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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63년(명종 18)∼1640년(인조 18) = 78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인조(仁祖) 때의 문신. 형조 판서(判書)와 영의정 등을 지냈다. 자는 가회(可晦)이고, 호는 치천(稚川)이다. 봉작(封爵)은 해창군(海昌君)이며,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본관은 해평(海平)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해원부원군(海原府院君) 영의정 윤두수(尹斗壽)이고, 어머니 창원 황씨(昌原黃氏)는 참봉(參奉) 황대용(黃大用)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군자감(軍資監)정(正)을 지낸 윤변(尹忭)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사용(司勇)을 지낸 윤희림(尹希琳)이다. 의정부 찬성(贊成)윤근수(尹根壽)의 조카이자, 선조의 딸인 정혜옹주(貞惠翁主)의 시아버지이고, 형조 판서 윤휘(尹暉)의 형이기도 하다.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문인이다. 아버지 윤두수의 뒤를 이어 서인(西人)의 영수로서 광해군(光海君) 때 북인(北人)들과 대립하였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는 강화도로 종묘 신주를 모시고 갔다가 청(淸)나라 예친왕(睿親王) 돌곤과 교섭하여 강화성 안에 피난한 봉림대군(鳳林大君)과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 등을 구출하였다.
[선조 시대 활동]
1582년(선조 15) 사마시(司馬試)에 진사(進士)로 합격하였고, 1588년(선조 21)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6세였다.[『방목(榜目)』] 과거에 급제한 후,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로 선발되었다. 이어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이 되어 춘추관(春秋館)기사관(記事官)을 겸임하였고, 예문관 봉교(奉敎)로 승진하였으며, 예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다. 그가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을 때, 동인(東人)의 병조 판서 이양원(李陽元)이 자신의 아우를 선전관(宣傳官)으로 삼으려고 환관(宦官) 방준호(方俊豪)에게 접근하였다고 탄핵하다가,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으로 좌천되었다.[『택당집(澤堂集)』 권7 「영의정해창군윤공신도비명(領議政海昌君尹公神道碑銘)」 이하 「윤방비명」으로 약칭]
1591년(선조 24) 왕세자 책봉 문제를 둘러싸고 동인과 서인 사이의 분쟁인 <건저 문제(建儲問題)>가 발생하였다. 선조는 제 4왕자인 신성군(信城君)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하였으나, 조정의 여론은 제 2왕자인 광해군을 지지하면서 서로 의견이 충돌하였다. 이 일로 서인인 좌의정 정철(鄭澈)이 쫓겨나고, 윤방(尹昉)의 아버지 윤두수도 함경도 회령(會寧)으로 유배되었다. 윤방도 벼슬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 없었으므로,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그러다가 이듬해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선조는 개성과 평양을 거쳐 의주(義州)로 피난하면서 윤두수를 좌의정으로 기용하고, 윤방도 예조 정랑(正郞)에 임명하면서, 그는 아버지 윤두수와 함께 선조를 호종(扈從)하였다. 이후 병조 정랑에 임명되었다가 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으로 전임되었다. 대가(大駕)가 개성에 머물 당시,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고향으로 돌아가 동생들과 함께 장례를 치렀다.[「윤방비명」] 그리고 그해 7월 전쟁 중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고려한 선조가 상중(喪中)이던 윤방을 특별히 기복(起復)하여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에 임명하였는데,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그 후, 성균관 직강(直講)에 임명되었다가, 홍문관 부교리(副校理)를 거쳐, 이조 좌랑으로 전임되었다.[「윤방비명」],[『선조실록』 25년 7월 1일],[『선조실록』 25년 8월 5일],[『선조실록』 25년 8월 12일],[『선조실록』 25년 8월 19일],[『선조실록』 25년 9월 9일]
