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1405년(태종 5)~1475년(성종 6) = 71세]. 조선 초기 세종(世宗)~성종(成宗)때의 문신. 이조 판서(判書)와 중추부 판서 등을 지냈다. 자는 만종(萬從)이고, 호는 구천(龜川)이며,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본관은 함종(咸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집현전(集賢殿)직제학(直提學)을 지낸 어변갑(魚變甲)이며, 어머니 창녕 성씨(昌寧成氏)는 두문동 72현 가운데 한 명인 성사제(成思齊)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대구현령(大邱縣令)을 지낸 어연(魚淵)이고, 증조할아버지는 고려 때 전객시(典客寺) 전객령(典客令)을 지낸 어백유(魚伯遊)이다.
1434년(세종 16)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좌사경(左司經) 어효첨(魚孝瞻)은 세종의 명을 받아 집현전(集賢殿)수찬(修撰) 이계전(李季甸) 및 집현전 부수찬(副修撰)최항(崔恒) 등과 함께 『자치통감(自治通鑑)』을 고열한 『자치통감훈의(自治通鑑訓義)』를 참교(參校)하였다.[『세종실록』 16년 6월 26일] 이듬해인 1435년(세종 17)에는 어효첨이 호삼성(胡三省)의 음주본(音註本) 『자치통감』의 일부를 구하여 바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17년 3월 22일] 이후 집현전 교리(校理)로서 어효첨은 세자와 함께 세종의 수릉(壽陵 : 임금이 미리 준비해 두는 자신의 무덤) 선정에 관여하였으나, 이선로(李善老) 등이 풍수설을 이용하여 여러 공사를 건의하자 주자(朱子) 등의 말을 인용하여 지리에 따라 화복(禍福)이 좌우된 것은 옳지 않다며 풍수설을 배척할 것을 건의하였다.[『세종실록』 26년 6월 27일],[『세종실록』 7월 17일 3번째기사],[『세종실록』 윤7월 15일 2번째기사],[『세종실록』 26년 12월 21일]
[세조~성종 시대의 활동]
1455년(세조 1) 세조(世祖)가 왕위에 오른 후에도 어효첨은 이조 참의로서 세조를 보좌하였으며, 그해 12월 세조 즉위에 공이 있다 하여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세조실록(世祖實錄) 1년 8월 9일 2번째기사』],[『세조실록』 1년 12월 27일] 이듬해인 1456년(세조 2)에는 이조 참판(參判)에 임명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성삼문(成三問) 등이 단종의 복위를 계획한 <사육신(死六臣) 사건>이 발생하자 이조 참판으로서 이들을 국문하는데 참여하였다.[『세조실록』 2년 2월 19일],[『세조실록』 2년 6월 2일] 이어 호조 참판이 된 어효첨은 정인지(鄭麟趾)·정창손(鄭昌孫) 등과 함께 사육신 사건을 예로 들며 단종과 세조 사이에서 반란을 일으키려는 사람들이 있으니 단종을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요구하였으나 세조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세조실록』 2년 12월 9일]
세조가 세상을 떠나고 예종(睿宗)이 왕위에 오르자, 어효첨은 1469년(예종 1) 중추부 동지사로서 명(明)나라 사신의 관반사(館伴使)를 임무를 수행하였다.[『예종실록(睿宗實錄)』 1년 1월 5일] 그리고 같은 해에 예종이 세상을 떠나고 성종(成宗)이 왕위를 이은 후, 어효첨은 중추부 판사가 되었다.[『성종실록(成宗實錄)』 1년 9월 19일] 이어 행(行) 중추부 지사와 행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하였고, 1474년(성종 5)에는 봉조하(奉朝賀)를 제수 받아 숭정대부 중추부 판사 봉조하가 되었다.[『성종실록』 2년 3월 12일],[『성종실록』 2년 9월 12일],[『성종실록』 5년 2월 10일] 그리고 1년여 뒤인 1475년(성종 6) 1월 세상을 떠났으니, 당시 나이 71세였다. 그리고 경직(敬直)하고 자혜로운 것을 ‘문(文)’이라 하고, 덕을 지니고 간사하지 않은 것을 ‘효(孝)’라 하여 ‘문효’라는 시호가 내려졌다.[『성종실록』 6년 1월 3일]
