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1450년(문종 즉위) = ?]. 조선 초기 세종(世宗)~문종(文宗) 때의 문신. 예조 정랑(正郞) 등을 지냈다. 자는 석류(錫類)이고, 호는 노산(魯山) 혹은 희현당(希賢堂)이다. 본관은 평창(平昌)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판관(判官)이종미(李宗美)이고, 어머니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종친(宗親)으로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의 아들인 이징(李澄)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이육(李稑)이며, 증조할아버지는 고려조에 산기상시(散騎常侍)를 지낸 이천기(李天驥)이다.
[세종~문종 시대 활동]
일찍이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434년(세종 16)에는 알성 문과에 을과 3등으로 급제하여 집현전에 들어갔다.[『국조방목(國朝榜目)』] 이후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에 발탁되었으며, 1446년(세종 28)에는 집현전(集賢殿) 수찬(修撰)으로 돈녕부(敦寧府) 주부(注簿)인 강희안(姜希顔)과 함께 불경(佛經)을 금자(金字)로 쓰는 일을 맡아서 하였다.[『세종실록』 28년 3월 28일] 그리고 그 해 겨울 병조 정랑(正郞)이 되었다.[『세종실록』 28년 12월 8일]
이영서는 특히 글씨에 뛰어났다고 전해지는데, 그의 글씨는 삼국시대부터 한말에 이르기까지 역대 서예가들의 글씨를 집성한 『명가필보(名家筆譜)』에도 소개되어 있다.[『명가필보(名家筆譜)』]
[성품과 일화]
이영서는 간통으로 여러 차례 곤욕을 치른 바 있다. 생원(生員)으로 있을 때 성균관(成均館)에 속해 있는 종의 처를 간통하였다가 붙잡혀 머리카락을 잘렸다. 이때 병조 정랑 이현로(李賢老)가 그의 집에 이르러 위로하고 희롱하며 말하기를, “자네의 머리털은 꼭 부추나물일세 그려” 하니, 이영서가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졌다. 부추나물은 베면 다시 나기 때문에 한 말이었다.[『세종실록』 30년 6월 5일]
1448년(세종 30) 당시 이조 정랑이던 이영서는 기생 소양비(笑楊妃)가 있는 곳에 갔는데, 이 기생은 사정(司正) 민서(閔敍)와 관계가 있는 여자였다. 이 소식을 들은 민서가 자신의 아우 민발(閔發)과 조카 민효원(閔孝元)을 데리고 지팡이를 가진 채 돌입하여 이영서를 결박한 후 머리카락을 자르고 칼을 겨누며 말하기를, “내가 네 목을 끊지 않는 것은 네가 나의 은문(恩門)이기 때문이다”하였다. 민서가 무과(武科)를 볼 때에 이영서가 시관(試官)으로 참여하였으므로 은문(恩門)이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죽을 지경이 되도록 때리고, 옷을 빼앗은 뒤에 뒷결박을 하여 형조로 데려갔다. 도중에 한 조관(朝官)이 말에서 내려 애절하게 청하였으나, 민서가 말 위에서 눈을 부라리며 욕질을 하였기 때문에 누구도 감히 가까이 할 수 없었다. 이후 형조에서 그 기생은 가두고 이영서는 석방하였으므로 이영서는 들것을 타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세종실록』 30년 6월 5일]
[후손]
이영서는 2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 첫째 아들 이계남(李季男)은 연산군(燕山君) 대에 호조 판서(判書)를 역임하였으며,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여하여 보사반정공신(保社反正功臣) 2등에 녹훈되고 평원군(平原君)에 봉해졌다. 둘째 아들 이계동(李季仝)은 1470년(성종 1) 무과에 급제하였고, 1479년(성종 10)에는 윤필상(尹弼商)을 따라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하는 등 북변(北邊)에서 무공으로 이름이 높았다. 딸은 중종반정 당시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에 책록된 유홍(柳泓)과 결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