그리고 그 해에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선조는 윤방에게 비빈(妃嬪)과 왕가의 자녀들을 배종(陪從)하여 평안도 지방으로 먼저 떠나도록 명하였다. 윤방의 둘째 아들 해숭위(海嵩尉) 윤신지(尹新之)가 선조의 제 2옹주(翁主)인 정혜옹주(貞惠翁主)와 혼인관계였으므로, 척신(戚臣)인 그에게 이 임무를 맡겼던 것이나 그는 상소를 올려 이를 사양하였다. 대신 순안독찰(巡按督察)이 되어, 군량미 운반하는 일을 감독하였다. 이어 철원부사(鐵原府使)로 파견되었는데, 그 치적을 인정받아 정3품 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陞品)되었다.[「윤방비명」]
[광해군 시대 활동]
1608년(광해군 즉위년) 형조 판서가 되었고, 1609년(광해군 1) 사은사(謝恩使)에 임명되어 명나라 북경에 다녀왔다.[『광해군일기』 즉위년 3월 19일] 1610년(광해군 2)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거쳐,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에 임명되었다.[『광해군일기』 2년 3월 9일],[『광해군일기』 3년 2월 19일] 그러나 병으로 사직하고 조정에 돌아와서 춘추관 지사를 겸임하고, 『선조실록(宣祖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윤방비명」] 1615년(광해군 7) 다시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 북경에 갔다가 돌아와서, 종1품 하 숭정대부(崇政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광해군일기』 7년 6월 13일],[「윤방비명」]
광해군 시대에 조정에서는 이이첨(李爾瞻)과 정인홍(鄭仁弘) 등의 대북파(大北派)가 실권을 잡고 있었으나, 이이와 성혼의 제자인 이항복(李恒福)·이정구(李廷龜) 및 서경덕(徐敬德)의 제자인 박순(朴淳) 등이 서인의 주류를 형성하여 대북파와 대립하였다. 당시 대북파의 이이첨·정인홍 등은 선조의 계비(繼妃)이며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생모인 인목대비(仁穆大妃)와 그의 친정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을 몰아낼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가운데 1612년(광해군 4) 조령(鳥嶺) 길목에서 도적이 은상인(銀商人)을 살해하고 은 6,~7백 냥을 강탈하다가 체포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에는 ‘강변칠우(江邊七友)’ 또는 ‘죽림칠우(竹林七友)’라고 자처하는 서양갑(徐羊甲)·박응서(朴應犀)·심우영(沈友英)·박치의(朴致毅)·박치인(朴致仁)·허홍인(許弘仁)·김평손(金平孫) 등이 연루되어 있었다. 이들은 유명 가문 출신들이었으나, 서자라는 이유로 관리 등용의 길이 막혔기 때문에, 북한강 부근에서 자주 만나 시와 술로 교유하며 서얼 차별 대우에 대한 사회적 불만을 토로하곤 하였다. 그런데 이들이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체포되었던 것이다.
대북파의 이이첨 일파는 이 사건을 이용하여 정적을 제거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리고 사면을 조건으로 주범인 박응서를 사주하여, 은화 탈취의 목적이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옹립하고자 자금을 조달하려는 데 있었다고 허위 자백 하게 하였다. 이 일로 결국 <계축옥사(癸丑獄死)>가 일어났는데, 1613년(광해군 5) 6월 영창대군의 외조부인 김제남이 사사(賜死)되었고, 영창대군은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1614년(광해군 6) 봄에 살해되었다. 이 과정에서 윤방은 벼슬에서 물러나, 1613년(광해군 5) 이후부터 교외(郊外)의 노량진 강촌(江村) 집에 칩거하며 친지나 친구들과 왕래하는 것조차 끊고 살았다.
