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1530년(중종 25)~1584년(선조 17) = 55세]. 조선 제11대 왕인 중중(中宗)의 딸로 공주. 어머니는 중종의 계비(繼妃)로, 파산부원군(坡山府院君) 윤지임(尹之任)의 딸인 문정왕후(文定王后)이다. 친동생은 제13대 왕인 명종(明宗)이며, 배다른 오빠로는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아들인 제12대 왕 인종(仁宗)이 있다. 친언니는 효혜공주(孝惠公主), 의혜공주(懿惠公主), 효순공주(孝順公主)이며, 친여동생은 인순공주(仁順公主)이다. 부마는 고령 신씨(高靈申氏)로 영천위(靈川尉) 신의(申檥)와 혼인하였다.
[출생 및 혼인 생활]
1530년(중종 25) 중종과 문정왕후의 셋째 딸로 태어난 경현공주(敬顯公主)는 공주로는 넷째 공주였으며, 8세가 되던 1537년(중종 32) 경현공주로 봉해졌다.[『팔곡집(八谷集)』 권3 「유명조선국경현공주묘지명(有明朝鮮國敬顯公主墓誌銘)」] 1541년(중종 36) 3월 사헌부(司憲府)에서는 경현공주의 집이 완성이 되자마자 바로 옛 집을 개조하라는 중종의 명에 백성들이 고달프다며 반대하였으나, 중종은 원래의 뜻을 꺽지 않았다.[『중종실록(中宗實錄)』 36년 3월 7일] 이어 그해 9월 모든 공주와 군(君) 가운데서 길례를 행해야 하는 경현공주와 봉성군(鳳城君)의 집을 먼저 공사하도록 지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군과 공주, 옹주의 집들을 화려하게 짓는 바람에 백성들의 노역이 심하다는 문제가 제기되기도 하였다.[『중종실록』 36년 9월 22일] 그해 경현공주는 신수경(申秀涇)의 아들 신의와 혼인하였고, 부마가 된 신의는 영천위에 봉해졌다.[『팔곡집』 권3 「유명조선국경현공주묘지명」] 그리고 1546년(명종 1) 경현공주와 신의 사이에서 아들 신사정(申士楨)이 태어났다.
한편 경현공주는 남편뿐만 아니라, 아들 신사정 때문에도 마음 고생을 하였다. 신사정은 문정왕후의 국상(國喪) 기간 또한 기생과 간통하였을 뿐 아니라, 어머니 경현공주와 외할머니 문정왕후의 물건을 간통한 기생에게 가져다주기까지 하였다.[『명종실록』 21년 월 28일 1번째기사] 게다가 아버지 신의와의 관계도 매우 좋지 않아서, 신의가 형벌을 받거나 귀양을 갈 때에도 태연하였는데, 결국 이것이 문제가 되어 신사정은 사판(仕版)에서 이름이 삭제되었다.[『선조실록』 1년 8월 8일]
이러한 가정 불화 속에서 화병이 나기도 하였던 경현공주는 1584년(선조 17) 남편 신의가 세상을 떠난 후 그해 8월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팔곡집』 권3 「유명조선국경현공주묘지명」]
[묘소와 후손]
묘소는 광주 치동 목관리에 위치하는데, 현재의 경기도 광주시 목현동이다. 오른 편에는 남편 신의의 묘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