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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16년(태종 16)~1464년(세조 10) = 49세]. 조선 초기 세종(世宗)~세조(世祖) 때의 문신이자 천문∙역법학자. 집현전(集賢殿)박사(博士)와 중추원(中樞院)첨지사(僉知事), 이조 판서(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자는 거원(巨源), 호는 무송헌(撫松軒)이고,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본관은 예안(禮安)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영유현령(永柔縣令)을 지낸 김소량(金小良)이고, 어머니는 평해 황씨(平海黃氏)로 고려 때 공조 판서(判書)를 지낸 황유정(黃有定)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고려 때 좌우위보승랑장(左右衛保勝郞長)을 지낸 김로(金輅)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정용장군(精勇將軍)을 지낸 김방식(金方軾)이다. 이순지(李純之)와 더불어 천문∙역법 전문가로서 중용되었다.
[세종 시대 활동]
1435년(세종 17) 정시(庭試)에 병과로 급제하여 집현전 정자(正字)로 임명되며 관직에 진출하였다. 이듬해 천문업무를 주관하던 봉상판관(奉常判官) 이순지가 모친상을 당하자, 승정원(承政院)의 추천으로 김담이 이순지 대신 간의대(簡儀臺) 근무 및 천문 측정 업무를 수행했다. 1437년(세종 19)에는 집현전 저작랑(著作郞), 1439년(세종 21)에는 집현전 박사가 되었다.
1441년(세종 23) 서장관(書狀官)으로 사신단에 포함되어 명(明)나라에 방문했을 때 절일사(節日使) 고득종(高得宗)의 직권 남용 사건에 연관되어 의금부(義禁府)에서 국문을 받았다.[『세종실록』 23년 윤11월 20일] 고득종이 황제에게 마음대로 약재를 요청해 촉발된 이 사건은 세종이 고득종의 고신(告身)을 빼앗고 나머지는 모두 불문에 부치는 선에서 종결되었다.[『세종실록』 23년 12월 15일] 이후에도 의금부∙사헌부(司憲府)에서 잇따라 사신단 전체에 대한 처벌을 요청했고,[『세종실록』 23년 12월 15일] 사간원에서도 김담과 이순지의 재기용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세종이 끝까지 보호하였다.[『세종실록』 24년 2월 4일] 다음해인 1442년(세종 24) 정인지(鄭麟趾)∙이순지 등과 함께『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을 완성하였다.
1443년(세종 25)에 봉상시 주부(注簿)로 임명되어 진양대군(晉陽大君)과 승정원(承政院) 도승지 이승손(李承孫)∙서운관(書雲觀)판사(判事) 이순지∙주부(注簿)박윤창(朴允昌)등과 함께 시험 양전(量田)에 참여하였다.[『세종실록』 25년 10월 25일] 나아가 좌찬성 하연(河演)∙중추원 지사(知事)정인지(鄭麟趾)∙서운관 판사 이순지∙주부 박윤창(朴允昌) 등과 함께 경기 안산(安山)에 가서 양전을 직접 실시하였다.[『세종실록』 25년 11월 14일] 이듬해인 1444년(세종 26)부터는 산술(算術)에 정통한 탓에 제방 축조에 관한 계산을 담당하는 제언종사관(堤堰從事官)으로 임명되는 등 실무 분야에서도 활약했을 뿐만 아니라, 이해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을 완성하였다.[『세종실록』 26년 8월 12일] 1447년(세종 29) 김담은 32세의 나이로 문과 중시(重試)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부교리(副校理)에 임명되고 왕명으로 전부구등지법(田賦九等之法) 찬정에 관여했다. 같은 해 사간원(司諫院) 우헌납(右獻納)이 되었으며,[『세종실록』 29년 7월 1일] 1448년(세종 30)에 서운관 부정(副正)으로 임명되었다.
김담은 1449년(세종 31)에 부친상을 치르기 위해 고향인 영천(榮川)으로 낙향했다. 하지만 세종의 특명으로 상제를 다 마치기도 전에 역법(曆法) 업무에 복귀했다. 이에 김담은 세종과 문종에게 상제를 다 마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세종의 완고한 거부로 결국 상제를 끝내지 못했다. 세종이 당시 이순지와 더불어 매우 드문 천문∙역법 전문가였던 김담의 공백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세종실록』 31년 7월 14일]
이후에도 김담은 세종 말년까지 혜성 관측 등 천문∙역법 업무에 계속해서 매진했다 [『세종실록』 31년 12월 22일] 또한 정인지∙정초∙정흠지∙이순지 등과 더불어 『칠정산내편정묘년교식가령(七政算內篇丁卯年交食假令)』, 『칠정산외편정묘년교식가령(七政算外篇丁卯年交食假令)』, 『대통력일통궤(大統曆日通軌)』, 『태양통궤(太陽通軌)』, 『태음통궤(太陰通軌)』, 『교식통궤(交食通軌)』, 『오성통궤(五星通軌)』, 『사여전도통궤(四餘纏度通軌)』, 『중수대명력(重修大明曆)』, 『경오원력(庚午元曆)』, 『선덕십년월오성릉범(宣德十年月五星陵犯)』등의 많은 천문∙역서를 교정 및 편찬하였다.