한편 이이첨 일당이 김제남과 영창 대군을 죽일 때, 대간(臺諫)에서는 인목대비도 아울러 폐비시키기 위하여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였다. 계축옥사 직후, 대간의 관원들이 모여 ‘폐모론’을 발의할 때,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사헌부 장령(掌令)정조(鄭造)·윤인(尹訒) 등은 “인목대비는 종묘사직과 스스로 단절할 죄를 지었으니, 모후(母后)로서 대우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대간의 동료들 가운데 누구도 감히 이들의 의견에 반대하지 못하였으나, 사간원 정언 정광경(鄭廣敬)과 사헌부 헌납(獻納)오정(吳靖) 등이 앞장서서 그 발의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며 반박하자, 반대 의견을 가진 대간의 동료들이 이에 동조하면서 일단 폐모론을 꺾을 수 있었다. 그러나 1618년(광해군 10) 이이첨·정인홍 등이 폐모론 추진을 위하여 문무백관들로 하여금 대궐의 뜰에 나와서 인목대비를 폐위시켜야 한다는 상소를 광해군에게 올리는 <정청운동(庭請運動)>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이것이 <무오정청(戊午庭請)>이다.
당시 윤방은 해평군의 신분이었으므로 마땅히 조정의 수의(收議)에 참여해야 하였으나 일부러 말미를 청하여 성묘를 떠났다. 그러나 그가 돌아왔을 때 정청운동이 벌어지고 있었으므로, 그는 곧 바로 대궐로 가서 사은숙배(謝恩肅拜)하고 병을 핑계로 조정에서 물러났다. 이때 그는 정청(庭請)에 참여하기 위해 대궐로 들어가는 서인의 재상 한 사람을 길에서 만났는데, 그 재상이 돌아가는 윤방을 보고 놀라워하면서, “그대는 수의할 때에도 참여하지 않았는데, 지금 정청에도 참여하지 않으니, 이게 어찌 된 일인가?” 하고 묻었다. 그러자 그는 대수롭지 않은 듯이 “그 일이 사리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고, 그 재상은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였다. 이때 사람들이 윤방의 신변을 위태롭게 여겼으나 그는 끝까지 정청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윤방비명」] 양사(兩司)에서 합계(合啓)하여 정청에 불참한 서인 대신들을 파면시켜 멀리 유배 보낼 것을 주장하면서 그는 조정에서 물러나 광해군 말년 5~6년 동안을 교외에서 칩거하며 두문불출하였다.[『광해군일기』 10년 2월 8일]
[인조 시대 활동]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인조는 당시의 불안한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윤방을 어영대장(御營大將)에 임명하였다.[「윤방비명」] 이어 그해 3월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이 되었으며, 의금부 판사(判事)를 겸임하였다.[『인조실록』 1년 3월 15일],[『인조실록』 1년 4월 2일] 윤방이 광해군 시대에 대신을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인조반정 이후 다시 재상에 등용된 것은 그가 서인의 영수인 윤두수의 아들로서 인품이 중후하고 덕이 있어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재상의 명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인조실록』 1년 3월 15일] 또한 광해군 때 끝까지 정청운동에 참여하지 않고 절조(節操)를 지켰으므로, 인조반정으로 새로운 정치를 펼칠 시기에 윤방만큼 재상의 자격을 갖춘 인물이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다.[「윤방비명」] 이에 그해 4월 그는 우의정에 임명되었다.[『인조실록』 1년 4월 23일]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는데, 반란군이 경기도 개성·벽제까지 이르렀으므로, 인조는 급히 충청도 공주로 피난을 갔다. 이때 좌의정 윤방은 유도대장(留都大將)에 임명되어 서울의 방어를 맡았는데, 이조 좌랑 이경여(李敬輿), 홍문관 수찬 정홍명(鄭弘溟)을 그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았다.