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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35년(세종 17) = ?]. 조선 초기 태종(太宗)~세종(世宗) 때의 문신. 중추원(中樞院)동지사(同知事)와 집현전(集賢殿)부제학(副提學) 등을 지냈다. 자는 보덕(輔德)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부사(副使)를 지낸 설경수(偰慶壽)이고, 어머니는 풍산 홍씨(豊山洪氏) 홍구(洪龜)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위구르 출신으로 고려 때 귀화한 설손(偰遜)이다.
1431년(세종 13) 『충신도(忠臣圖)』를 만들었는데, 세종의 명에 따라 고려의 충신인 정몽주(鄭夢周)와 길재(吉再)의 절개 또한 기리기 위하여 그들의 얼굴을 그리고 찬(贊)을 지었다.[『세종실록』 13년 11월 11일] 이듬해인 1432년(세종 14)에는 고려 때 불교의 폐단을 언급하며, 불법(不法)의 억제를 강력하게 주장하였으며, 그해 6월에는 집현전 부제학으로서 풍속을 바로잡기 위하여 우리나라와 중국 문헌을 참고하여 삼강(三綱)과 관련된 행실을 모은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편찬하였다.[『세종실록』 14년 3월 5일],[『세종실록』 14년 6월 9일],[『동문선(東文選)』 권44 「삼강행실전(三綱行實箋)」] 이어 8월에는 『고려사(高麗史)』 체제와 관련하여 맹사성(孟思誠),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강목체(綱目體) 대신 번거롭더라도 사실을 상세하게 서술할 수 있는 편년체(編年體)로 할 것을 주장하여 받아들여졌다.[『세종실록』 14년 8월 10일] 1434년(세종 16)에는 『자치통감(自治通鑑)』을 고열한 후 관련 서적들을 참고하여 그 뜻을 해설한 『자치통감훈의(自治通鑑薰衣)』를 만들었다.[『세종실록』 16년 6월 26일]
[성품과 일화]
설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사람됨이 거칠고 차근차근하지 못하여 사리를 잘 분별하지 못하나, 서사(書史)의 기송(記誦)에 조금 능하므로 집현전에 뽑혀 들어가서 마침내 참의에 이르렀다.[『세종실록』 16년 7월 27일] 또 성품이 질박하고 성실하여 거짓이 없으며, 책을 많이 읽고 사물을 잘 기억한데다가 더욱이 사학(史學)에 장점이 있었으므로, 임금이 그를 존중하였다.[『세종실록』 17년 10월 21일]
설순은 단독을 앓다가 의원 평순이 뜸을 잘못 뜨는 바람에 세상을 떠났다. 세종은 화가 나서 형조로 하여금 평순을 조사하게 하였는데, 형률에 의거하면 평순의 죄는 참형(斬刑)에 해당되었다. 그런데 설순을 치료한 평순은 귀화한 왜인 평원해(平元海)의 아들이었다. 이에 세종은 “평순의 죄는 이와 같지만, 그러나 귀화한 사람의 아들이니 마땅히 긍휼(矜恤)을 더해야 될 것이다.”라면서 장형 1백 대로 감해 주었다.[『세종실록』 17년 10월 21일]
[후손]
부인 풍산 홍씨(豊山洪氏)는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홍구(洪龜)의 딸이다. 1남을 두었는데 설동인(偰同寅)이며, 순창 설씨(淳昌薛氏) 설훈(薛纁)의 딸과 결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