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1549년(명종 4)∼1611년(광해군 3) = 63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광해군(光海君) 때의 문신. 우의정과 좌의정, 영의정 등을 지냈다. 자는 자술(子述)이고, 호는 청봉(晴峰)이며,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본관은 해평(海平)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윤홍언(尹弘彦)이고, 어머니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장림(長臨) 수(守) 이순민(李舜民)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이조 참판(參判)윤은필(尹殷弼)이고, 증조할아버지는 군기시(軍器寺)첨정(僉正)을 지낸 윤훤(尹萱)이다. 영의정 이경여(李敬輿)의 장인이기도 하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명(明)나라 군사에게 군량미를 공급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선조 전반기 활동]
25세가 되던 1573년(선조 6) 사마시(司馬試)에 진사과(進士科)로 급제하였고, 같은 해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방목(榜目)』],[『선조실록』 6년 3월 7일] 승문원(承文院) 권지(權知)정자(正字)에 보임되어 참하관(參下官)의 관직을 두루 거쳤다. 1579년(선조 12)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임명되었다가, 1580년(선조 13) 예조 좌랑(佐郞)을 거쳐 1581년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다.[『백사집(白沙集)』 권3 「영부사윤공묘표(領府事尹公墓表)」 이하 「윤승훈묘표」] 그해 7월 사헌부와 사간원의 양사(兩司)에서 척신(戚臣) 심의겸(沈義謙)을 탄핵하였다. 이때 동인(東人) 출신 사헌부 장령(掌令)정인홍(鄭仁弘)과 사간원 정언(正言) 윤승훈이 중심이 되어 심의겸과 그가 추천한 서인(西人)의 정철(鄭澈)·박순(樸淳)·윤두수(尹斗壽) 등을 함께 탄핵하였다. 당시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으로 있던 이이(李珥)가 자신과 가까운 정철 등도 함께 탄핵하는 것에 대하여 반대하자, 윤승훈과 정인홍은 이이를 맹렬히 논박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는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신창현감(新昌縣監)으로 좌천되었다.[『선조실록』 14년 7월 ??일 2번째기사]
1583년(선조 16) 황해도도사(黃海道都事)가 되었는데, 1584년(선조 17) 부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그때 형 윤승길(尹承吉)과 함께 유가(儒家)의 경전(經典)을 읽으면서 형으로부터 학문하는 방법과 공직자의 태도 등을 배웠다. 그 후 윤승훈은 윤승길처럼 행정을 빈틈없이 철저하게 처리하고, 아전들을 억눌러서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도록 하였으며, 소송을 공정하고 신속하게 처결하여 무고한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하였다. 3년 상례(喪禮)를 끝마친 후, 세 번이나 사간원에 들어가서 정언과 헌납(獻納) 등을 역임하였고, 네 번이나 사헌부에 들어가 지평(持平)과 장령 등을 역임하였다.[「윤승훈묘표」]
1587년(선조 20) 3월 황해도구황경차관(黃海道救荒敬差官)에 임명되어 해주 지역을 염찰(廉察)하였다. 이때 윤승훈이 “해주목사(海州牧使) 민준(閔濬)이 구황(救荒)하는 일을 소홀히 하여 죽은 시체가 구덩이에 그대로 방치되어 개들이 떼를 지어 뜯어 먹고 있으니, 지극히 참혹합니다” 라고 서계(書啓)하자, 선조가 화를 내면서 해주목사 민준을 추고하도록 하였다.[『선조실록』 20년 3월 6일] 1589년(선조 22) 4월 한준겸(韓俊謙)·유영경(柳永慶)·정경세(鄭經世) 등 당대의 인재들과 함께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었다.[『선조실록』 22년 4월 4일] 이후 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부터 홍문관 교리(校理)와 홍문관 응교(應敎)까지 역임하였고, 의정부 사인(舍人)으로 전임되었다.[「윤승훈묘표」]