[『인조실록』 2년 2월 5일] 이괄의 반란군은 한때 서울을 점령하면서 기세를 떨쳤으나, 곧 관군에 크게 패하였다. 인조가 천안에 머무르고 있을 때 반란군은 전투에 패배하고, 이괄은 그 부하에게 살해당하였으므로, 윤방은 서울 도성 안으로 들어가 민심을 수습하였다. 당시 서울 도성 사람들 가운데 반란군을 따랐던 자들은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이때 이괄을 추종하던 수천 명의 명단이 발견되었는데, 종사관이 이 문건을 가져다가 읽으려고 하자 윤방이 이를 모두 불태워 버리라고 명한 후 그 우두머리 몇 명만을 처형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불문에 붙이고 목숨을 살려 주면서, 서울 도성의 민심을 안정시켰다. 그 뒤에도 반역에 관련된 사람을 고발하는 사건이 여러 번 있었으나, 유도대장으로서 윤방은 그 허실(虛實)을 자세히 조사하여 치죄(治罪)하였으므로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 이에 그들이 윤방의 집을 찾아가 대문을 가득 메우고 감사를 드렸으나, 그는 그들을 모두 물리치고 “이것은 성상의 뜻에서 나온 일이지,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다”라고 하였다.[「윤방비명」]
1625년(인조 3) 1월 세자의 사부가 되어, 소현세자(昭顯世子)를 가르쳤고, 2월에는 좌의정으로서 소현세자의 관례(冠禮)와 책봉례(冊封禮)를 거행할 때 도감(都監)의 도제조(都提調)를 맡았다.[『인조실록』 3년 1월 9일],[『인조실록』 3년 2월 6일]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영의정으로 임명되어 강화도로 피난 가는 인조를 호종하였다.[『인조실록』 5년 1월 18일] 당시 오랑캐와 강화(講和)할 것인지의 문제를 둘러싸고 주화파(主和派)와 척화파(斥和派)의 논쟁이 격렬하게 일어나면서 인조는 오랫동안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이때 영의정 윤방은 아버지 윤두수처럼 양쪽의 모든 의견을 수용하고 절충하여 타당한 결론을 내렸으므로, 불평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허물을 탓하며 인피(引避)하였다.[「윤방비명」] 그해 5월 윤방이 병을 핑계로 체직을 청하는 정사(呈辭)를 여섯 차례나 올리면서, 영의정에서 체직되었다.[『인조실록』 5년 5월 11일] 그러다가 이듬해인 1628년(인조 6) 1월 중추부(中樞府)판사(判事)가 되었으며, 1631년(인조 9) 9월에는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고, 1632년(인조 10) 2월에는 연산군의 실록을 편찬하는 총재관(摠裁官)이 되었다.[『승정원일기』 인조 6년 1월],[『인조실록』 9년 9월 15일],[『인조실록』 10년 2월 7일]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묘사(廟社 : 종묘사직)의 제조(提調)에 임명되어 전 좌의정 김상용(金尙容)과 함께 40여 개의 종묘 신주를 모시고, 소현세자빈과 봉림대군을 위시한 궁중의 비빈ㆍ왕자들과 함께 먼저 강화도로 피난을 갔다. 그러나 강화도는 함락되고, 그도 후금(後金)의 오랑캐 군사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생환하였다. 이때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신주를 잃어버린 일로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으며, 1639년(인조 17) 이것이 다시 문제가 되어 황해도 연안(延安)에 유배되었다.[『인조실록』 17년 6월 5일] 그러다가 2개월 뒤에 풀려나 다시 중추부 영사(領事)에 기용되었다.[『인조실록』 18년 3월 14일]
