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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94년(성종 25)∼1566년(명종 21) = 73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명종(明宗) 때 활동한 문신. 우의정과 좌의정 등을 지냈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자는 여옥(汝沃)이며, 호는 서파(西坡), 또는 회재(晦齋), 송파(松坡)이고 영평부원군(鈴平府院君)에 봉해졌다. 아버지는 현감(縣監) 윤계손(尹季孫)이며, 어머니 무송 윤씨(茂松尹氏)는 윤백연(尹伯涓)의 딸이다. 세조(世祖)의 왕후인 정희왕후(貞熹王后)의 8촌 증손이자, 통례문(通禮門) 통례(通禮) 윤담무(尹覃茂)와 이조 정랑(正郞)윤담휴(尹覃休)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중국어를 잘하였으므로, 명(明)나라와의 외교 분야에서 활동하며, 역청(瀝靑)·백철(白鐵) 등을 만드는 방법을 배워오기도 하였다. 김안국(金安國)의 문인(門人)이다. 위사공신(衛社功臣) 2등에 이름을 올렸으며,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중종 시대 활동]
1516년(중종 11)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兵戈)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3세였다. 홍문관(弘文館)저작(著作)에 임명되었으나, 대간(臺諫)들이 나이가 어리다며 서경(署經)하지 않자, 왕이 적극적으로 비호하여 등용되었다. 이어서 승정원(承政院)주서(注書)와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을 거쳐, 1519년(중종 14) 이조 좌랑(左郞)에 임명되어 많은 사림파(士林派)들을 등용하였다. 그해 11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는데, 조광조(趙光祖)와 김안국(金安國) 등이 쫓겨나자, 이에 연루되어 외직으로 좌천되었다. 기묘사화 때 이조 좌랑에서 외관(外官)으로 쫓겨난 것은 그가 중국어에 능통하였기 때문이었는데, 그가 중국어를 잘하지 못하였다면, 목숨도 위태로운 상황이었다.[『기묘당적(己卯黨籍)』]
명종 전반기 8년 동안 우의정을 역임하고 1558년(명종 13) 좌의정으로 승진하였다.[『명종실록』 13년 5월 29일] 그러나 그가 천거한 간관(諫官) 김계(金啓)가 직언(直言)을 하다 명종의 노여움을 사자, 김계를 옹호하다 지탄을 받았다. 명종은 외삼촌 윤원형을 싫어하였으므로, 윤개도 아울러 미워하였다. 그때 대간에서 좌의정 윤개가 교언(巧言)으로 국정을 어지럽힌다고 탄핵하자, 명종이 그를 파직하였다.[『명종실록』 13년 10월 5일] 그러나 훌륭한 중국어 실력 덕분에 그는 사역원(司譯院)제조(提調)에 임명되어, 중국 명나라와의 외교 문서를 관장하였다.[『명종실록』 17년 4월 11일]
1563년(명종 18) 기로소에 들어가고 궤장(几杖)을 하사 받았다. 그리고 1566(명종 21) 노병(老病)으로 서울의 본가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73세였다.
[성품과 일화]
윤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이 세심하고 잔정이 많았고, 예절을 잘 알아서 행동이 규범에 맞았다. 그러나 위인이 잔일에 정통하고 대체(大體)를 알지 못하였는데, 사람들이 혹은 그가 예를 잘 안다고 칭찬하였다. 윤원형에게 붙어서 정승이 되었으니, 그 나머지는 볼 것이 없었다고 악평을 하기도 하였다.[『석담일기(石潭日記)』 상]
1538년(중종 33) 윤개가 전라도관찰사로 있을 때 그의 친구 윤구(尹衢)가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에 임명되어, 전주로 부임해 왔다. 두 사람은 젊은 시절에 조광조(趙光祖)·김안국을 사사하는 바람에 기묘사화 때 연루되어 좌천되었던 동갑나기였다. 그때 윤개는 윤구와 평소 알고 지내던 사이였으므로 관찰사의 자리에 있다고 위엄을 부리지 않고, 도리어 반가워하며 관복을 벗고 편복(便服)차림으로 도사가 있는 남청방(南廳房)으로 찾아가서 즐겁게 담소를 나누었다. 그는 예절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관찰사의 관복을 입고 도사의 방을 찾아가지는 않았으나, 퇴청(退廳)할 때 관복을 벗고 옛 친구를 만나서 잔정을 나누었던 것이다. 또 두 사람이 민정을 살펴보기 위하여 전라도 여러 고을을 순찰하다가, 담양에 이르렀는데, 담양부사(潭陽府使) 이현(李俔)이 관찰와 도사를 위하여 간단한 술자리를 베풀었다. 담양부사 이현도 그들의 옛 친구였으므로, 세 사람이 지나간 일을 서로 이야기가 하다가 밤을 꼬박 새우기도 하였다고 한다.[『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상]
