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1399년(정종 1)~1438년(세종 20) = 40세]. 조선 초 태종(太宗)~세종(世宗)때의 문신. 집현전(集賢殿)교리(校理)와 성균관(成均館)대사성(大司成),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지냈다. 자는 여서(汝鋤)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집현적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권우(權遇)이고 어머니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판사(判事) 홍빈(洪贇)의 딸이다. 또한 그의 백부가 고려 말~조선 초의 대유학자인 권근(權近)이다. 할아버지는 고려 말 검교좌정승(檢校左政丞)을 지낸 권희(權僖)이며, 증조할아버지는 고려 충숙왕(忠肅王)대에 우상시(右常侍) 등을 역임한 권고(權皐)이다. 시문과 경학에 뛰어나서 세종의 극진한 예우를 받았으며,『작성도(作聖圖)』를 저작하였다.
그러나 1년도 되지 않아 당시 집현전 응교(應敎)였던 권채의 첩이 돼지와 같은 형상으로 학대당한 것이 드러나 의금부(義禁府)에서 국문을 받았다. 세종은 국문을 통해 권채와 그의 처인 동래 정씨(東萊鄭氏)를 형률로 엄벌할 것을 지시했다.[『세종실록』 9년 8월 27일] 결국 1427년(세종 9) 형률에 의거하여 권채와 동래 정씨에게 각각 장 80대와 90대의 벌이 내려지고, 권채의 직첩(職牒) 회수와 외방 부처(付處)가 결정되었다.[『세종실록』 9년 9월 3일] 하지만 노비의 죄로 인해 양반이 심한 형벌을 받는 것이 강상(綱常)의 문란함을 초래할 수 있다는 허조(許稠)의 건의에 따라 권채의 관직만 파면되는 선에서 사건이 종결되었다.[『세종실록』 9년 9월 4일]
1428년(세종 10)에 집현전 교리(校理)로 복귀한 권채는 이후 주로 경연(經筵)에서 시강관(侍講官)과 검토관(檢討官)으로서 경전 등을 자문하였다. 1432(세종 14)년에 집현전 직제학으로 임명된 후에는 같은 해 집현전에서 편찬한『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의 서문이나, 공무로 인해 죽은 관원에게 바치는 치제문(致祭文) 등을 작성했다.[『세종실록』 14년 6월 9일],[『세종실록』 14년 9월 25일] 1433년(세종 15)에 성균관 대사성으로 임명되어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의 서문을 지었다. 더불어 비정기 과거 확대, 성균관 유생의 교도관(敎導官) 기용, 문벌을 이용한 성균관 입학 제한 등의 과거제 및 성균관 개선책을 세종에게 제안하여 시행하였다.[『세종실록』 15년 8월 22일]
1437년(세종 19)에는 승정원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자리를 옮겼는데, 이때 판서(判書)정연(鄭淵)과 승정원 우부승지 이계린(李季疄), 승정원 동부승지 성염조(成念祖) 등과 함께 철원의 민가에서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권맹손(權孟孫)으로부터 향응을 제공받아 사헌부(司憲府)의 탄핵을 받았으나, 세종에 의해 불문에 부쳐졌다.[『세종실록』 19년 10월 3일] 1438년(세종 20)에 승정원 우승지(右承旨)가 되었으나, 2달도 못된 5월 10일 40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세종실록』 20년 5월 10일]
문장력을 인정받아 『포은집(圃隱集)』,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등 세종 때 관찬(官撰)된 서적들의 서문을 작성했으며,『신증향약집성방(新增鄕藥集成方)』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백부인 권근이 지은 성리학 입문서인 『입학도설(入學圖說)』을 계승해 『작성도(作聖圖)』와 『작성도론(作聖圖論)』을 저술했으나 이는 현재 전하지 않는다.
[성품과 일화]
권채의 성품에 대한 평가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일화는 1427년(세종 9)에 권채와 그의 처 동래 정씨가 비첩(婢妾) 덕금을 학대한 사건이다. 덕금이 다른 남자와 간통했다는 동래 정씨의 모함을 들은 권채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모두 자르고, 매질한 뒤 발에 고랑을 채워 방에 가두는 등 매우 가혹한 면모를 보였다. 이 사건을 처음 접한 세종이“나는 권채를 차분한 사람으로 여겼는데, 그렇게까지 잔인한 사람이었던가? 이는 분명히 그 아내의 통제를 받은 것이다. 그러니 끝까지 철저하게 조사하라!”고 이야기할 정도였다.[『세종실록』 9년 8월 20일] 심문과정에서도 아내 동래 정씨와 더불어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노비의 진술을 문제 삼는 태도를 보여 의금부 제조 신상(申商)으로부터“이 사람은 단지 학문을 배웠을 뿐 부끄러워 할 줄 모릅니다.”라는 평가를 받았다.[『세종실록』 9년 8월 29일]
또한 자신의 생원시 합격 때의 시험관이자 사가독서 지도관이었던 변계량(卞季良)과도 다소 갈등이 있었다. 1428년(세종 10) 중추부(中樞府)판사(判事)였던 변계량은 과거 시험에 있어서 경전 강독 보다는 글짓기인 제술(製述)을 위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집현전 교리였던 권채는 예문관(藝文館)제학(提學)윤회(尹淮)와 예문관 수찬 이선제(李先齊) 등과 함께 경전 강독을 중시해야 한다며 변계량의 견해에 반대했다. 그러자 변계랑은 “춘추관의 많은 사람들이 나의 견해를 따르는데, 그대(이선제)와 권채만 따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권채는 특이하게도 숙부인 권근의 견해를 고려하지 않는 것인가?”라며 불쾌한 감정을 드러냈다.[『세종실록』 10년 4월 23일]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430년(세종 12)에 변계랑은 세종에게 권채의 사가독서가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고 보고하는 등 이후에도 둘의 관계는 개선되지 않았다.[『세종실록』 12년 5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