1640년(인조 18) 노량진 강촌 집에서 병들어 눕게 되자, 마지막 상소를 작성하여 인조에게 올렸는데, 인조에게 현인(賢人)을 가까이하고 간인(奸人)을 멀리하여 민생을 보살필 것을 간하였다.[『인조실록』 18년 8월 4일] 그때 그는 친히 ‘낙천지명 승화귀진(樂天知命乘化歸盡)’이라는 여덟 글자를 썼는데, 자획(字畫)이 평상시처럼 생동감이 있었다. 그 글은 “평생 천명을 알고 즐기고 살았으니 근심이 없었고,[樂天知命 故不憂] 승화(乘化)하여 본원(本源)으로 돌아가니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乘化歸盡 不有恨]”라는 뜻이었다. 그해 8월 8일 노병으로 강촌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78세였다.[「윤방비명」]
그가 죽은 뒤에 그의 문집으로 『치천집(稚川集)』을 간행하였는데, 여기에는 시문 10여 권과 소차(疏箚) 3권이 실려 있다. 그 밖에 집안에 소장되어 있던 다른 작품들은 병화(兵火)로 인하여 모두 없어지고 말았다.[「윤방비명」]
[병자호란때 강화도 함락과 윤방의 처벌 문제]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라고 일컫던 후금의 칸[임금] 홍타지(皇太極)는 조선에 사신을 파견하여 청나라에게 신하의 예를 행할 것을 강요하였다. 이에 격분한 조야(朝野)의 사람들이 모두 오랑캐 사신의 목을 베라고 청하였는데, 의정부에서 이를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조정의 분위기를 살피던 오랑캐 사신은 도망치다시피 귀환하였다. 영의정 윤방은 마침 산릉(山陵)을 보수하기 위해 도성 밖에 나가 있다가 복명(復命)하였다. 인조는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견(引見)하고 그 대책을 물었는데 조정의 논의가 분분하였으므로, 윤방은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이와 같으니, 화의에 대한 일은 이미 끝났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빨리 강화도로 피난을 가서 나라를 보존할 계책을 강구하고 험요지(險要地)에 의거하여 적의 침입에 방어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다. 이때 그의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윤방이 경거망동한다고 비난하였으므로, 그는 결국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가 두문불출하며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였다.
그해 12월 청나라 태종 홍타지가 팔기병(八旗兵) 10만여 명을 직접 거느리고 조선을 대대적으로 침입하였다. 오랑캐 군사는 압록강을 건넌 지 사흘 만에 곧장 서울 근교로 육박해 왔다. 이때 윤방은 전 좌의정 김상용과 함께 묘사의 제조를 맡아,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강화도로 먼저 들어갔다. 그 뒤에 왕의 대가가 뒤따라 출발하였으나, 남대문에 도착하였을 때 벌써 오랑캐의 기병(騎兵)이 서쪽 교외에까지 이르렀으므로, 인조 일행은 방향을 바꾸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윤방비명」]
그보다 앞서 김경징(金慶徵)·이민구(李敏求) 등이 검찰사(檢察使)에 임명되어, 강화도로 먼저 들어가 비변사(備邊司)의 분사(分司)를 설치하였다. 윤방과 김상용이 비변사 분사의 대신이 되었으나, 검찰사 김경징·이민구 등은 대신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분사의 모든 정령(政令)을 마음대로 처리하였다. 그때 윤방·김상용·김경징·이민구 등은 오랑캐가 임진강을 건너서 강화도로 쳐들어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아무런 방어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이때 청나라 태종 홍타지는 군사 3만 명을 동생 예친왕 돌곤에게 주면서, 빨리 강화도를 점령하도록 하였다. 예친왕 돌곤은 삼판선(三板船) 80척에 군사를 나누어 태우고, 갑곶진(甲串津)으로 진격하면서 홍이포(紅夷砲)를 잇따라 발사하니, 조선의 수군과 육군은 겁에 질려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이 틈을 탄 오랑캐 군사들이 급히 강을 건너자, 강화유수(江華留守) 장신(張紳)과 충청도수사(忠淸道水使) 강진흔(姜晉昕)은 이들 대군을 보고 겁에 질려 도망을 갔고, 검찰사 김경징·이민구 등도 멀리서 이를 바라보다가 모두 도망쳤다.
