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1417년(태종 17) ~ 1456년(세조 2) = 40세]. 조선 초기 세종(世宗)~세조(世祖) 때의 문신. 집현전(集賢殿) 학자이자 사육신 중 한 명. 자는 청보(淸甫) 또는 사고(士高)이고, 호는 백옥헌(白玉軒)이며,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본관은 한산(韓山)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이계주(李季疇)이며, 어머니 삼척 진씨(三陟陣氏)는 진명례(陳明禮)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중추원사(中樞院使)를 지낸 이종선(李種善)이고, 증조할아버지는 고려 말 문신학자인 이색(李穡)이다.
[세종~문종 시대 활동]
1436년(세종 18) 친시 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고[『방목(榜目)』], 1441년(세종 23) 집현전 저작랑(著作郞)으로서 『명황계감(明皇誡鑑)』 편찬에 참여하였다.[『세종실록』 23년 9월 29일] 1444년(세종 26)에는 집현전 부수찬(副修撰)으로서 의사청(議事廳)에 나가 한글로 『운회(韻會)』를 번역하는 일에 참여하여 세종으로부터 상을 받았으며,[『세종실록』 26년 2월 16일] 『훈민정음(訓民正音)』 편찬에도 참여하였다.[『세종실록』 28년 9월 29일] 1447년(세종 29) 중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방목』] 같은 해에 『동국정운(東國正韻)』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1448년(세종 30)에는 지대구군사(知大丘郡事) 이보흠(李甫欽)이 조정에 사창(社倉)의 설치를 주장했을 때 백성들에게 부담을 준다는 점을 들어 반대하였다.[『세종실록』3 0년 5월 15일 1번째기사]
[단종 시대 활동]
세종의 명으로 편찬하기 시작한 『역대병요(歷代兵要)』가 1453년(단종 1) 완성되었는데 이개도 이 작업에 참여하여 관품이 한 자급 승급되었다.[『단종실록』1년 4월 21일] 같은 해 10월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을 보좌하던 대신 황보 인(皇甫仁)과 김종서(金宗瑞) 등을 살해하고 정권을 쥔 이른바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났고, 직후 이개는 사헌부(司憲府)집의(執義)에 임명되었다.[『단종실록』 1년 10월 15일] 11월에 정난에 공이 있는 자들에 대한 포상을 시행할 때 이개는 중훈(中訓)으로 승진되었으나,[『단종실록』 1년 11월 8일] 자신은 정난에 공이 없다며 가자의 취소를 청하기도 하였다.[『단종실록』 1년 11월 10일]
[세조 시대 활동]
세조 즉위 이후 이개는 관제(官制) 편찬에 참여하였으며,[『세조실록』 1년 9월 2일] 이듬해 2월에는 집현전 부제학에 임명되었다.[『세조실록』 2년 2월 4일] 같은 해 6월 성균관(成均館)사예(司藝)김질(金礩)의 고변으로 이개를 비롯한 성삼문·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유응부(兪應孚)·유성원(柳誠源) 등 육신(六臣)이 주동이 된 <단종 복위 사건>이 발각되었다. 이 사건으로 이개는 의금부에 체포되어 국문을 당하였고,[『세조실록』2년 6월 2일], 결국 거열형에 처하라는 명을 받았다[『세조실록』2년 6월 7일] 그리고 1456년(세조 2) 6월 8일 이개는 성삼문 등과 함께 군기감 앞에서 거열형으로 사망하였으니,[『세조실록』 2년 6월 8일] 당시 그의 나이 40세였다.
사후에 남효온(南孝溫)이 당시 공론(公論)에 따라 단종 복위 사건의 주도 인물인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 6인을 선정하여 『육신전(六臣傳)』을 지었다. 『육신전』이 세상에 공포된 뒤 육신의 절의를 국가에서도 공인하여 1691년(숙종 17) 사육신의 관작을 추복(追復)시켰다. 그리고 1758년(영조 24)에는 이조 판서(判書)에 추증되고, 노량진의 민절서원(愍節書院)과 홍주의 노운서원(魯雲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그의 작품으로는 몇 편의 시가 전하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까마귀 눈비맞아 희난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이 밤인들 어두우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라는 단가(短歌)가 있다.
[성품과 일화]
이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어려서부터 글을 잘하여 할아버지의 풍도(風度)가 있었다. 단종 복위 사건이 발각되어 국청(鞫廳)에 잡혀갔는데, 박팽년과 성삼문을 대궐 뜰에 묶어놓고 작형(灼刑)을 하자 이개는 느긋하게 “이것이 무슨 형벌인가?” 하였다. 사람됨이 파리하고 연약했지만 엄한 형벌을 받으면서도 안색을 변치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장하게 여겼다. 사형 당일 수레에 실려 형장으로 가면서 시를 짓기를, “우정(禹鼎)이 중할 때에는 사는 것 역시 크지만, 홍모(鴻毛)처럼 가벼운 곳에는 죽음 역시 영광이네. 잠 못 이루고 내일 아침 날 밝아 문을 나서는데, 현릉의 소나무와 잣나무 꿈속에서도 푸르네.”라고 하였다.[『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동각잡기(東閣雜記)』]
[묘소와 후손]
묘소는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1동 185-2 사육신묘 내에 위치해있다. 이개의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이속(李栗)의 딸이다. 이개가 거열형으로 사망한 후 재산은 몰수당하였고, 남은 가족들은 연좌형에 따라 처결되었다.[『세조실록』 2년 6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