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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61년(현종 2)∼1729년(영조 5) = 69세]. 조선 후기 숙종(肅宗)~영조(英祖) 때의 문신. 형조 판서(判書)를 지냈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익헌(翼獻)이고, 자는 길보(吉甫)이며, 호는 이지(二知) 또는 이지당(二知堂)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거주지는 서울과 양주(楊州)이다. 아버지는 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를 지낸 윤택(尹澤)이고, 어머니 순흥 안씨(順興安氏)는 안영달(安穎達)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제용감(濟用監)봉사(奉事)를 지낸 윤수열(尹受說)이며, 증조할아버지는 병조 참판(參判)에 추증된 윤종복(尹宗福)이다. 세종(世宗)의 부마 충경공(忠景公) 윤사로(尹師路)의 9대손이기도 하다. 분무원종공신(奮武原從功臣)이며, 김창협(金昌協)의 문인이고, 영의정 이의현(李宜顯)과 절친한 사이였다.
[숙종 시대 활동]
1683년(숙종 9)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에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3세였다.[「방목(榜目)」]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서 공부하였으나, 과거에 거듭 실패하자, 음직으로 나가서 참봉(參奉)을 거쳐 봉사로 승진하였다.[『도곡집(陶谷集)』 권11 「형조판서윤공신도비명(刑曹判書尹公神道碑銘)」 이하 「윤헌주비명」으로 약칭] 1698년(숙종 24) 9월 왕이 문묘(文廟)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춘당대(春塘臺)에서 과거 시험을 실시하자, 이에 응시하여 알성(謁聖) 문과(文科)에 갑과(甲科)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였는데, 당시 나이가 38세였다.[「방목」] 그때 문과에서 윤헌주(尹憲柱)를 비롯한 6인을 뽑아서 즉시 방방(放榜)하고 왕이 하례를 받았다.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으므로, 6품의 홍문관(弘文館)전적(典籍)에 임명되었다가, 예조 좌랑(佐郞)과 병조 좌랑을 거쳐 황해도도사(黃海道都事)로 나갔다. 또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과 사간원 헌납(獻納)을 거쳐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과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윤헌주비명」] 1699년(숙종 25) 4월 사헌부 장령 윤홍리(尹弘离)가 “식년시(式年試) 이소(二所)를 주관하는 관원 윤헌주가 추첨(抽籤)할 때 은밀히 사표(私標)를 사용하여 자기의 친소(親疏)에 따라 제멋대로 당락을 시켰으니, 그를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라고 탄핵하였다. 이에 사헌부 장령에서 파직되었다가, 그해 6월 사간원 정언으로 복직하였고, 윤7월에는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숙종실록』 25년 6월 24일],[『숙종실록』 25년 윤7월 17일] 그때 궁중에서 민간의 토지를 점탈하여 궁장토(宮庄土)로 만드는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궁장(宮庄) 혁파를 건의하였는데, 숙종이 가납(嘉納)하였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윤헌주비명」]
1701년(숙종 27) 4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사서(司書)에 임명되었다가, 5월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숙종실록』 27년 4월 11일],[『숙종실록』 27년 5월 19일] 이때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세상을 떠났는데, 장희빈(張禧嬪)의 저주 때문이라는 설이 파다하였다.[『약천집(藥泉集)』 권21] 소론(少論)의 영의정 남구만(南九萬)과 이조 판서 유상운(柳尙運) 등은 세자(世子 : 경종)를 위하여 장희빈을 죽이지 말도록 권유하였으나, 숙종은 장희빈과 그 오빠 장희재(張希載)의 처형을 감행하였다. 그해 10월 사헌부 장령이던 윤헌주와 사헌부 지평 이동언(李東彦) 등은 장희빈과 <장희재의 옥사>에 연루된 이들을 관대하게 처벌할 것을 권유한 남구만과 유상운을 파직시키도록 상소했으나, 숙종이 허락하지 않았다.[『약천집』 권21],[『숙종실록』 27년 10월 22일] 이어 11월에는 세자시강원 문학(文學)에 임명되어 세자를 가르쳤고, 이듬해인 1702년(숙종 28)에는 장악원(掌樂院)정(正)과 군자감(軍資監) 정을 지냈다.[「윤헌주비명」],[『숙종실록』 27년 11월 9일]