[문종~세조 시대 활동]
1450년(문종 즉위년)에 문종이 즉위하자 김담은 다시금 아버지의 상제를 마치기 위해 사직 후 귀향할 것을 요청했으나 거부되었고, 1451년(문종 1)에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문종실록』 1년 4월 2일] 세종 때 천문∙역법 업무와 양전 등의 실무를 담당했던 김담은 이때부터 비로소 조정의 중신으로서 활동하게 된다. 이때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안완경(安完慶)의 불사(佛事) 사건과 관련하여 절의 중을 잡아들여 국문할 것을 주장하거나[『문종실록』 1년 5월 3일], 흥천사(興天寺)에서의 기우보공재(祈雨報供齋)를 반대하는 등[『문종실록』 1년 5월 25일] 불사의 배척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1452년(문종 2)부터는 집현전 직제학(直提學)과 충주목사(忠州牧使) 등을 역임했다.
단종(端宗) 말엽에 이르러 충주목사로서 지역을 잘 다스린 공을 인정받아 김담에게는 통정대부(通政大夫)의 지위가 더해졌다.[『단종실록』 3년 4월 4일] 1455년(세조 1) 세조가 즉위하자 김담은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봉해졌으며 [『세조실록』 1년 12월 27일] 이듬해인 1456년(세조 2)에는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 1458년(세조 4)에는 중추원 첨지사와 예조 참의(參議)에 임명되며 조정의 중신으로서 꾸준히 활동했다.
같은 해 부모 봉양을 위해 중앙직에서 사직하고, 세조의 배려로 경주부윤(慶州府尹)이 되어 지방관 업무를 수행했다. 1461년(세조 7)에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한 김담은 2년 후 중추원 부사(副使)에 제수되었으며[『세조실록』 9년 7월 6일], 2달 후에는 이조 판서(判書)로 임명되는 등 세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세조실록』 9년 8월 29일] 1464년(세조 10) 7월 9일 48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문절의 시호가 내려졌다.
[성품과 일화]
김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이 단정하고 행동이 청렴 및 근신(謹愼) 했다. 시호인 문절 또한 부지런히 학문에 힘쓰고 청렴하며 극기(克己)한다는 의미이다.[『세조실록』 10년 7월 10일]
한편 1453년(세조 1) <계유정난(癸酉靖難)>이 발생했을 때 김담은 외관직인 충주목사였는데, 하위지(河緯地)를 방문하여“위태로운 나라에는 머무를 수가 없다”라고 말하는 등 정난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연산군일기』 4년 7월 12일] 실제로 그의 제자이자 사위인 이수형(李秀亨)은 계유정난에 반발해 낙향했고, 김담은 외직에 머물면서 이수형과 생육신 중 한명인 김시습(金時習)등과 교류했다. 이처럼 김담은 계유정난에 참여하지도 이를 긍정하지도 않았음에도 세조의 신임을 받아 원종공신에 봉해졌으며, 이조 판서까지 영전하였다. 1441년(세종 23)에 발생한 사신 고득종의 권한 남용 사건이나 1463년(세조 9) 사냥터에서 신하들이 태만하게 행동한 것과 관련하여 옥사에 갇히기도 했지만, 다수의 행동에 휩쓸렸던 것들이 대부분이여서 처벌받지 않았다.
김담은 충주목사, 경주부윤 등 지방관으로 활동할 때 장물을 엄금하고 도둑들 엄벌하여 경내에 도둑이 들어오지 못하게 해 백성들이 편안하게 지낼 수 있게 하였다.[『필원잡기(筆苑雜記)』] 또한 김담과 친했던 조선 초기의 학자이자 관료인 서거정(徐居正)은 경주부윤이던 김담이 객관 중수에 있어서“목재 하나, 돌 하나도 백성에게 부담을 전가시키지 않았다”며 칭찬한 바 있다.[『사가집(四佳集)』 권2「기(記)」] 단종 말엽 충정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였던 박팽년(朴彭年)도 “충주목사 김담과 홍주목사(洪州牧使) 조석문(曹錫文)의 다스림이 가장 뛰어납니다”라고 보고한 바 있으며, 그로인해 김담에게 통정대부의 직위가 더해졌다.[『단종실록』 3년 4월 4일]
[묘소와 후손]
김담의 묘소는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문단리에 있다. 1635년(인조 13) 장현광(張顯光)이 작성한 신도비명(神道碑銘)이 남아 있다. 이어 1652년(효종 3) 김담을 배향하는 단계서원(丹溪書院)이 경상북도 봉화에 세워졌고,[『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 권4,「사전전고(祀典典故)」] 1712년(숙종 38)에 이르러 서원으로서 공식 승격되었으나 ,1871년(고종 8)에 훼철된 후 끝내 복구되지 못했다. 4대손인 김륵(金玏)과, 6대손 김선(金鍌)이 김담이 생전에 남긴 기록들과 장현광이 지은 신도비명을 추가하여 1644년(인조 22) 문집을 간행한 이래, 후손들에 의해 계속해서 보완된 『무송헌문집(撫松軒文集)』이 남아있다.
부인 감천 문씨(甘泉文氏)는 성균관(成均館)직강(直講)을 지낸 문헌(文獻)의 딸로 4남 5녀를 두었다. 장남은 김만석(金萬石)이고, 차남은 김만균(金萬鈞)이며, 삼남은 김만평(金萬枰), 사남은 김만인(金萬引)이다. 장녀는 평시서령(平市署令)을 지내고 단종에 대한 충절로 이름이 높은 이수형의 처이며, 차녀는 권우(權瑀)의 처이며, 삼녀는 유대승(柳大承), 사녀는 김계흔(金啓昕)과 각각 혼인했다. 오녀는 사도시(司䆃寺)첨정(僉正) 금치담(琴致湛)과 혼인하였다.[「김담신도비명(金淡神道碑銘)」] 그밖에 김담의 4대손인 김륵이 선조(宣祖)~광해군(光海君) 때 중앙 정계로 진출하여 형조 참판(參判)과 안동부사(安東府使), 성균관 대사성(大司成) 등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