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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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헌(尹持憲)

서지사항
항목명윤지헌(尹持憲)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천주교도
유형인물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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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64년(영조 39)~1801년(순조 1) = 38세]. 조선 후기 정조(正祖)~순조(純祖) 때의 천주교도. 세례명은 프란치스코이다. 본관은 해남(海南)이며, 거주지는 진산(珍山)이다. 아버지는 윤경(尹憬)이고, 어머니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권기징(權沂徵)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윤덕렬(尹德烈)이며, 증조할아버지는 화가로 유명한 윤두서(尹斗緖)이다. 정약전(丁若銓)·정약용(丁若鏞) 형제의 어머니가 고모이기도 하다.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처형되었다.

[정조 시대 활동]
윤지헌(尹持憲)은 1786년(정조 10) 무렵 고종 사촌인 정약전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운 후 1787년(정조 11) 이승훈(李承薰)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그의 형 윤지충(尹持忠)의 전교로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그런 가운데 1791년(정조 15) 어머니 안동 권씨가 세상을 떠난 후 제사를 지내는 문제로 야기된 <진산사건(珍山事件)>으로 형 윤지충과 외사촌 권상연(權尙然)이 처형당하자 한동안 거주지를 옮겨 생활하였다.[『정조실록』 15년 10월 24일],『정조실록』 15년 11월 8일 2번째기사] 1790년대 중반 다시 천주교 활동을 시작한 윤지헌은 1795년(정조 19) 주문모(周文謨)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북경에 보낼 밀사로 황심(黃沁)을 천거하는 등 천주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辛酉迫害)>가 발발하면서 체포된 윤지헌은 국문을 받던 가운데 황심을 북경 밀사로 천거한 사실과 이우집(李宇集)의 폭로로 알려진 대박청래(大舶請來) 사실을 자백하였다.[『순조실록』 1년 4월 25일],[『순조실록』 1년 5월 16일] 그리하여 그는 국사범으로 취급되어 유항검(柳恒儉), 유관검(柳觀儉) 등과 함께 전주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능지처참의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그해 9월 전주에서 처형되었다.[『순조실록』 1년 9월 11일],[『순조실록』 1년 12월 22일]

2014년 윤지헌은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복자로 시복되었다.

[후손]
부인 유종항(柳宗恒)으로부터 3남 2녀를 두었는데, 윤지헌이 처형된 후 가족들은 노비가 되어 전국 각지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아내 유종항(柳宗恒)은 흑산도로, 장남 윤종원(尹宗遠)은 거제도로, 차남 윤종근(尹宗近)은 거제도로 갔으며, 삼남 윤종득(尹宗得)도 경흥으로 유배되었는데 당시 4세였다. 또 장녀 윤영일(尹英日)은 경흥으로, 차녀 윤성애(尹成愛)는 벽동군으로 유배되었다.

[참고문헌]
■ 『정조실록(正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일성록(日省錄)』
■ 『눌암기략(訥菴記略)』
■ 『벽위편(闢衛編)』
■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 『만가보(萬家譜)』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 『사학징의(邪學懲義)』
■ 한국천주교회사 편, 『한국가톨릭대사전』9, 2002.

■ [집필자] 정주영, 김가람