1591년(선조 24) 외직으로 나가 강릉부사(江陵府使)가 되었는데, 그때 일본의 관백(關白)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명나라를 치기 위해 조선으로 군사를 보낼 것이라는 소문이 들렸다. 이에 조정에서는 왜적이 침입할 가능성이 있는 지역의 수령관을 모두 문신에서 무신으로 교체하였으므로, 윤승훈도 강원도 강릉부사에서 해임되어 양주(楊州)의 집으로 돌아왔다.[『자해필담(紫海筆談)』]
[선조 중반기 왜란 때 활동]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선조가 서쪽으로 파천(播遷)을 하게 되자 윤승훈은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선조를 호종하여 평양과 의주로 갔다. 홍문관 응교로 복귀한 후, 그해 5월에는 양호(兩湖) 선유사(宣諭使)에 임명되어 배를 타고 충청도와 전라도에 내려가 백성들을 위무(慰撫)하였다.[『선조실록』 25년 5월 24일] 이어 그해 6월 정3품하 통훈대부(通訓大夫)로 가자(加資)되었고, 7월에는 성균관(成均館)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었다.[『선조실록』 25년 6월 29일],[『선조실록』 25년 7월 4일] 9월 의주 행재소(行在所)로 돌아와 형조 참의(參議)에 임명되었고, 서북 지방의 군량미를 운반하여 군인들에게 공급하는 서로(西路) 조도사(調度使)의 임무를 맡았다.[「윤승훈묘표」],[『선조실록』 25년 9월 25일] 그해 12월 명나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명나라 요동(遼東)의 군사 5만여 명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 2월 평양성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는데, 당시 윤승훈이 조도사로서 명나라 군사에게 군량미를 공급하는 일을 책임졌다.
전시에는 군량미를 모으는 일이 가장 어려운 임무였는데, 구성부사(龜城府使)로 있던 형 윤승길이 앞장서서 군량미를 싣고 의주로 와서 바치자, 그 주민들도 앞을 다투어 군량미를 바쳤다. 이에 다른 주군(州郡)에서도 자진하여 군량미를 바쳤으므로, 군량미를 수집하는 문제가 많이 해결되었다. 조도사 윤승훈이 힘을 다해 군량미를 주선한 결과 조선과 명나라 군대의 식량이 모자라지 않았으므로, 선조는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하였다. 그리고 그해 10월 윤승훈이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승진하였을 때, 형 구성부사 윤승길은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윤승길이 구성에서부터 청주까지 가는데 길면 몇 달의 시간이 소요되고, 충청도의 위기 상황은 워낙 급박하였으므로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한 선조는 동생 윤승훈을 충청도관찰사로 내보내고, 그의 형 윤승길을 승정원 동부승지로 발탁하였다.[『선조실록』 26년 10월 29일]
윤승훈이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하니, 직산에 거주하던 송유진(宋儒眞)이 여러 고을에 격문을 보내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과 병사(兵使) 변양걸(邊良傑)이 군대를 동원하여 진압할 것을 청하자, 윤승훈은 “양민(良民)들이 굶주림과 추위에 핍박받고 있는데, 어찌 이것이 본심이라고 하겠습니까. 쥐새끼 같은 무리들은 얼마 안 가서 저절로 무너져 포박당할 것이니, 군대를 보낼 것까지 있습니까”하였다. 그리고 요속(僚屬)에게 송유진 등의 주모자들을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할 것을 지시하고 그 나머지는 체포하지 않았다.[『선조실록』 27년 1월 28일] 마침 승정원 우부승지로 있던 윤승길이 송유진 등의 주모자들을 심문하는 데에 참여하였는데, 윤승길은 선조에게 “기근과 전쟁으로 어려운 때 역적의 공초에 연루된 사람들을 모두 체포한다면, 인심이 이반할 것입니다” 하고 건의하였다. 이에 선조는 주모자 16명만 처형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불문에 붙였다.