1544년(인종 즉위년) 인종 즉위 후 인종이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려고 하였는데, 대간에서 예조 판서 임권(任權)이 예의를 잘 몰라서 실수를 많이 한다고 탄핵하니, 의정부에서 특별히 윤개를 선발하여 예조 판서로 삼았다. 1545년(명종 즉위년) 어린 명종이 즉위하자, 어머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 하였는데, 그가 예조 판서로서 신하들이 대비에게 하례하는 의식과 대비가 신하들과 수렴청정 하는 법도를 대략 정비하였다. [『당적보(黨籍譜)』]
또한 당시 명종의 외삼촌으로 소윤 일파인 윤원형・윤원로 형제가 정권을 잡고 있었다. 이들은 을사사화를 일으켜서 대윤 일파의 윤임(尹任)을 비롯하여 영의정 유관(柳灌)과 이조 판서 유인숙(柳仁淑) 등 10여 명을 죽이고, 이조 정랑 노수신(盧守愼)과 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 유희춘(柳希春) 등 1백여 명을 유배하였다. 그때 윤원로가 예조 판서 윤개를 불러서 그 계사(啓辭 : 임금에게 아뢰는 글)의 초(抄)를 잡으라고 부탁하였으나, 그는 윤임・유관・유인숙 3인을 죽이라는 글을 끝까지 쓰지 않고 버티었다. 비록 소윤에 속하였으나, 그는 불의를 보고 이에 협력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11]
1557년(명종 12) 윤개가 좌의정으로 있을 때, 그해 가을 24세의 명종이 근정전(勤政殿)에서 백관들을 거느리고 잔치를 베풀었다. 그날 왕이 친히 ‘가을날에 여러 신하와 잔치하다.[秋日宴群臣]’라는 시제(詩題)를 내고,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칠언(七言) 율시(律詩)를 지어서 바치라고 하였다. 이때 좌의정 윤개는 다른 일이 있어서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그 뒤에 경연(經筵)에 참여하였을 때 좌의정 윤개가 명종에게 간하기를, “주상께서 백관들에게 시를 지으라고 한 것은 사치에 가깝습니다.” 하고 경계하였다. 윤개는 젊은 명종에게 바른 말을 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1569년(선조 2) 윤근수(尹根壽)가 선조(宣祖)에게 명종 때 재상 윤개와 윤원형에 대하여 아뢰기를, “명종이 향교에서 『소학(小學)』을 읽도록 권장하고자 하니, 좌의정 윤개가 그 뜻을 받들어 찬성하였습니다. 그때 우의정 윤원형이 이를 가로막으면서 말하기를 ”사람은 마땅히 마음으로 선(善)을 좇아야 합니다. 기묘년(1519년)에 조광조 일파가 『소학』을 숭상하더니 신사년(1521년)에 <신사무옥(辛巳誣獄)>이 발생하였고, 을사년(1545년)에 을사사화가 또 발생하였으니, 이 책이야말로 바로 난역(亂逆)을 일으키는 글입니다.” 하니, 좌의정 윤개가 그 말을 듣고 무서워서 몸을 떨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그러자 선조가 말하기를, “윤원형이 우리나라에 끼친 해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는데, 그런 말은 내가 지금 처음 들었다. 윤원형은 참으로 만세에 죄를 지은 자이다.”라고 하였다.[『선조실록(宣祖實錄)』 2년 윤6월 7일],[『국조보감(國朝寶鑑)』 권24] 윤개가 무서워서 몸을 떨었던 것은 그가 원래 조광조의 사림파에 속하였던 전력 때문이고, 윤원형을 무서워하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묘소와 후손]
윤개는 윤원형과 같은 소윤 일파였으므로, 윤원형이 실각한 다음에 을사사화 때 받은 위사공신 2등은 추후하여 삭훈되었다. 따라서 그가 죽고 난 다음에 나라에서 시호도 내려주지 않았다. 묘소는 경기도 여주(驪州)에 있는데, 당시 묘소에 비문도 세우지 않았다.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영춘군(永春君) 이인(李仁)의 딸인데, 자녀는 1남을 두었다. 아들 윤비(尹棐)는 생원시(生員試)에 장원 급제하였으나, 아버지 윤개가 윤원형의 권력에 따라 부침(浮沈)하는 것을 보고, 대과 시험을 보지 않고 은거(隱居)하였다. 대신 손자 윤담휴(尹覃休)와 윤담무(尹覃茂)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윤담휴는 통례문 통례을 지냈고, 윤담무(尹覃茂)는 이조 정랑과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