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1381년(우왕 7)~1435년(세종 17) = 55세]. 조선 초기 정종(定宗)~세종(世宗) 때의 문신. 경연청(經筵廳) 검토관(檢討官)과 집현전(集賢殿)직제학(直提學) 등을 지냈으며,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자는 자선(子先)이고, 호는 면곡(綿谷)이다. 본관은 함종(咸從)이며, 거주지는 함안(咸安)과 서울이다. 아버지는 대구현령(大邱縣令)을 지낸 어연(魚淵)이고, 어머니 함안 이씨(咸安李氏)는 무진부사(茂珍府使) 이운길(李云吉)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고려 때 전객시(典客寺) 전객령(典客令)을 지낸 어백유(魚伯遊)이며, 증조할아버지는 고려 때 삼사(三司) 좌윤(左尹)을 지낸 어득룡(魚得龍)이다.
이후 세종이 왕위에 오른 후 어변갑은 『정종실록(定宗實錄)』의 편수에 참여하였고, 이어 1420년(세종 2) 세종이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자 집현전 응교(應敎)에 임명되었다가 1422년(세종 4) 집현전 직제학이 되었다.[『세종실록(世宗實錄)』 2년 3월 16일],[『국조인물고』「어변갑행장」] 그리고 1423년(세종 5)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과 비교하여 볼 때 『고려사(高麗史)』가 너무 소략하므로 국가의 일을 자세히 기재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는 세종의 판단에 따라 어변갑은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춘추(春秋)를 겸직하게 하였다.[『세종실록』 5년 6월 24일] 이후 어변갑은 『태종실록(太宗實錄)』 편찬에 참여하는 등 집현전 직제학으로서의 활동을 이어가다가 1432년(세종 14) 5월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사직하였다. 이에 세종이 그를 사간원 지사(知事)로 임명하였으나, 어변갑은 이마저도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세종실록』 6년 1월 25일],[『세종실록』 14년 5월 17일],[『국조인물고』「어변갑행장」]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1435년(세종 17)에 어머니 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이때 그의 나이 55세였다.[『국조인물고』「어변갑행장」]
그가 세상을 떠난 지 75년 만인 1510년(중종 5)에 윤금손(尹金孫)이 외가인 함종 어씨(咸從魚氏)의 시문집 『함종세고(咸從世稿)』를 간행하였는데, 여기에는 어변갑과, 어효첨(魚孝瞻), 어세겸(魚世謙) 3대의 시문이 실려 있다.[『삼탄집(三灘集)』「삼탄집발(三灘集跋)」]
[성품과 일화]
어변갑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세종이 그의 효행을 아름답게 여겨 특별히 벼슬을 주었으나, 사퇴하고 취임하지 않았다.[『세종실록』 14년 5월 17일] 어변갑이 사퇴하고 귀향하여서는 부모 모두 살아 계시고 여러 아우들도 무고(無故)하였다. 조석으로 좋은 음식을 대접하고 날마다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을 일과로 삼았으며, 재산 다스리는 일은 하지 않았다. 오래 된 재산 증식을 위한 식화 계권(殖貨契券)도 모두 불사르고 조금도 관가에 간섭하는 일이 없었으니, 참으로 청세(淸世)의 한 한인(閑人)이었다.[『국조인물고』「어변갑행장」]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남 함안군 산인면 내인리 35번지에 있다. 1995년 아버지 어연 및 어머니 함안 이씨의 묘소와 함께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224호로 지정되었다. 고성의 면곡서원(綿谷書院)에 제향되기도 하였다.
어변갑의 부인은 창녕 성씨(昌寧成氏) 두문동 72현 가운데 한 명인 성사제(成思齊)의 딸로 1남을 두었는데, 바로 어효첨이다. 어효첨은 1429년(세종 11) 과거에 급제한 이후 이조 판서(判書)와 중추부 판서 등을 역임하였으며, 그의 아들인 어세겸과 어세공(魚世恭)은 각각 좌의정과 호조 판서를 역임하였다.[『성종실록(成宗實錄)』 6년 1월 3일],[『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6년 11월 28일],[『성종실록』 17년 7월 15일] 또한 6대손 돈녕부(敦寧府) 영사(領事) 어유귀(魚有龜)의 딸이 경종(景宗)의 계비인 선의왕후(宣懿王后)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