1596년(선조 29) 7월 충청도 홍산(鴻山)의 서인(庶人) 이몽학(李夢鶴)이 농민 반란을 일으켜 홍산현(鴻山縣)과 임천군(林川郡)을 차례로 점령하자, 도원수 권율(權慄)과 충용장(忠勇將) 김덕령(金德齡) 등이 군사를 이끌고 가서 이를 진압하였다. 이에 이몽학은 부하들에게 죽음을 당했고 반란군들은 모두 흩어졌다. 선조는 의금부 동지사 윤승훈을 직산으로 보내 각 고을에서 체포된 반란군을 심문하도록 하였다. 그는 <이몽학의 난> 주모자 1백여 명을 골라 서울로 송치하여 법에 따라 처형하고 가산을 적몰하는 한편, 이들에게 꼬임을 당하거나 위협에 못 이겨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석방하였다.[『선조수정실록』 29년 7월 1일] 이어 그해 10월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가, 12월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선조실록』 29년 10월 9일],[『선조실록』 30년 2월 25일]
1597년(선조 30) 1월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그해 2월 명나라에서는 제 2차 구원병으로 10만여 명 정도를 특별히 파견하였다. 임진왜란 때와 달리, 명나라에서는 현물이 아닌 막대한 양의 은화(銀貨)를 조선에 군사비용으로 보내 군량미를 구입하도록 하였는데, 조정에서는 윤승훈을 사은사(謝恩使)로 파견하였다.[『난중잡록(亂中雜錄)』 권3] 이때 명나라는 군사 1인당 매월 3냥 6전의 은화를 지급하였는데, 정유재란 당시 1년 동안 명나라 군사 10만여 명에게 지급한 대략 4백 32만 냥의 은화가 조선으로 유입된 셈이었다. 그해 9월 중국에서 돌아와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고, 10월 광해군이 전주(全州)에 분조(分朝)를 열자 분사대헌(分大司憲)이 되었으며, 곧 명나라 군사에게 군량미를 공급하는 업무를 총괄하는 4도(道) 총독사(總督使)에 임명되었다.[『선조실록』 30년 9월 15일],[『선조실록』 30년 10월 6일] 그런데 명나라 군사를 이끌고 온 경리(經理) 양호(楊鎬)는 윤승훈을 남정(南征) 양향사(糧餉使)로 삼아 삼로(三路)의 군량미 공급을 총괄하는 한편, 윤승훈으로 하여금 직접 좌영(左營)의 군량미 공급을 맡아 보도록 하였다.[『선조실록』 30년 12월 20일]
[선조 후반기~광해군 초기 활동]
1598년(선조 31) 1월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되었는데, 과로로 병이 나자 선조는 의원을 보내 치료하도록 하였으며, 체직시켜 양주의 집으로 돌아가 몸을 조섭하게 하였다.[『선조실록』 31년 1월 25일],[「윤승훈묘표」] 2월 선조는 정유재란 당시 남정 양향사로서 군량미 공급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던 윤승훈을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특별히 가자하고, 10월 이조 판서(判書)에 임명하였다.[『선조실록』 31년 10월 25일],[「윤승훈묘표」] 그러나 그는 이조 판서 시절 동인을 많이 기용하였으므로, 서인의 비난을 받았다. 이때 여진족의 누르하치가 두만강 유역의 6진(鎭) 번호(藩胡)를 회유하여 그들의 세력권 아래에 두려고 하였으므로, 선조는 윤승길을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병이 아직 낫지 않았다고 세 번이나 소장을 올렸으므로 결국 체직되었다. 1599년(선조 32) 1월 호조 판서가 되었고, 4월 함경도관찰사에 자원하여 북방으로 나갔다.[『선조실록』 32년 1월 3일],[『선조실록』 32년 4월 23일]
선조는 임진왜란 중인 1595년(선조 28) 젊은 군관 신충일(申忠一)을 만주로 보내 누르하치의 본거지를 정탐하게 하였다. 이에 신충일은 선조에게 그 지역의 산천·지명·군비상황 등에 관한 지도와 이들의 동정과 풍속 습관 등의 견문을 97개조 기사로 나누어 보고하였다. 신충일의 보고를 들은 선조는 여진족 문제가 매우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여진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윤승훈을 북방으로 파견하였다. 그는 함흥(咸興)으로 가서 함경도 지역에 학교를 세워 문교(文敎)를 크게 진흥시키는 한편, 누르하치와 내통하고 있는 6진의 오랑캐 번호의 실상을 조사하고 군사를 일으켜 그들을 정벌할 방책을 15조목으로 나누어 중앙에 보고하였다.[「윤승훈묘표」]
