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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91년(선조 24)∼1666년(현종 7) = 76세]. 조선 중기 광해군(光海君)~현종(顯宗) 때의 문신. 의정부(議政府) 좌참찬(左參贊)을 지냈다. 자는 낙천(樂天)이고, 호는 행명(涬溟)이다. 본관은 해평(海平)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 겸 부체찰사(副體察使) 윤훤(尹暄)이고, 어머니 청송 심씨(靑松沈氏)는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 심의겸(沈義謙)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해원부원군(海原府院君) 윤두수(尹斗壽)이며, 증조할아버지는 군자감(軍資監)정(正)을 지낸 해징부원군(海澄府院君) 윤변(尹忭)이다. 종조부인 의정부 찬성(贊成)윤근수(尹根壽)로부터 가학(家學)을 배웠다.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평안도관찰사였던 아버지 윤훤이 오랑캐 군사를 막지 않고 후퇴하였다는 이유로 강화도에서 처형되었다.
1623년(인조 1) 7월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다가, 9월 예조 정랑(正郞)에 임명되어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고, 10월에는 의금부(義禁府) 문사낭청(問事郞廳)의 낭관(郎官)을 거쳐 병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다.[『승정원일기』 인조 1년 7월 9일],[『승정원일기』 인조 1년 9월 21일],[『승정원일기』 1년 10월 2일],[『승정원일기』 인조 1년 10월 17일] 1624년(인조 2) 11월 사헌부 지평(持平)을 거쳐서, 12월 홍문관(弘文館)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인조실록』 2년 11월 1일],[『인조실록』 2년 12월 22일] 1625년(인조 3) 1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문학(文學)이 되었고, 2월 홍문관 부교리(副校理)가 되었으며, 3월 홍문관 교리(校理)로 승진하였다.[『승정원일기』 인조 3년 1월 9일],[『인조실록』 3년 2월 25일],[『인조실록』 3년 3월 22일] 이어 4월에는 원접사(遠接使) 김상용(金尙容)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명(明)나라 사신을 접대하였다.[『승정원일기』 인조 3년 4월 26일] 그해 10월 사간원 헌납(獻納)에 임명되었으나, 그의 처남 박황(朴潢)이 이미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있었다.[『승정원일기』 인조 3년 10월 8일] 그러므로 상피법(相避法)에 따라 “사간원 정언 박황은 바로 신의 처의 동생입니다. 법률상 서로 피혐(避嫌)해야 마땅하므로, 신의 직임을 체차시켜 주소서.” 하고 사양하였다. 그러자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이성구(李聖求)가 “상피(相避)하는 법에서는 아랫사람을 체차하도록 되어 있으므로, 정언 박황을 체차시키고 윤순지를 출사시키소서.”라고 하여 윤순지는 사간원 헌납에 유임되었다.[『승정원일기』 3년 10월 9일] 1626년(인조 4) 7월 경기도어사(京畿道御使)로 파견되었고, 9월에는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이 되었다가, 10월 다시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었다.[『승정원일기』 인조 4년 7월 25일],[『승정원일기』 인조 4년 9월 15일],[『승정원일기』 인조 4년 10월 21일]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都體察使) 장만(張晩)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당시 아버지 윤훤은 1625년(인조 3)부터 평안도관찰사로 재임하고 있었는데,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부체찰사(副體察使)로서 후금(後金)의 오랑캐 군사들과 싸웠다. 