1637년(인조 15) 1월 22일 예친왕 돌곤의 팔기병들이 삼판선을 타고 강을 건너 강화성의 남문(南門)으로 들이닥치자, 원손(元孫)을 업은 환관 김인(金仁) 등은 작은 배를 타고 주문도(注文島)로 도망갔다. 분사 대신 김상용은 적병이 사방에서 포위해 오자 분사에 들어가 자결하려고 하다가, 적병을 피하여 성의 남문루(南門樓)로 올라가 화약에 불을 질러 폭파시키고, 승정원 우승지(右承旨) 홍명형(洪命亨) 등과 함께 불 속으로 뛰어들어 죽었다. 강화도에 상륙한 예친왕 돌곤은 강화성 안에 있는 봉림대군과 소현세자빈에게 화의를 요구하였는데, 봉림대군이 승정원 승지(承旨)한흥일(韓興一)에게 “저놈들의 말은 믿을 수 없으니, 시험 삼아 한번 가서 살피도록 하라”고 명하였으므로, 한흥일이 즉시 말을 달려 오랑캐의 진영으로 갔다. 그러나 오랑캐는 “대신이 와야만 한다”고 하였고, 이에 봉림대군은 윤방에게 가도록 명하였다. 윤방이 견여(肩輿)를 타고 오랑캐의 진중(陣中)에 들어가서, 분사에서도 화친을 이루고자 한다는 뜻을 전달하니, 돌곤은 봉림대군과 만나 보기를 원하였다. 윤방이 돌아와서 보고하니 봉림대군은 “저들이 호의를 갖고 나를 유인하는 것인지는 실로 헤아릴 수 없으나, 진실로 지금의 위기를 모면할 수 있다면 내가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겠는가” 하고, 마침내 오랑캐 군대의 진문(陣門)으로 가서 화의가 성립되었다. 예친왕 돌곤은 팔기병을 단속하여 살육을 못하게 하였으며, 봉림대군과 비빈 및 조정의 관리들이 무사히 환도할 수 있도록 약속하였다. 예친왕 돌곤은 형 홍타지를 도와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청나라를 세우는 데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1월 23일 돌곤이 청나라 태종 홍타지의 진영으로 돌아가자, 팔기병 중에서 몽고 팔기병이 성안을 돌아다니며 살인과 약탈을 자행하고 부녀자를 닥치는 대로 겁탈하였다. 강화도에 피난을 갔던 수많은 서울의 사대부 집 부녀자들이 정절을 지키려고 흰 소복을 입고 소나무에 목을 매어죽었는데, 강화도의 마니산이 마치 소나무에 목화송이가 핀 것처럼 희게 물들었다고 전해진다. 인조는 강화도가 무너지고 숱하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45일간 버티던 남한산성에서 나가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하였다.
오랑캐의 군대가 강화도에 상륙하여 불을 지르고 약탈을 하자, 윤방은 강화도 묘우(廟宇 : 사당)의 문을 온 몸으로 막아서서 지켰으나, 도저히 신주들을 온전하게 보존할 수가 없는 상황에 이르렀었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밤에 두 낭료(郎僚)와 함께 베주머니에 40여 개의 신주를 나누어 담고 땅에 파묻었다. 23일 아침 약탈을 자행하던 몽고 팔기병은 성안으로 들이닥쳐 불을 질렀고, 이 바람에 묘우가 모조리 소실되고 말았다. 그 뒤에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청나라와 화의를 맺자, 윤방은 땅에 묻었던 신주를 꺼내어 두 명의 노복(奴僕)에게 짊어지게 하고, 강화도에서 서울로 무사히 귀환하였다. 돌아와서 신주가 있는 베주머니를 확인해 보니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명종의 왕비인 인순왕후의 신주 하나가 없어진 상황이었다. 대간에서는 윤방이 분사의 대신으로서 강화도를 방어하지 못한 책임은 추궁하지 않고 묘사의 제조로서 신주 하나를 잃어버린 죄만을 추궁하였다. 결국 대간의 탄핵으로 인조는 윤방을 파직하였다가, 6월 돈녕부(敦寧府) 영사로 기용하였다.[『인조실록』 15년 6월 2일][「윤방비명」]