7월 비변사에서 “북도순찰사(北道巡察使) 윤승훈이 6진의 오랑캐 실태를 조사하여 15조목의 대책을 보고하였는데, 그 15조목 모두 시행할 만합니다. 지금의 정세로 보아, 오랑캐를 한 번 정벌하지 않으면 변방의 우리 백성들이 평안할 날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니, 선조가 이를 허락하였다. 이에 함경도관찰사 윤승훈은 북도병마사(北道兵馬使) 이수일(李守一)로 하여금 6진의 군사를 중군(中軍)과 좌군(左軍), 그리고 우군(右軍)의 3군으로 나누어, 6진의 번호 부락을 총공격하게 하였다. 어유간(魚遊澗)으로부터 풍산보(豐山堡)에 이르는 두만강 유역 3백여 리에 사는 번호의 부락을 공격한 조선 정벌군은 이들의 집을 불태우고 그 장정을 도륙(屠戮)하니, 살아남은 오랑캐들이 북병사 이수일에게 항복하겠다고 애걸하였다. 윤승훈이 승첩(勝捷)을 보고하자, 선조는 대단히 기뻐하여 그를 특별히 정2품하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품(陞品)하였다.[「윤승훈묘표」] 이후 만주의 여진족을 통일한 누르하치는 이전에 윤승훈이 정벌한 지역의 오랑캐[와르카]를 돌려달라고 조선에 요구하였다.[『만주실록(滿洲實錄)』]
1601년(선조 34) 2월 병조 판서가 되었다.[『선조실록』 34년 2월 1일] 그는 무관의 인사 행정을 맡아보면서 그들의 재능을 시험하여 적임자를 추천하였는데, 뇌물을 바치는 자가 있으면 즉시 그 이름을 삭제하고 추천하지 않았으므로, 무관의 인사가 깨끗해졌다. 그해 5월 선조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윤승훈을 우의정으로 발탁하였다.[『선조실록』 34년 5월 16일] 당시 영의정은 서인인 이항복(李恒福)이고, 좌의정은 소북(小北)의 유영경(柳永慶)이었다. 이때 동인이었던 우의정 윤승훈은 영의정 이항복을 변호하다가, 좌의정 최영경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사헌부에서 그를 공격하자, 그는 1602년(선조 35) 윤2월 경연에서 “영의정 이항복을 정철의 심복이라고 하는데, 신이 알기로 이항복은 실지로 정철의 심복이 아닙니다. 요즈음 조정이 안정되지 않은 가운데 이항복이 수상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비방하는 말이 백출(百出)하고 있습니다. 신도 이조 판서를 추천할 때 좌의정 유영경의 추천을 받지 않았다고 하여 바야흐로 비난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하였다. 이에 선조는 “외간에서 떠도는 잡스러운 말을 대신은 모름지기 듣지 말아야 한다” 하였다.[『선조실록』 35년 윤2월 2일] 그러나 그해 3월 윤승훈은 여섯 차례나 글을 올려서 사임하기를 청하였고, 결국 선조는 그를 체차하라고 명하였다.[『선조실록』 35년 3월 4일]
1608년(광해군 즉위년) 2월 선조가 세상을 떠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의 정인홍·이이첨(李爾瞻)이 정권을 잡고 마침내 소북의 유영경을 처형하였다. 1609년(광해군 1) 윤승훈은 중추부 영사(領事)로 승진하였으나, 대북이 정권을 잡은 광해군 시대에 동인과 서인은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였다.[『광해군일기』 1년 9월 6일] 1611년(광해군 3) 6월 16일 양주의 본가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63세였다.[『광해군일기』 3년 6월 16일]
[성품과 일화]
