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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382년(우왕 8)~1433년(세종 15) = 52세]. 조선 전기 태종(太宗)부터 세종(世宗) 때의 문신. 춘추관(春秋館)동지사(同知事)와 공조 좌참판(左參判) 등을 지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자는 제부(濟夫)이고, 호는 암헌(巖軒)이다.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고려(高麗) 때 공조 참의(參議)를 지낸 신포시(申包翅)이고, 어머니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두문동 72현에 속하는 김충한(金忠漢)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예의사(禮儀司) 판서(判書)신덕린(申德隣)으로 역시 두문동 72현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신사경(申思敬)이다. 신숙주(申叔舟)와 신말주(申末舟)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사장(詞章)과 서예를 잘 하였다.
한편 그해 3월 세종이 『태종실록(太宗實錄)』을 열람하려고 하자, 신장은 맹사성(孟思誠), 윤회(尹淮) 등과 함께 “전하께서 만일 이를 보신다면 후세의 임금이 반드시 이를 본받아서 고칠 것이며, 사관도 군왕이 볼 것을 의심하여 사실을 반드시 다 기록하지 않을 것이니 어찌 후세에 그 진실함을 전하겠습니까,”라며 반대하여 세종이 『태종실록』을 보지 못하게 하였다.[『세종실록』 13년 3월 20일] 이어 5월 신장은 공조 참판(參判)이 되었는데, 이때 그는 『동인문(東人文)』과 『익재집(益齋集)』을 교정하고,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를 찬수하였다.[『세종실록』 13년 5월 21일],[『세종실록』 13년 5월 22일],[『세종실록』 14년 1월 19일] 이듬해인 1432년(세종 14) 3월에는 공조 좌참판이 되었고, 같은 해에 세종의 명을 받아 양궁(兩宮)의 강녕을 바라는 「남산지곡(南山之曲)」과 태조(太祖)와 태종의 공덕을 노래한 「문무악장(文武樂章)」 등을 만드는 데 참여하였다.[『세종실록』 14년 3월 18일],[『세종실록』 14년 9월 19일],[『세종실록』 14년 12월 10일]
이 외에도 그는 중국에 보내는 사대문서(事大文書)와 세자 교육을 담당하는 등 가까운 거리에서 세종을 보좌하다가 1433년(세종 15) 2월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세종실록』 세종 15년 윤8월 11일 3번째기사] 그는 윤회(尹淮) 등과 함께 세종의 총애를 받던 신하로서 사장(詞章)에 능하고, 초서(草書)와 예서(隷書)를 잘 썼던 것으로 유명하였다.[『세종실록』 15년 2월 8일]
[성품과 일화]
신장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사람됨이 온후(溫厚)하고 공순하여 남에게 거슬리지 않았다. 술을 좋아하였으므로 세종이 그 재주를 아껴서 술을 삼갈 것을 친히 명하였으나, 스스로 금하지 못하였다. 죽음에 이르러 허조(許稠)가 듣고 탄식하기를, “이런 어진 사람을 오직 술이 해쳤다.”라고 하였다.[『세종실록』 15년 2월 8일]
[묘소와 후손]
신장의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검산동에 있다. 또한 신장은 1723년(경종 3) 나주의 설재서원(雪齋書院)에 배향되었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 권4, 「사전전고(祀典典故)」]
신장의 부인은 금성 정씨(錦城鄭氏) 정유(鄭有)의 딸로 5남 2녀를 두었다. 장남은 신맹주(申孟舟)이고, 차남은 신중주(申仲舟)이며, 삼남은 좌의정 신숙주(申叔舟)이다. 사남은 안동부사(安東府使) 신송주(申松舟)이고, 5남은 사간원(司諫院)대사간(大司諫)신말주(申末舟)이다. 장녀는 예조 참판 조효문(曺孝門)의 처이며, 차녀는 승지(承旨) 최선복(崔善復)의 처이다. 한편 신장은 고려 때 군기감(軍器監)을 지낸 신성용(申成用)의 후손인데, 신성용부터 시작하여 신장과 신장의 아들 및 손자인 신숙주와 신형(申泂)에 이르기까지 9대가 문과에 급제하였다.[『성호전집(星湖全集)』권60, 「正字申公墓碣銘(정자신공묘갈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