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1453년(단종 1) = ?]. 조선 초기 세종(世宗)~ 단종(文宗) 때의 문신. 사헌부(司憲府)헌납(獻納), 집현전(集賢殿)직제학(直提學) 등을 지냈으며, 형조 참판(參判)으로서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원래 이름은 안택경(安宅慶)이었으나 개명하였다. 호는 정암(貞菴)이다. 본관은 광주(廣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역임한 안처선(安處善)이고, 어머니 능성 구씨(綾城具氏)는 두문현 72현 가운데 한 명인 구홍(具鴻)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낭장(郞將) 안정(安鼎)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총판(摠判) 안사충(安社忠)이다.
1431년(세종 13) 세종과 대신(大臣)들이 영평현(永平縣) 보장산(寶藏山)으로 강무(講武)에 나갔다가 추운 날씨로 인해 포천(抱川) 매장원(每場院)에서 멈췄다. 이때 추위와 굶주림에 죽은 자가 있어 대신들로 하여금 술과 음식을 내어 구조하게 했지만 많은 사람과 말이 죽었다.[『세종실록』 13년 2월 20일] 이 사건으로 당시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 민의생(閔義生)과 경기도경력(京畿道經歷) 안완경(安完慶)은 즉시 구호에 착수하지 않은 죄로 의금부에 갇혔는데 안완경은 곧 복직되었다.[『세종실록』 13년 2월 23일],[『세종실록』 13년 2월 24일],[『세종실록』 13년 2월 25일],[『세종실록』 13년 2월 27일] 1435년(세종 17) 집현전 직제학으로서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의 찬집관으로 참여했으며, 이 시기에 문과 중시(重試)에 응시하여 을과로 급제하였다.[『세종실록』 17년 6월 8일],[『방목(榜目)』]
1436년(세종 18) 여진족 가운데 하나인 올량합(兀良哈)이 평안도에 침입해서 사람과 말, 소를 침탈했다. 이 일로 당시 예문관(藝文官) 직제학이던 안완경이 평안도경차관(平安道敬差官)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경차관으로서 평안도절제사(平安道節制使) 이각(李恪)과 여연군지사(閭延郡知事) 김윤수(金允壽)에게 적을 막지 못한 죄를 묻고 탄핵했다.[『세종실록』 18년 5월 23일],[『세종실록』 18년 6월 22일] 1437년(세종 19) 형조 지사(知事)로 있을 때, 정상문(丁尙文)과 그의 종숙(從叔) 조홍(祖洪) 사이에서 여종을 주고받는 문제로 소송이 벌어졌다. 이때 안완경은 소송에 개입하여 그들을 억지로 화해시켰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어 장(杖) 80의 처벌을 받았다.[『세종실록』 19년 6월 21일]
[성품과 일화]
안완경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겉으로는 봄처럼 온화한 태도로 꾸몄으나 속으로는 여우처럼 간사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는 남을 비방하거나 칭찬하는 것을 치우치게 하고, 음욕(淫慾)이 많아서 집안에 들어가면 상시 속옷을 벗고 첩을 희롱하고 있었다.[『문종실록』 즉위년 9월 21일] 또한 그 성질이 유약해서 그가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자, 사람들은 모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문종실록』 즉위년 11월 21일]
[배향과 후손]
정조(正祖) 때에 단종의 묘소인 장릉(莊陵)에 배식(配食)할 사람을 뽑았는데, 절의가 가장 높고 그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인물 위주로 뽑았다. 이때 안완경은 그 사적이 자세하지 않았으므로 장릉 배식단(配食壇)의 별단(別壇)에 올랐다.[『정조실록』 15년 2월 21일],[『정조실록』 15년 2월 21일]
부인 파평 윤씨(坡平尹氏) 윤정산(尹定山)은 예조 참의를 지낸 윤수(尹粹)의 딸이다. 안완경이 교형에 처해진 후, 관노가 되었다가 성종(成宗) 때에 풀려났다.[『성종실록』 3년 5월 24일] 자녀로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안효손(安孝孫)이고, 딸은 호군(護軍) 박임무(朴林茂)의 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