윤승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이 강직하고 과감하여 남에게 지기를 싫어하였다.[『광해군일기』 3년 6월 16일] 사물에 통달하고 과묵하였는데, 남에게 무함을 당하여 여러 번 죽을 지경에 이르기도 했으나, 강하고 결단력이 있었으므로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윤승훈이 함경도관찰사가 되었을 때, 잔뜩 쌓인 소송서류 때문에 일에 익숙한 아전들도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였다. 그러나 정사(政事)를 보는 능력이 뛰어났던 그는 벼락 치듯이 신속하게, 도끼로 자르듯이 정확하게 사건을 처결하면서도, 겉으로는 전혀 아무런 생각이 없는 듯 조용히 자리에 앉아있는 듯하였다. 일찍이 그는 “품관(品官)과 서리(胥吏)들은 모두 똑같이 우리 백성들인데, 어찌 후하게 대하거나 박하게 하여 차별을 두겠는가. 무릇 관리가 되어서 혹시라도 치우치게 후하거나 박하게 하는 사람은 진정한 목민관(牧民官)이 아니다” 하였다. 그는 부임하는 곳마다 관리와 아전과 백성들을 동일하게 대하였으므로, 특히 서리와 백성들이 그를 좋아하고 그 덕을 칭송하였다.[「윤승훈묘표」] 충청도 신창과 강원도 강릉 두 고을의 백성들이 그의 선정(善政)을 기려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서쪽으로 파천하게 되자 그는 가족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임금의 대가(大駕)를 평양·의주까지 호종하였다. 그때 그의 아들 윤공(尹珙)이 가족을 데리고 양주의 집에 와 있었는데, 아버지 윤승훈이 가족들과 이별하고 떠나면서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자, 아버지의 옷소매를 잡아당기고 울면서 그 손을 놓지 않았다. 이때 윤승훈은 벌컥 화를 내며 “내가 평생 너에게 충성과 효도를 가르쳤는데, 지금 네가 어찌 이 같은 말을 하는가” 하고, 소리치며 아들 손을 뿌리치고 떠났다.
5월 양호 선유사에 임명되어, 배를 타고 충청도와 전라도로 내려가서 백성들을 위무하고, 9월 의주의 행재소로 돌아왔다.[「윤승훈묘표」] 5월 비변사(備邊司)에서 “남쪽의 근왕병(勤王兵)이 반드시 올 텐데, 지금 마침 윤승훈이 양호 지방의 선유사로 내려가게 되었으니, 조정에서 밤낮으로 근왕병을 고대하고 있다는 뜻을 그가 병사(兵使)의 군영(軍營)으로 직접 달려가 전달하게 하소서” 하니, 선조가 “그렇게 하라. 다만 왜적은 우리의 활을 두려워하니, 장수들에게 이것을 깨우쳐 주도록 하라”하였다. 당시 조총을 가진 왜군은 우리의 창과 방패는 무서워하지 않았으나, 조선 관군이 먼 거리에서 쏘는 편전(片箭)은 무서워하였기 때문이다. 윤승훈이 근왕병을 모집하는 일 때문에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면서 회계하기를, “먼저 정주(定州)에 가서 선천(船隻)을 마련한 뒤, 하3도(道)에서 근왕병을 소집하는 서장(書狀)을 가지고 뒤따라오는 자와 동시에 배를 타고 내려가겠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하3도에서 근왕병을 모집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9월 윤승훈은 서로 조도사에 임명되어 1593년(선조 26) 명나라 제독 이여송이 평양에서 싸워 승리할 때 후방에서 5만여 명의 명나라 군사들에게 식량을 공급하였다.[「윤승훈묘표」] 당시 많은 군사가 주둔하면서 시끄러운 소리가 났고, 하루에 소요되는 군량미는 수천 곡(斛 : 휘)을 헤아렸는데, 공사(公私)의 창고가 모두 불에 타버렸으므로, 그는 휘하의 요속들과 담장에 의지하여 갈대를 엮어 자신들을 가리고, 낮에는 장부와 대조하여 식량을 나눠주고 밤에는 수판을 잡고 결산하면서 군대에 공급되는 식량이 조금도 모자라지 않게 하였다.
윤승훈이 호조 판서로 재임할 당시 병으로 말미를 청했는데, 서울 도성의 백성들이 호조 판서로서 명나라 군사에게 군량미를 원활하게 공급한 것을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서울 백성들이 선조가 거둥하는 때를 엿보고 있다가 길거리에서 선조의 거가(車駕)를 에워싸고 그를 호조 판서에 유임시켜 달라고 다투어 호소하였다. 이에 선조가 그를 호조 판서에 그대로 유임시켰으므로, 병이 나서 몸이 아팠으나 말미를 얻지 못하고 그대로 일을 계속하였다.