1703년(숙종 29) 7월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을 거쳐 9월에는 사간원 헌납이 되고, 11월에는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을 거쳐 12월에 사간원 사간(司諫)이 되었다.[『숙종실록』 29년 7월 14일],[『숙종실록』 29년 9월 24일],[『숙종실록』 29년 11월 21일],[『숙종실록』 29년 12월 21일] 그때 배리(陪吏)에게 패(牌)를 받기 전에 장관인 사간원 대사간(大司諫)과 상의하지 않고 사건을 먼저 처리한 후 임의대로 숙종에게 보고하였다가, ‘사실을 위장하여 왕을 속였다는 죄목’으로 사판(仕版)에서 이름을 삭제당하는 율(律)을 당하였다. 그리하여 영구히 벼슬하지 못하게 되었으나, 1704년(숙종 30) 1월 사간원 대사간 신임(申銋)의 상소로 숙종에게 용서를 받았다.[『숙종실록』 30년 1월 22일] 이때 좌의정 이여(李畬)는 “대각(臺閣)은 왕의 이목을 대신하는 관원이니, 왕을 속인 것이 사실이라면 마땅히 중한 죄로 다스려야 합니다” 하였으나, 노론(老論)의 중진들이 그를 적극 구원하면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1705년(숙종 31) 8월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숙종실록』 31년 8월 19일] 그런데 이때 숙종이 갑자기 세자에게 전위(傳位)하겠다는 명령을 내렸는데, 숙종의 측근에 있던 그가 적절히 대처하여 결국 숙종의 마음을 돌렸으므로, 사림(士林)에서는 그가 훌륭하게 왕을 보필하였다고 칭찬하였다.[「윤헌주비명」] 이어 윤헌주는 늙은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외직을 청원하여 남양(南陽)과 양주에 수령관에 임명되었으나, 숙종이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1706년(숙종 32) 여주목사(驪州牧使)에 임명되었는데, 부임하기도 전에 소론의 무고를 당하였다. 5년 전인 1701년(숙종 27) 윤순명(尹順命)이란 자가 “장희재의 처가 김춘택(金春澤) 등과 간통했다”라고 하고, 또 “그들이 세자를 모해하려고 하였다”고 투서하였는데, 당시 문사낭청(問事郞廳)의 낭관(郎官)이었던 윤헌주가 노론 김춘택의 죄를 가볍게 하고자 김춘택의 간통만 조사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세자 모해 사실은 숨긴 채 국청(鞫廳)의 당상관에게 보고하지 않았으므로, 국청의 당상관은 김춘택의 모역죄를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 무고의 내용이었다. 이 일로 그는 체포되어 심문 후 파직되었다.[「윤헌주비명」]
그렇지만 그는 곧바로 그해 11월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임명되었다가,[『숙종실록』 32년 11월 1일] 병든 어버이를 위하여 파주현감(坡州縣監)으로 나갔는데, 부친상·모친상을 거듭 당하면서 벼슬을 그만두고 양주의 선영에서 여묘살이를 하였다. 1713년(숙종 39) 1월 상례(喪禮)를 마친 후, 승정원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다가 병조 참의(參議)로 전직되었고, 다시 성주목사(星州牧使)로 나갔다.[『숙종실록』 39년 1월 11일] 1716년(숙종 42) 흉년이 들자, 10월에 숙종이 여러 도(道)의 진휼(賑恤) 행정을 점검하였는데, 성주목사 윤헌주와 평해군수(平海郡守) 이익필(李益馝) 등이 기민(饑民)을 가장 잘 구휼하였으므로, 숙종이 윤헌주를 특별히 승품(陞品)시키고, 의금부(義禁府)동지사(同知事)로 소환하였다.[『숙종실록』 42년 10월 11일],[「윤헌주비명」]
1717년(숙종 43) 숙종이 노병으로 충청도 온양군(溫陽郡)의 온천에 자주 가게 되자, 의정부에서는 그해 2월 그를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임명하였다.[『숙종실록』 43년 2월 8일] 윤헌주는 숙종이 온양 온천에 거둥하여 유숙하는 데 아무런 불편이 없도록 미리 대책을 세워서 적절하게 조치하였으므로 숙종의 신임을 받았다. 충청도관찰사의 임기를 마친 후, 윤헌주는 한성부좌윤(漢城府佐尹)과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형조 참판·병조 참판·호조 참판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윤헌주비명」] 1719년(숙종 45) 5월 숙종은 윤헌주를 승정원 도승지(都承旨)로 발탁하였으나 그는 이를 사양하였고, 7월에 다시 임명되었을 때에도 자신은 세상 물정에 어둡다면서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숙종실록』 45년 5월 17일],[『숙종실록』 45년 7월 13일],[『숙종실록』 45년 7월 14일]
숙종은 병이 깊어지면서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켰는데, 세자는 노론이 반대하던 장희빈의 아들이었다. 그러므로 세자를 둘러싸고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소론과 직접 권력 투쟁을 벌이는 일도 윤헌주에게는 매우 버거운 일이었다. 이에 그는 자청하여 충청도균전사(忠淸道均田使)로 나갔으나,[『숙종실록』 45년 7월 25일] 1719년(숙종 45) 사간원에서 양전(量田)의 업무는 매우 중요한데 윤헌주는 술에 취해 과실이 많다고 개차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소론이 대간(臺諫)을 시켜 그를 탄핵한 것이었다.[『숙종실록』 45년 7월 28일] 대리청정을 하던 세자는 처음에 이를 따르지 않았으나 사간원에서 거듭 탄핵하자, 결국 그를 파직하였다.[『숙종실록』 45년 7월 29일]