한편 어효첨은 성리학 특히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어 문종이 세자이던 시절 문종에게 『예기(禮記)』를 강하면서 이와 관련된 여러 학자들의 학설들을 정리하여 주석을 단 『예기일초(禮記日抄)』를 저술하였는데, 문종이 이를 홍문관(弘文館)에 보관하게 하였다.[『성종실록』 6년 1월 3일],[『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4 「문종조고사본말(文宗朝故事本末)」] 그가 세상을 떠난지 35년 만인 1510년(중종 5)에는 윤금손(尹金孫)이 외가인 함종 어씨(咸從魚氏)의 시문집 『함종세고(咸從世稿)』를 간행하였는데, 여기에는 어변갑과 어효첨, 어세겸(魚世謙) 3대의 시문이 실려 있다.[『삼탄집(三灘集)』「삼탄집발(三灘集跋)」]
[성품과 일화]
어효첨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어려서부터 기상(氣像)과 도량(度量)이 단정(端正)하고 엄숙하여 엄연(儼然)한 모습이 어른과 같았다.[「어효첨비명」] 성품이 순박하여 번화함을 좋아하지 않았고, 성색(聲色)도 좋아하지 않았으며, 어버이를 섬기어 효도하였다. 관직에 임하면 부지런하고 삼가하여 이단(異端)에 미혹되지 않았으며, 모든 음양(陰陽)과 풍수(風水)·신불(神佛)·사벽(邪僻)하는 일은 일찍이 힘써 물리쳤다.[『성종실록』 6년 1월 3일]
한편 세조는 연회를 베풀 때면 어효첨에게 춤을 추도록 하는 일이 자주 있었는데, 술에 취한 뒤에는 어깨가 높이 솟아오른다고 하여 이인로(李仁老)의 시 가운데 “배에 기댄 어부(漁夫)의 한쪽 어깨가 높다.[倚船漁父一肩高]”는 구절을 본 따 어부(漁父)라고 부르곤 하였다.[『세조실록』 5년 3월 14일],[『세조실록』 9년 3월 10일],[『세조실록』 13년 8월 1일] 1462년(세조 8)에는 세조가 베푼 연회에서 어효첨이 술을 많이 마셔 인사불성이 되어 기생과 함께 춤을 춘 일이 있었다. 어효첨은 임금의 명이 없었는데, 자리에서 일어나 기생과 춤을 춘 것은 예를 벗어난 행동이었다며 대죄(待罪)를 청하였다. 그러자 세조기 “나는 오히려 즐거워 웃었는데 무슨 죄가 있겠는가? 모름지기 다시 나오도록 하라.”는 답변을 보냈다는 일화도 전한다.[『세조실록』 8년 12월 13일]
또한 어효첨이 사헌부에 있을 때의 이야기도 남아 있는데, 당시 서울 안의 관청들은 지전(紙錢)을 걸어 둔 조그만 사당을 짓고 부군당(府君堂)이라 부르며 관원들은 여기에 모여 제사를 지냈다. 사헌부도 마찬가지였는데, 어효첨이 사헌부 집의가 된 후 “부군당이란 어떻게 되어 먹은 물건이냐.”고 하면서, 지전을 철거하고 사당을 태워버렸다. 그리고 제사를 완전히 근절시키고 말하기를, “어찌 사헌부에 음란한 제사와 이름 없는 귀신이 있을 것인가.” 하였다. 이후부터는 역임했던 관청마다 이것을 다 불살라 버렸다고 한다.[『연려실기술』 권4 「문종조고사본말」],[『용재총화(慵齋叢話)』 권9]
[묘소와 후손]
원래 묘소는 서울시 고덕동에 있었으나, 도시 개발로 인하여 1982년 경기도 여주시 가남읍 금당리에 있는 함종 어씨 세장지로 이장하였다. 어효첨이 세상을 떠나고 259년 후인 1734년(영조 10)에 신도비를 조성하였는데, 신도비명은 이의현(李宜顯)이 작성하였고, 글씨는 그의 10대손 어유봉(魚有鳳)이 썼다.
부인 반남 박씨(潘南朴氏)는 좌의정을 지낸 평도공(平度公) 박은(朴訔)의 딸로, 자녀는 2남 2녀를 두었다. 1남은 좌의정 어세겸이고, 2남은 호조 판서 어세공(魚世恭)이다. 1녀는 첨지(僉知) 유숙(柳塾)의 처이며, 2녀는 부승(府丞) 윤지강(尹之崗)의 처이다. 또한 5대손 돈녕부(敦寧府) 영사(領事) 어유귀(魚有龜)의 딸이 경종(景宗)의 계비인 선의왕후(宣懿王后)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