윤승훈은 과부가 된 막내 여동생을 그의 집에서 살도록 하였는데, 언제나 여동생보다 뒤에 옷을 입고 밥을 먹었다. 어쩌다가 여동생이 병이 나면 몸소 약을 달여 주고 간호해 주었다. 또한 여동생이 낳은 조카들을 자기 자식처럼 데려다가 키우면서, 혼인과 상사(喪事)를 도와주고 성심껏 돌보아주었다.[「윤승훈묘표」]
윤승훈에 대해서는 당파에 따라 평가가 달랐다. 반대파에서는 “윤승훈은 행정을 까다롭고 각박하게 하고, 형벌을 잔인하고 혹독하게 썼으며, 조금이라도 자기 뜻을 거스르거나, 그를 흘겨보기만 하여도 반드시 보복했다”고 평가하였다.[『선조실록』 26년 11월] 또 다른 평가로는 “윤승훈은 일찍 과거에 올라 청현직(凊顯職)을 두루 거치고 재상이 되었다. 사람됨이 강직하고 과감하여 남에게 지기를 싫어하였는데, 지론(持論)이 당파에 너무 치우쳤으므로, 식자들이 이것을 그의 단점으로 여겼다. 선조의 존호를 의논할 때 자기 이론을 주장하다가 마침내 유영경에게 배척을 당하였는데, 사론(史論)은 이 일 때문에 그를 좋게 평가하였다”라고 하였다.『광해군일기』 3년 6월 16일]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숙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의 홍복산(洪福山)에 있고, 이항복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이 남아있다.[「윤승훈묘표」]
부인 창녕 성씨(昌寧成氏)는 광흥창(廣興倉) 수인 성호문(成好問)의 딸인데, 자녀는 2남 2녀를 낳았다. 장남 윤공은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을 지냈고, 차남 윤숙(尹◎王+肅)은 무과에 급제하여 용천군수(龍川郡守)를 지냈다. 장녀는 영의정 이경여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생원(生員) 허국(許國)에게 시집갔다. 측실에서 난 아들 윤형(尹珩)이 있다.[「윤승훈묘표」]
홍문관 수찬 윤공은 광해군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하려는 것을 반대하다가, 강원도 통천으로 유배되었다. 윤공의 어머니 창녕 성씨도 맏아들 윤공을 따라 통천의 유배소에서 함께 지내고 있었는데, 1617년(광해군 9) 9월 유배소에서 불이 났다. 한밤중에 갑자기 불이 나는 바람에 어머니가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였으므로, 윤공과 윤공의 여동생인 이경여의 아내, 그리고 윤공의 서모가 앞 다투어 불속으로 뛰어 들어가 노모를 구하려 하였으나 모두 불에 타 죽었으며, 윤공의 어린 딸도 불에 타서 죽었다. 영의정 이경여는 부인 윤씨와의 사이에 1남 2녀를 두고 있었다.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가 이 사실을 치계(馳啓)하자, 광해군은 휼전(恤典)을 베풀어 모두 장사 지내게 하였고,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인조는 모두 정문(旌門)을 세우고 복호(復戶)하게 하였다.[『인조실록(仁祖實錄)』 1년 5월 12일]
윤승훈의 막내딸은 시각장애인으로, 중추부 경력(經歷)허진(許震)의 손자 허국에게 시집갔다. 1615년(광해군 7) 가을 성균관 생원 허국은 동료 이현문(李顯門)과 함께 성균관 생도들을 모아놓고 큰소리로 “인목대비를 구원하면 인심을 얻고, 인목대비를 폐위하면 인심을 잃는다”고 외쳤다. 생원들이 이를 정부에 고발하였으나, 광해군은 그들을 보방(保放)하였다. 하지만 1618년(광해군 10) 11월 대간에서 그들을 탄핵하면서 다시 형문을 받고, 이듬해인 1619년(광해군 11) 5월 진도에 위리안치되었다.[『광해군일기』10년 11월 13일],[『광해군일기』11년 5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