그러다가 안주(安州)에서 오랑캐 군사에게 패배한 뒤, 병력과 군비의 부족으로 평양에서 철수한 후, 이어 성천(成川)으로 후퇴하였다. 황주(黃州)에서 제 2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던 황해도 병사는 평안도관찰사가 성을 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황주를 포기하고 봉산(鳳山)으로 후퇴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윤훤은 전세를 불리하게 만들었다는 책임을 지고, 체포되어 의금부에 하옥되었다. 당시 영의정인 윤훤의 형 윤방(尹昉)을 비롯하여, 조카 해숭위(海嵩慰) 윤신지(尹新之)의 아내인 선조(宣祖)의 딸 정혜옹주(貞惠翁主)가 구명운동을 벌였으나, 윤훤은 결국 강화도에서 효수(梟首)되었다. 이때 아들 윤순지도 벼슬에서 물러났는데, 1629년(인조 7) 5월 왕의 특명으로 예조 정랑에 임명되었으나, 아버지의 처형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은 그는 벼슬할 뜻이 없어서 사양하였으며, 이후 10년 동안 은거하였다.[『인조실록』 7년 5월 29일],[『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윤순지묘표(尹順之墓表)」]
1643년(인조 21) 1월 병조 참의(參議)로서 통신사(通信使)의 상사(上使)에 임명되어 일본에 포로로 잡혀 있는 사람들을 쇄환(刷還)하기 위하여 일본에 파견되었다.[『인조실록』 21년 1월 6일] 그해 10월 귀환하는 도중에 대마도(對馬島)에서 왕에게 치계(馳啓)하기를, “신들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일본에 당도하니, 일본의 관백(關白)이 예로써 접대하고 극도로 후의를 보였습니다.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왜군에게 사로잡혀 갔던 우리나라 사람들을 추쇄(推刷)하였으나, 모두 일본에 50년 이상 살면서 자손을 낳고 그 땅에 안주해 살고 있어서 고향땅에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겨우 14명만 찾아서 데리고 나왔는데, 돌아오는 도중에 나이가 많아 병들어 죽은 자가 여섯 사람입니다.” 하였다.[『인조실록』 21년 10월 29일] 1644년(인조 22) 2월 통신사로 일본에 가서 포로들을 추쇄한 공로로 가자(加資)되었고, 4월 승정원 도승지(都承旨)로 발탁되었다.[『인조실록』 22년 2월 25일],[『인조실록』 22년 4월 16일] 1645년(인조 23) 3월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로 나갔다가, 1646년(인조 24) 5월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고, 1647년(인조 25) 9월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었다.[『인조실록』 23년 3월 26일],[『인조실록』 24년 5월 2일],[『인조실록』 25년 9월 3일]
[성품과 일화]
유순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이 겸손하고 부지런하였으며, 몸가짐이 단정하고 돈후(敦厚)하였다. 남들이 자기를 치켜세우거나 깎아내리거나, 또는 자기를 밀고 당기거나 하는 따위를 좋아하지 않았다. 더구나 아버지 윤훤이 정묘호란 직후 강화도에서 처형을 당하는 비극을 당하자, 여러 아우들과 함께 초야로 물러나와 10여 년간 은둔하면서 인조가 여러 차례 소명(召命)하였으나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이때부터 그는 세상을 살아갈 뜻이 없어서 항상 머뭇거리고 자신을 감추려고 하였는데, 나중에 벼슬길에 나아가 조정에 있으면서도 마치 손님처럼 자처하고 방관하였다. 평소 집에서도 대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였으며, 방 안의 책상에는 먼지가 가득히 쌓였으나, 그 속에서 혼자 쓸쓸히 앉아서 서사(書史)를 읽고 시율(詩律)을 지으면서 자적(自適)하였다.
