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1390(공양왕 2)~1454년(단종 2) = 65세]. 조선 초기 세종(世宗)~단종(端宗) 때의 문신.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와 예문관(藝文館)제학(提學) 등을 지냈다. 자는 가보(家父)이고, 호는 필문(篳門)이다. 본관은 광주(光州)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장흥부사(長興府使)를 지낸 이일영(李日英)이고, 할아버지는 고려 때 밀직제학을 지낸 이홍길(李弘吉)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이기(李奇)이다.
[세종 시대 활동]
권근(權近)의 문하에서 글을 배운 이선제는 1419년(세종 1) 증광시 문과에 급제한 후 1423년(세종 5)『고려사(高麗史)』를 개수할 때 사관(史官)으로 참여하였다. 이때 정도전(鄭道傳) 등이 앞서 편찬한 『고려사』가 이색(李穡)·이인복(李仁復)이 지은 『금경록(金鏡錄)』을 참고하는 바람에 사실(史實)과 다른 점이 많다고 지적하며 그 실상을 직서(直敍)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5년 12월 29일] 1431년(세종 13) 집현전(集賢殿)부교리(副校理)로 춘추관(春秋館)기사관(記事官)이 되어 『태종실록(太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으며,[『태종실록』 부록] 1442년(세종 24)에는 흥천사(興天寺) 사리각(舍利閣) 경찬소문(慶讚疏文)을 지어 올렸다.[『세종실록』24년 3월 12일]
[문종~단종 시대 활동]
문종 즉위 후 예문관 제학에 제수되었으며,[『문종실록』 즉위년 7월 6일] 세자의 첫 번째 서연에 우부빈객(右副賓客)으로 나아가 『소학(小學)』을 강론하였다.[『문종실록』 즉위년 9월 17일] 이선제는 임금에게 서북지방의 군제(軍制) 정비, 야인의 객관(客館) 별치(別置), 어염세(魚鹽稅)의 확보를 통한 국가 재정 확충 등을 건의하였다.[『문종실록』 즉위년 10월 10일] 그러는 가운데 1449년(세종 31)부터 시작되었던 『고려사』 편수가 1451년(문종 1)에 완료되자 그 공으로 이선제는 문종으로부터 안장을 갖춘 말 1필을 하사 받았으며,[『문종실록』 1년 8월 30일] 이듬해에는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편찬에도 참여하였다.[『문종실록』 2년 2월 20일]
같은 해 2월 경창부윤(慶昌府尹)에 임명된 그는 단종(端宗) 즉위 후인 그해 6월 황해도 지역에 창궐했던 전염병 방제를 위해 전력을 기울였으며,[『단종실록』 즉위년 6월 28일] 이어 왕실 의료를 담당하는 의원의 시취와 약재 운용에 대해서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단종실록』즉위년 12월 25일] 1453년(단종 2) 겨울 서울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하니, 당시 그의 나이 65세였다.
[성품과 일화]
이선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현재 이선제의 부조묘는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 만산마을에 있다. 이곳에는 광주광역시기념물 제24호로 지정된 600여 년의 왕버들 노거수가 있는데 이 나무를 이선제가 심었다고 전한다. 이후 그의 후손들이 과거에 급제하면 이 나무에 북을 걸어놓고 잔치를 벌였다고 하여 괘고정수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또한 조선 초기 무진군으로 강등되었던 광주를 광주목으로 승격시키는데 공을 세웠으며, 광주 지역 인재발굴을 위하여 젊은 선비들을 뽑아 강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묘소와 후손]
묘소는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 535-1에 있다. 무덤 주변으로는 광주광역시 민속자료 제7호로 지정된 이선제 부조묘가 있고, 500여 미터 떨어진 곳에는 신도비가 있다.
부인 보성 선씨(寶城宣氏)는 고려 말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를 지낸 선윤지(宣允祉)의 딸로, 자녀는 5남 1녀를 두었다. 1남 이시원(李始元)과 5남 이형원(李亨元)이 문과에 급제하며 이름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