그해 7월 양사에서 “윤방은 원로대신으로서 중대한 종묘사직의 신주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는데, 강화도가 함락되는 상황에서 죽음으로 강화도를 지키지 못하고 방어하는 일을 오로지 김경징 등에게 맡겼습니다. 강화성이 점령된 뒤에도 신위(神位)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여 신위가 더럽혀지기도 하고, 신위 하나를 잃어버리기까지 하였으며, 또 전하께서 아직 남한산성에 계신데, 그 전에 그가 먼저 적진에 들어가서 통정(通情)했으니, 왕을 잊어버리고 나라를 팔아먹은 죄 또한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거운 벌에 처해야 하는데도 그 벼슬을 파면하였다가, 갑자기 돈녕부 영사에 제수되는 은서(恩敍)를 입고 태연히 반열(班列)에 있으므로 여정(輿情)이 일제히 분격하니, 관작을 삭탈하고 문외로 출송하소서” 하며 합동으로 탄핵하였다. 인조는 “나라의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일을 맡은 대신은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그러나 논한 것이 실상이 아니다. 돈녕부 영사가 친히 적진에 간 것은 종사를 위한 것이다. 어찌 왕을 잊고 나라를 팔아먹을 리가 있겠는가. 지나친 말을 상신(相臣)에게 하지 말라” 하였다.[『인조실록』 15년 7월 7일] 그리고 그해 12월 윤방을 중추부 영사에 임명하였다.[『인조실록』 15년 12월 2일]
[성품과 일화]
윤방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얼굴이 넓적하고 체구가 우람한 데다 온몸에서 덕기(德氣)가 흘러 넘쳤다. 인품이 중후하고 성품이 지극히 순후하고 근실하여, 사람들과 갈등을 빚는 일이 없었다. 또한 사람됨이 너그럽고 후하고 청렴하고 신중하여, 일찍부터 재상의 인망이 있었다.[『인조실록』 18년 8월 8일]
집안에서는 효성과 우애가 독실하였다. 그는 부모의 안색을 살펴가면서 어버이를 극진히 봉양하였는데, 일찍이 어버이의 병환을 간호할 때, 거의 1년간 옷을 그대로 입고 허리띠를 풀지 않은 채 지냈다. 그의 집안은 형제로부터 안팎의 집안 친척에 이르기까지 무척이나 사람들이 번성하였는데, 어느 누구에게도 치우침 없이 두루 은혜를 베풀었으므로, 어느 집을 막론하고 집안 모두가 그에게 의지하였다.[「윤방비명」]
윤방은 관직 생활을 하면서 일을 처리할 때 허심탄회하게 모든 사람들의 의견을 청취하면서 경계를 두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기준과 척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근거 없는 소리에 결코 현혹되는 법이 없었다. 그는 풍도(風度)가 중후하고 심원하였으며, 기뻐하고 성내는 기색을 얼굴에 드러내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종신토록 그를 옆에서 모신 측근도 그가 급하게 말을 하거나 야비한 언사를 쓰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며, 비록 느닷없이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행동이 항상 평소와 같았다. 그러므로 그를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모두 그의 덕량(德量)과 기국(器局)을 우러러 사모하였다.[「윤방비명」]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그는 아버지와 함께 선조를 호종하였는데, 도중에 길에서 어머니가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 장단(長湍)으로 달려갔다. 이때 이미 왜적이 사방에서 들끓고 있었으므로, 낮에는 숨어 있다가 밤에 몰래 길을 달려가서 마침내 빈소에 이르러 곡읍을 하며 자리를 지켰다. 그가 어머니 장례를 치르면서 몇 번이나 왜적을 만났지만, 다행히 몸을 피해서 빠져 나온 것을 보고 사람들이 그의 효심이 하늘을 감동시킨 결과라고 하였다.[「윤방비명」]
그는 어릴 때, 성혼과 이이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다. 그는 경전의 심오한 뜻을 연구하고 종합한 것을 가지고 가끔씩 두 분 선생이 계시는 방안으로 들어가서 물었는데, 그때마다 두 분 선생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문장은 내용이 풍부하면서도 법도가 있었으며, 화려하면서도 질박한 표현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전후(前後)의 명가(名家)의 작품과 비교해 보아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문장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시문으로 남과 수창(酬唱)하거나 담론(談論)하는 일이 전혀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그가 시문을 잘한 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윤방비명」]