그가 자조하기를, “나는 궁천(窮天)의 슬픔을 안고도 구학(丘壑)에 엎드려 죽지 못하고 지위를 도둑질함이 여기에 이르렀으므로, 죽어서도 민몰(泯沒)함이 마땅하니, 내가 죽거든 나라에 시호(諡號)를 청하지도 말고, 묘비(墓碑)도 세우지 말며, 벼슬로써 나를 두 번 죽이지 말라.”고 하여, 자손들이 묘소에 신도비(神道碑)를 세우지 않다가, 그의 사후 60년이 되어서 비로소 묘표(墓表)를 세웠다.[『국조인물고』「윤순지묘표」] 이와 같은 그의 자조적 태도를 보고 사람들은 그를 ‘성품이 나약하고 지기(志氣)가 없는 사람’이라고 평가하였으나,[『현종개수실록』 7년 9월 29일] 그는 인생을 달관한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큰 시비나 큰 형정(刑政)을 당하여 왕의 덕화(德化)에 허물이 돌아갈 때에는 자기 소견을 모두 말하고 최선을 다하였다.[『국조인물고』「윤순지묘표」]
그는 어려서부터 작은할아버지 윤근수에게 학문을 배웠는데, 시를 잘 지었고 사학(史學)에도 조예가 깊었다.[『국조인물고』「윤순지묘표」] 그리하여 시를 짓는 재주가 있어서 문형을 맡아 육경(六卿)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고 평가받기도 하였다.[『현종개수실록』 7년 9월 29일] 그는 죽을 때 자기가 지은 시문의 초고를 모두 없애버렸기 때문에 그의 사후에 시만 겨우 몇 권이 남았을 뿐이다.[『국조인물고』「윤순지묘표」]
1653년(효종 4) 윤7월 그가 경기도관찰사가 되었을 때, 의옥으로 분쟁이 일어나 효종에게까지 보고가 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양천(陽川) 사람 이원귀(李元龜)의 아내 양씨(梁氏)가 남편인 이원귀에게 소박 당하자, 이를 견디지 못하고 강물에 빠져 죽은 사건이었다. 당시 양씨의 오빠가 고발하기를, ‘이원귀가 그의 아내를 때려죽여 그 시체를 강물에 던져 버렸다.’ 며, 양천현에 고소하였다. 소송을 맡은 관리가 오래도록 판결을 못하자, 경기도관찰사 윤순지가 부평부사(富平府使) 이홍연(李弘淵)과 남양부사(南陽府使) 윤겸(尹㻩)으로 하여금 그 옥사를 조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끝내 그 진상을 캐내지 못하였다. 윤순지가 그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자, 효종은 죄수들을 서울로 압송하여 의금부(義禁府)에서 조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중대한 옥사를 관찰사와 소송관이 느리게 처리하였다며, 경기도관찰사 윤순지를 비롯하여, 부사 이홍연과 윤겸, 검시관(檢屍官)인 양천현감(楊州縣監) 심광사(沈光泗)와 인천부사(仁川府使) 이석망(李碩望)을 모두 유배시켰다.
1658년(효종 9) 3월 동지사 겸 사은사 부사로 임명되어 청나라 연경에 갔다가 돌아왔다.[『효종실록』 9년 3월 11일] 이때 그의 나이가 70세였는데, 그가 연경으로 가기 전 조정에서 하직할 때, 효종이 “부사는 수염과 머리털이 다 세었는데, 어떻게 먼 길을 다녀올 수 있겠는가.” 하고, 초구(貂裘 : 담비의 모피로 만든 갖옷)와 이엄(耳掩 : 관복을 입을 때에 사모 밑에 쓰는 모피로 만든 방한구)을 하사하였다고 한다.[『국조인물고』「윤순지묘표」]
[묘소와 후손]
시호는 본인이 원하지 않아서 봉상시에 신청조차 하지 않았다. 묘소는 경기도 장단(長湍) 반룡산(盤龍山)의 선영에 있는데, 죽은 지 60여 년이 지나서 후손 윤순(尹淳)이 지은 묘표가 남아있다.[『국조인물고』「윤순지묘표」]
부인 반남 박씨(潘南朴氏)는 관찰사 박동열(朴東說)의 딸인데, 아들을 낳지 못하는 바람에 막냇동생인 청도공(淸道公) 윤징지(尹澄之)의 아들 윤전(尹塼)을 양자로 삼았다. 윤전은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을 지냈다. 측실에서 1녀가 있는데, 남영하(南寧夏)의 처가 되었다.[『국조인물고』「윤순지묘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