[경종 시대 활동]
1720년(경종 즉위년) 6월 경종(景宗)이 33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그리고 7월에 윤헌주는 병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의금부 지사(知事)가 되었다.[『경종실록』 즉위년 7월 21일],[『경종실록』 즉위년 7월 28일] 그러나 소론에 의하여 함경도관찰사(咸鏡監觀察使)로 좌천되었는데, 당시 함경도는 여진족의 풍습을 많이 따르고 있었으므로, 그는 관혼상제의 예절을 보급하였다.[『경종실록』 즉위년 8월 25일] 또 윤관(尹瓘)이 9성(城)을 설치한 두만강변의 6진(鎭)을 순찰하면서 진(鎭)과 보(堡)를 증설하고 군사들을 훈련시켜 국토의 방어 체제를 강화하였다.[「윤헌주비명」] 1721년(경종 1) 10월 조정으로 돌아온 후에는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경종실록』 1년 10월 16일] 그해 12월 소론의 과격파인 김일경(金一鏡)과 박필몽(朴弼夢) 등 7인이 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이건명(李健命)·조태채(趙泰采) 등의 노론 4대신이 왕세제 연잉군(延礽君 : 영조)의 대리청정을 주장한 것은 왕권 교체를 기도한 것이라며 탄핵하여 축출한 뒤, 소론 정권을 수립하였다. 이에 윤헌주는 관직에서 물러나 양주 선친의 묘소 아래 살면서 은거하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은 1722년(경종 2) 3월 목호룡(睦虎龍)이 노론 일파가 경종을 모해하려 했다고 무고하였다. 그 결과 노론의 4대신을 비롯하여 노론의 중진 50여 명이 처형되었고, 그 밖에 노론 인사 170여 명이 유배되었다. 경종 초기 1721년과 1722년에 일어난 이 일련의 사건을 <신임사화(辛壬士禍)>라고 한다. 윤헌주도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하옥되었는데, 이때 대간에서는 그가 함경도관찰사로 있을 때 청렴하지 못했다며 탄핵하였고, 이에 그는 1723년(경종 3) 12월 평안도 용천(龍川)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경종실록』 3년 12월 15일]
[영조 시대 활동]
1724년(경종 4) 8월 경종이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 경종의 나이가 37세였다. 그리고 왕세제 연잉군이 31세로 즉위하니, 그가 바로 영조이다. 궁 내외에서는 노론이 연잉군을 시켜서 경종을 독살하였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았다. 영조는 이러한 풍문을 잠재우고 왕권 초기의 불안정한 국면을 타개하기 위하여 ‘탕평책(蕩平策)’을 내세워 노론과 소론의 연립 정권을 모색하였다. 그러면서 소론의 온건파 대신들을 포섭하고 젊은 과격파는 배척하였는데, 1724년(영조 즉위년) 12월 영조는 소론의 과격파 김일경·박필몽·목호룡 등을 친히 국문한 후 김일경·목호룡은 당고개에서 참형에 처하고, 박필몽 등은 해도(海島)로 유배하였다.[『영조실록』 즉위년 12월 8일] 그리고 이듬해인 1725년(영조 1) 1월 신임사화 때 유배당한 노론의 인사들을 소환하였는데, 이때 윤헌주도 소환되어 다시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다.[『영조실록』 1년 1월 26일] 이어 그는 그해 3월 동궁(東宮 : 사도세자)을 책봉할 때 죽책문(竹冊文)을 쓴 공으로 정2품상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품되었고, 5월에는 의금부 판사를 거쳐 평안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윤헌주비명」],[『영조실록』 1년 5월 5일],[『영조실록』 1년 5월 14일] 평안도는 함경도에 비하여 물화가 풍부할 뿐 아니라, 연경(燕京)에 가는 통역관을 통한 중국 물화 교역으로 부자가 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는 부유한 지방에 오랫동안 관찰사로 있으면 구설수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평안도관찰사를 사양하고, 다시 한성부판윤이 되었다.[「윤헌주비명」],[『영조실록』 2년 8월 28일] 1726년(영조 2) 12월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다가, 1727년(영조 3) 4월 공조 판서로 전임되었고, 5월에 다시 형조 판서가 되었다.[『영조실록』 2년 12월 1일],[『영조실록』 3년 4월 18일],[『영조실록』 3년 5월 2일] 그해 7월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형조 판서 윤헌주가 평안도관찰사로 있을 때 역관에게 수만 냥의 은화를 대출해 주었으므로, 파직해야 마땅합니다” 라고 그를 탄핵하였다.[『영조실록』 3년 7월 5일] 역관에게 중국 물화를 교역하도록 은화를 빌려주어 막대한 부(富)를 축척할 수 있었다는 의혹을 받았던 것인데, 결국 그는 이 일로 파직되었다.
