 사이에서 1남 구엄(具渰)을 두었다. 한편 중종반정 이후 연산군의 아들들도 처형되는 바람에 연산군이 죽은 후에는 그 제사를 지낼 후손이 없었다. 그리하여 구엄이 외손봉사(外孫奉祀)를 하였는데, 이 덕분에 구엄은 유배를 갈 때에도 가까운 곳으로 배정 받는 등 조정으로부터 많은 특혜를 받았다.[『명종실록(明宗實錄)』 1년 5월 25일],[『명종실록』 4년 10월 2일] 그러나 구엄 또한 제사를 이을 아들이 없었으므로, 연산군의 제사는 구엄의 외손자인 이안눌(李安訥)에게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