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1456년(세조 2) = ?]. 조선 초기 세종(世宗)~세조(世祖) 때의 문신. 집현전(集賢殿)박사(博士)와 직집현전(直集賢殿) 등을 지냈다. 자는 태초(太初)이고, 호는 낭간(瑯玕)이며,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본관은 문화(文化)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사인(舍人)유사근(柳士根)이고, 어머니 남원 윤씨(南原尹氏)는 윤임(尹臨)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유호(柳滸)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유수(柳濡)이다. 사육신(死六臣)의 한 명으로, <단종(端宗) 복위 운동>이 발각되자 자결하였다.
이후 남효온(南孝溫)은 단종 복위 운동 당시 생을 마감한 유성원과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응부 등의 전기를 실은 『육신전(六臣傳)』을 작성하여 이들을 기렸다. 그리고 1691년(숙종 17) 숙종(肅宗) 대에 사육신의 관작이 추복되며 유성원의 관작도 추복되었고, 영조(英祖) 대에는 이조 판서(判書)에 추증되었다.[『숙종실록』 17년 12월 6일]
[성품과 일화]
유성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세종께서 처음으로 집현전을 설치하고 문장과 학문이 있는 선비들을 맞아들였을 때 유성원이 참가하였는데, 박팽년·성삼문과 함께 당시에 이름이 높았다.[『해동잡록(海東雜錄)』 권4 「유성원(柳誠源)」]
세종조에 『송사(宋史)』가 본국에 도착하지 않아 세종이 누차 진달하여 간청하였지만 중국으로부터 하사받지 못하였다. 하루는 집현전의 여러 선생들이 송조(宋朝)의 인물을 논하였는데, 서거정(徐居正)도 그 맨 끝 자리에 있었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송사』를 짓는다면 왕안석(王安石)을 어떤 전에다 두어야 합당하겠는가?” 하니, 모두 간신전(奸臣傳)에 두어야 합당하다고 말하였다. 한두 사람이 논박하기를 “왕안석이 신법(新法)을 만들어 천하를 혼란스럽게 하였으니, 이 사람은 정말 소인이다. 그러나 왕안석의 문장과 절의는 일컬을 만한 점이 많으며, 그의 본심을 따져 보면 일찍이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는 데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가 천하의 정도를 그르친 것은 오활하고 고집스러웠기 때문이니, 진회(秦檜)나 채경(蔡京)과 같은 무리와는 차원이 다르다. 따라서 열전(列傳)에 두는 것이 합당하다” 하였고, 유성원도 강력하게 이 논의를 주장하였다. 얼마 후에 『송사』가 도착하였는데 왕안석이 과연 열전에 들어 있었다. 유성원이 기뻐하며 이르기를 “옛날에 주자(朱子)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이 우리나라에 도착하기 전에 익재(益齋) 선생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의 「무후기(武后記)」를 읽고 길게 한숨 쉬고 탄식하면서 ‘어찌하면 주(周) 나라의 여분을 가져다가 우리 당나라 일월을 이어 갈까〔那將周餘分 續我唐日月〕’라는 시 한 연(聯)을 지었는데, 뒤에 『자치통감강목』을 얻어 보니, 과연 주나라를 내치고 당(唐)나라를 높여 놓았다. 이에 익재 선생이 자못 자부하는 마음을 가졌다. 내가 비록 감히 익재 선생에게 견줄 수는 없겠지만, 마땅히 제군들의 항번(降幡)은 받을 것이다” 하였다.[『육선생유고(六先生遺稿)』 부록 「유선생사실(柳先生事實)」]
한편 그가 세상을 떠날 때와 관련된 기록도 남아 있다.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어 성삼문이 잡혀갔다. 유성원은 이때 성균관에 있었는데 제생(諸生)이 성삼문의 일을 알리니 곧 차비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와 술을 따르며 결별하고 사당으로 올라간 유성원은 오래도록 내려오지 않았는데, 가서 보니 관대(冠帶)를 벗지 않고 패도(佩刀)를 뽑아 목을 찌른 뒤였다. 급히 구하였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까닭을 알지 못하였는데, 얼마 뒤 형리(刑吏)가 와서 시신을 거두어가 사지를 찢는 형을 가하였다.[『국조인물고』 권43 「유성원」]
[묘소와 후손]
영조 때 충경으로 시호를 내렸다.[『영조실록』 34년 10월 7일] 묘소는 서울 동작구 노량진1동 185-2에 있는데, 유성원이 거열형에 처해질 때 일가 친지들도 모두 연좌되는 바람에 시신을 수습할 수가 없어서 현재는 가묘로 조성되어 있다. 원래 이곳은 박씨(朴氏), 유씨(兪氏), 이씨(李氏), 성씨(成氏)의 무덤이 있던 곳으로 박팽년, 유응부, 이개, 성삼문이 묻힌 사육신묘로 전해져 왔다. 그러다가 1970년대에 사육신묘역 정화사업을 펼치면서 유성원과 하위지, 김문기(金文起)의 가묘도 이곳에 추봉하였던 것이다. 사육신묘는 1972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8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사육신은 노량진의 민절서원(愍節書院), 홍주의 노운서원(魯雲書院),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등에 제향되었다.[『영조실록』 1년 3월 4일] 정조(正祖) 대에는 단종의 묘소인 장릉(莊陵) 내부에 배식단을 조성하였는데, 유성원도 사육신의 한 명으로서 여기에 배향되었다.[『정조실록』 15년 2월 21일]
유성원이 교열형에 처해진 후 그의 일가친척들도 연좌되어 처벌되었다. 아들들은 모두 교형에 처해졌으며, 아내와 딸, 첩, 조손(祖孫), 형제, 자매, 백부, 숙부, 조카들은 모두 노비가 되었다. 이후 이들 가운데 일부는 공신에게 하사되었는데, 아내 미치(未致)와 딸 유백대(柳百代)는 한명회(韓明澮)에게 하사되기도 하였다.[『세조실록』 2년 6월 7일],[『세조실록』 2년 9월 7일] 그리고 1468년(세조 14) 세조의 병이 심각해지자 계유정난 이후의 난신들과 연좌된 이들 다수를 방면하였는데, 유성원의 조카들도 여기에 포함되어 방면되었다.[『세조실록』 14년 9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