그런 가운데 노론이 지지하는 영조가 즉위하자, 신변에 위협을 느낀 소론의 과격파 이인좌(李麟佐)·박필현(朴弼顯)·정희량(鄭希亮) 등은 영조는 숙종의 아들이 아니고 경종(景宗)은 독살 당하였다고 주장하며, 영조를 몰아내고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증손자 밀풍군(密豐君) 이탄(李坦)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하였다. 이들은 경종의 원수를 갚고 영조를 타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무력을 통한 정권 탈환을 기도하여 1728년(영조 4) 전라도·경상도에서 민중 봉기를 일으켰다. 이것을 <무신란(戊申亂)>, 또는 <이인좌(李麟佐)의 난>이라고 하는데, 이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얼마 후 대사간 송인명(宋寅明)이 북도 지방에서 또 변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며 중신(重臣)을 보내 민심을 진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영조는 그해 3월 윤헌주를 기복(起伏)하여 북도안무사(北道按撫使)로 삼고, 병조 참의 조지빈(趙趾彬)을 양서 안무사(兩西按撫使)로 삼아, 함경도와 평안도의 민심을 안정시키도록 하였다.[『영조실록』 4년 3월 20일]
그리하여 함경도 경성(鏡城)으로 달려간 윤헌주는 북병사(北兵使)의 군대를 먼저 장악하고 함경도의 상황을 조사하였다. 그 결과 박필현의 매형인 함경도관찰사 권익관이 박필현과 내통하며 평안도병마사(平安道兵馬使) 이사성(李思晟)과 함께 북도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윤헌주는 이것에 대한 죄목을 10가지로 나누어 영조에게 장계(狀啓)하였다. 그리고 윤헌주는 함경도관찰사 권익관과 그 일당을 체포하며 함경도 민심을 안정시켰다. 그해 4월 영조는 윤헌주에게 서울로 올라오지 말고 그대로 경흥(慶興)에 머물러 있으면서 북도의 동태를 살피라고 하였다. 당시 전 경흥부사(慶興府使) 황부(黃溥)가 아직 북로(北路)에 머물고 있었는데, 이인좌의 난을 주모한 사람들이 공초에서 그가 함경도 삼봉도(三峰島)에서 배를 만들어 전투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영조실록』 4년 4월 29일] 이에 윤헌주는 황부와 박창제(朴昌悌) 등도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하였으며, 이들은 국청에서 심문을 받다가 모두 매를 맞고 죽었다. 다만 권익관은 영조의 탕평책 덕분에 죽음을 면하고 절도(絶島)에 유배되었다가 몇 년 뒤에 죽었다.
