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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45년(세종 27) = ?]. 조선 초기 세종(世宗) 때의 문신이자 학자. 집현전(集賢殿)직제학(直提學)과 집현전 부제학(副提學),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등을 지냈다. 자는 자명(子明)이고, 호는 강호산인(江湖散人)이며, 시호는 공혜(恭惠)이다.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최하(崔荷)이며, 어머니 충주 지씨(忠州池氏)는 충무공(忠武公) 지용수(池龍壽)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최안해(崔安海)이고 증조할아버지는 고려에서 참지정사(參知政事)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던 최공(崔珙)이다. 최충(崔沖)의 12대손이기도 하다. 주로 집현전에서 활동하였다.
한편 최만리는 관직생활 중에 수차례 소를 올렸는데, 불교를 배척하는 내용 및 동궁의 서무(庶務)를 담당하는 첨사원(詹事院) 설치에 반대하는 상소가 가장 많았다. 불교와 관련해서는 흥천사(興天寺)의 역사(役事)나 사리부도(舍利浮屠)의 경찬회(慶讃會)와 같이 과도한 불교 행사에 비판적이었다. 첨사원 설치와 관련해서는 “정치를 둘로 하여 권한을 나누는 것은 옛사람이 경계한 바이다”라고 하면서 반대하였다.[『세종실록』 21년 4월 19일],[『세종실록』 24년 8월 26일] 그 밖에 왕명을 받아 사헌부 대사헌(大司憲)민신(閔伸), 집현전 응교 정창손(鄭昌孫), 집현전 수찬(修撰)하위지(河緯地), 양성지(梁誠之) 등과 함께 공법(貢法)에 대해 논의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25년 10월 27일]
최만리는 말년에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세종의 한글 창제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세종의 노여움을 샀다. 그리하여 집현전 직제학 신석조(辛碩祖) 및 집현전 응교 정창손, 집현전 부교리(副校理) 하위지 등과 함께 의금부에 투옥되었다가 이튿날 석방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26년 2월 20일]
[성품과 일화]
최만리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후일 청백리(淸白吏)에 녹선(祿選)될 만큼 그 성품이 청렴하고 결백하였다.
그는 환관(宦官)들을 배척하는 등의 강직한 성품을 보여주는 일화도 남겼다. 세종 대에 최만리는 상소를 통해 환관들이 연각(軟脚) 오사모(烏紗帽)를 쓰는 것은 옛 법제에 맞지 않으니, 중국의 예를 좇아 관(冠)을 쓰도록 할 것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예로부터 역대 임금 중에 환관을 총애하고 신임하여 환관의 권세가 천하를 기울게 한 일이 심히 많았사옵니다. 그런데도 능히 그 관을 바꾸지 못한 것은, 대개 환관의 무리들을 조관(朝官)과 혼동하여 사람들의 이목에 뜨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라는 것이 요체였다. 그 말이 매우 적절하였으나 모든 환관들이 흘겨보았으므로 그의 논의가 마침내 정지되었다고 한다.[『필원잡기(筆苑雜記)』 권1]
[묘소와 후손]
최만리의 묘소는 안성시 원곡면 지문리 상지문리에 있으며, 1986년 5월 안성시 향토 유적 제32호로 지정되었다.
부인 중화 양씨(中和楊氏)는 양미(楊美)의 딸로, 5남 1녀를 두었다. 1남 최각(崔塙)은 보령현감(保寧縣監)을 지냈고, 2남 최정(崔埥)은 예조 좌랑(佐郞)을 지냈으며, 3남 최당(崔塘)은 생원(生員)이었다. 4남 최은(崔垠)은 진사(進士)였으며, 5남 최연(崔堧)은 승문원(承文院) 참교(參校)를 지냈다. 1녀는 덕수 이씨(德水李氏) 이의석(李宜碩)의 처이다.
한편 최만리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의 의병장 최경회(崔慶會)의 5대 방조이며, 그의 딸이 덕수 이씨(德水李氏) 집안으로 시집을 갔기 때문에 율곡 이이(李珥)의 증외고조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