조정에서 의논한 정책 가운데 가장 시의(時宜)에 맞게 시행된 호패법(號牌法)·대동법(大同法)·전폐법(錢幣法)은 모두 윤방이 주장한 정책들이었다. 호패법은 호구를 조사하여 병력을 증강시키는 것이었다. 대동법은 공물(貢物)을 쌀로 거두는 것이었으며, 전폐법은 대동미(大東米)를 화폐로 거두는 것이었는데, 선혜청(宣惠廳)을 세워서 이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하여 그 정책이 중지되는 바람에 효과를 극대화시키지는 못하였다.[「윤방비명」]
윤방의 아버지인 윤두수는 정철과 함께 서인의 영수로 활약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정승이 되어 서인을 위한 정책을 펴 나갔다. 1591년(선조 24) 건저문제로 억울하게 무함을 당한 정철과 윤두수를 신원(伸寃)하게 하였고, 유일(遺逸)이었던 김장생을 조정에 초빙하여 이이·김장생·송시열(宋時烈)로 이어지는 노론(老論)이 뿌리가 내리도록 하는 데 크게 기여하기도 하였다.[「윤방비명」]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으로 강화도가 청나라 예친왕 돌곤에게 함락당할 때, 그는 강화도 분사의 대신을 맡고 있었다. 강화성의 남문으로 들이닥친 돌곤이 먼저 봉림대군에게 강화할 것을 요구하자, 윤방은 봉림대군의 명령을 받고 오랑캐 진영에 가서 화의의 담판을 하게 되었다. 그때 윤방은 교자(轎子)를 타고 적진 속으로 들어갔는데, 오랑캐 군사들이 그에게 큰 소리로 야단을 치면서 교자에서 내릴 것을 요구하자, 그는 “나는 늙고 병들었으니, 내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라며 천천히 말하였다. 그리고 교자에서 내려 부축을 받으며 돌곤의 막사 안으로 들어가 자리로 나아갔다. 윤방이 아프다는 핑계로 돌곤에게 허리를 구부려 절을 하지 않자, 돌곤의 좌우에 시립하고 있던 오랑캐 장수들이 칼을 빼들고 성을 내면서 윤방에게 절을 하도록 윽박질렀으나, 그는 끝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의 나이가 연로한 것을 본 예친왕 돌곤이 먼저 예모(禮貌)를 갖추고 눈짓으로 좌우의 장수에게 그만두라고 만류하였다. 이후 윤방이 분사에서도 화친을 원한다는 뜻을 돌곤에게 전달하니 돌곤은 봉림대군을 만나고자 하였고, 결국 결단을 내린 봉림대군이 오랑캐 군대의 진문으로 가면서, 화의가 성립될 수 있었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익이다. 묘소는 경기도 장단 오음리(梧陰里)의 선영에 있고, 이식(李植)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이 남아 있다.[「윤방비명」] 조익(趙翼)이 윤방의 시장(諡狀)을 썼는데, 그는 윤방을 지나치게 옹호하였다는 이유로 반대파의 비난을 받고 파면되기도 하였다. 조익은 윤방의 아버지인 윤두수의 형 윤춘수(尹春壽)의 외손자였으며, 윤방의 장남 윤이지(尹履之)와 동갑이자 죽마고우였다.
부인 청주 한씨(淸州韓氏)는 판관(判官) 한의(韓漪)의 딸인데, 자녀는 2남을 두었다. 장남 윤이지(尹履之)는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 참판을 지냈고, 차남 윤신지는 선조의 제 2옹주 정혜옹주와 혼인하여 해숭위에 봉해졌다.[「윤방비명」] 정혜옹주는 선조와 김인빈(金仁嬪) 사이에서 태어난 4난 5녀 중에서 둘째딸이었는데, 김인빈의 둘째 아들이 처음에 선조가 세자로 세우고자 하였던 신성군이고, 셋째 아들이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定遠君)이다. 정혜옹주는 인조의 고모였으므로, 인조는 윤방·윤신지와 특별한 인척관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