이런 가운데 윤헌주는 권익관·박창제 등이 반란을 일으키려던 진상을 밝혀내고, 함경도의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6진(鎭)을 무리하게 순행하다가 풍토병에 걸려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729년(영조 5) 4월 양주의 집에서 결국 풍토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69세였다.[『영조실록』 5년 4월 17일] 그의 부음이 알려지자, 영조는 예관(禮官)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고, 예장(禮葬)하게 하였다. 이후 그는 이인좌의 난 때 함경도 지방의 민심을 안정시킨 공으로 분무원종공신(奮武原從功臣)으로 추록되었고, 아울러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성품과 일화]
윤헌주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이 소탈하고 대범하며, 정직하여 표리가 똑 같았다. 기개가 대단하고 기풍이 당당하여 다른 사람을 곧잘 감동시켰다. 집안에서 부모를 섬길 때 항상 어버이를 사모하는 마음을 가졌으며, 좋은 때를 만나면 반드시 성대하게 음식을 장만해놓고 손님과 친구를 초청하여 부모님을 즐겁게 해드렸다. 친족과는 화목하고 인척과는 친밀하였으며, 친구와는 신의가 있고 불우한 사람을 불쌍하게 여겼는데, 각각 규칙과 법도가 있었다. 조정에서 발의한 언론(言論)이 바르고 공정하였으나, 일을 꼬치꼬치 파헤치거나 사람에게 각박하게 따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의에 있어서는 확고한 신념을 지켜서 남의 말에 의해 흔들리지 않았다. 재능이 민첩하고 일을 당하여 막히는 바가 없었으므로, 신진의 사류(士類)들은 더러 그를 깊이 알지 못한 채 곡해하였으나, 선배의 노성한 인사들은 너나없이 그의 실력을 인정하여 매우 중하게 여겼다.[「윤헌주비명」]
윤헌주는 사마시의 생원과에 합격한 후 대과(大科)에 거듭 실패하였는데, 혼인을 하여 아이들도 생겨나자 음직으로 관직에 나아갔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하고, 밤늦게까지 책을 읽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속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자기가 윤씨 선조인 윤관이라고 하면서, 대궐에 나아가 계수나무 가지를 꺾어 그에게 주며 “네가 마땅히 호랑이 해[寅年]에 머리에 이 꽃을 꽂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1698년(숙종 24) 무인년(戊寅年) 9월 그는 대과에 급제하였다. 그때 친구 이의현(李宜顯)의 아버지 이세백(李世白)이 우의정으로 숙종을 모시고 성균관에 갔다가, 알성 문과를 주관하게 되었다. 시험의 제목은 ‘함경도의 강토를 개척하여 육진을 설치한 사실’을 논하는 것이었는데, 함경도의 강역은 바로 고려 때 윤관이 개척한 9성의 땅이었다. 윤헌주는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문숙공(文肅公) 윤관이 9성을 개척한 일화를 익숙하게 들었기 때문에 세종(世宗) 때 김종서(金宗瑞)가 개척한 6진이 바로 고려 때 윤관이 개척한 9성의 땅이라고 고증하고, 두만강 유역의 국경을 개척한 정신에 대하여 자세히 밝혔다. 그 글을 읽어본 시관(試官)들은 모두 감탄하여, 윤헌주를 1등 장원으로 뽑았다. 윤헌주는 과거 시험에서 명문 답안을 썼다는 명성을 오래도록 지니고 있었는데, 이것은 숙종 시대에 한동안 과거 합격의 유명한 이야기꺼리가 되어 온 나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윤헌주비명」]
우의정 이세백은 호랑이해에 윤헌주를 비롯하여 6명의 인사를 뽑아서 방방하였다. 이의현은 윤헌주보다 후배였으나, 먼저 문과에 급제하였으므로, 이세백도 윤헌주의 딱한 형편을 알고 있었다. 윤헌주는 이세백 덕택에 과거에 늦게라도 급제하였다. 그러므로 송시열의 제자인 좌의정 이세백이 노론의 중심인물이 되어서 소론과 싸울 때, 그는 이세백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앞장서서 활동하였던 것이다.
노년에 윤헌주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 양주로 돌아가서 은거하다가 나라에서 변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백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위해 지혜를 발휘하여 의리에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에 그가 북도에 가서 위무(慰撫)하자, 권익관 등의 음모가 저절로 수그러들고 함경도 지방이 안정되었다. 그의 30여 년 지기 영의정 이의현은 비명(碑銘)에서, “그의 공로를 논하면, 그 누구와 견줄 수 있겠는가. 고려 문숙공 윤관이 북방의 강토를 개척하여 우리 강역을 넓힌 것과 비교해 볼 때 조금도 손색이 없다고 이를 만하다. 『주시(周詩)』에 이른바 ‘후손이 조상의 뒤를 계승한다’는 말이 또한 윤헌주의 일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윤헌주비명」]
[묘소와 후손]
시호는 익헌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의 선영에 있는데, 이의현이 지은 비명이 남아있다.[「윤헌주비명」]
부인 평양 조씨(平壤趙氏)는 조중정(趙重鼎)의 딸인데, 자녀는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윤경일(尹慶一)은 부사(府使)를 지냈고, 차남 윤경운(尹慶運)은 벼슬을 하지 않았다. 딸은 진사(進士) 이악진(李岳進)에게 시집갔다.[「윤헌주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